#제124화 (25)
영의의 대답에 모두가 경악했으나, 의외로 가장 충격을 받았을 혁련무강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하하, 그래. 자네는 냉큼 좋다고 말할 인물이 아니지.”
혁련무강의 웃음에 영의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아 주었다.
“네, 제가 좀 그렇긴 하죠.”
“그럼, 왜 거절한 건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 정도는 들려줄 수 있지 않겠나?”
이유에 대해 물어보는 혁련무강의 질문에, 장화관을 비롯한 모두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원체 범상치 않았으니 거절하는 거야 그럴 수 있겠지만 거절한 이유가 뭘까?
“제가 나름 의리라는 게 있어서요. 임시 제자 하겠다고 해놓고 홀랑 다른 쪽의 제자로 들어가면 배신이니까.”
강호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행동만 하던 영의였지만 이런 면에서는 의외의 면을 보여 주었다.
“허어, 의리라고?”
혁련무강은 독고휘와의 의리라는 말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도둑놈 사이의 의리란 것도 있으니까요.”
베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빅터에게 배신을 당했었더라도 발레리와 다른 이들은 그래도 의리가 있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그 할아버지는 제법 의리를 지켜 줬었지.’
끝까지 돕진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도와주는 것도 의리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리 쉽게 배신할 순 없죠.”
“의리…… 의리라.”
영의의 말에 혁련무강은 뭔가 유심히 생각하듯 연신 중얼거리더니 이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타앙!
“좋다! 그럼 본좌의 임시 제자가 되거라!”
혁련무강의 임시 제자 제의에 당황하는 영의.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요? 그리고, 제가 왜 제자를?”
‘호탕하게 알겠다고 할 것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이렇게 나온다고?’
영의는 혁련무강이 크게 웃으며 의리라니 참 간만에 들어 본다며 칭찬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그를 붙잡으려는 듯 임시 제자까지 제안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본좌는 비무대회 날, 수하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써서라도 강제로 독고휘와 대면하는 자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쪽 녀석들도 멍청하진 않으니 원한 관계를 강제로 청산하기보다는 적당하게 풀 자리를 마련하겠지.”
혁련무강은 비무대회에 마교의 고수들을 데리고 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묵은 감정이 있는 고수들을.
“마뇌의 예측으로는 젊은 녀석들은 모아다 놓고 비무대회처럼 진행하고, 고수들끼리는 생사결을 하게끔 따로 자리를 마련할 거라고 했었지.”
그리고 마뇌의 예측은 생사결만 뺀다면 거의 사실에 들어맞았다.
무림맹 측은 비무대회를 무림초출부와 고수부로 나눠 일정 경지와 명성 이하의 인원들은 출전 제한을 걸어 두는 방안으로 진행하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생사결이 성사될 경우, 전쟁의 불씨가 되기가 쉬워지기에 독고휘를 어떻게든 설득해 일이 극단적으로 치달을 경우 제지를 요청할 것도 고려하고 있었지만 독고휘가 승낙할 거란 기대는 안 하고 있었다.
“음,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거기서 독고휘와 본좌가 결판을 낼 것이다. 이긴 자가 제자를 갖는 거지. 더 강한 자에게 배우는 것이 강자를 꺾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나?”
영의는 혁련무강이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영감님들 두 명이 나 하나 가지고 싸우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물론 싸움 자체야 본인들의 희망 사항이겠지만 거기에 걸린 상품(?)이 희망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제가 하기 싫다면요?”
“그럼 어쩔 수 있나. 자네를 제자로 삼는다고 동네방네 떠들어야지. 자네는 개의치 않더라도, 무림은 신경을 잔뜩 쓸 걸세.”
“아니, 무슨 천마씩이나 되어서 그렇게 치사한 방식을 써요?”
언론 플레이를 하려 드는 혁련무강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영의.
“그렇다고 내게 진위를 따지러 올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혁련무강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사실 여부를 물어보려면 독고휘와 혁련무강, 둘 중 한 명이라도 만나야 하는데 누가 만나 주겠는가.
“소문을 이용하는 건 약자들과 얍삽한 놈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지. 본좌가 저 사막의 모래를 보고 물이라 하여도 누가 그 말에 정면으로 맞서겠는가?”
강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거만하면서도 당당한 패기 있는 모습에, 영의는 주눅이 들 뻔했지만 믿는 바가 있었다.
“독고휘 영감님요.”
“음?!”
숙적, 라이벌, 친구보다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 천하제일인을 두고 다투는 관계의 이름이 나오자 말문이 막히는가 싶었지만 교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지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그 녀석은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자네는 비무대회에서 그 모든 소문에 대처할 수 있겠나?”
비무대회의 시작 때 그런 소문을 흘려 두고 퍼트리면, 과연 영의가 그 모든 걸 감당할 수 있겠냐며 압박해 오는 혁련무강.
“안 하면 되겠죠, 그거야. 뒷일이야 뭐 누구든 간에 알아서 처리할 거고.”
“그, 그런.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릴 셈이냐?”
“그게, 죽음 앞에서는 그딴 게 없더라고요.”
스승과의 의리를 말했기에 잠깐이지만 영의를 무림인이라고 생각해 버린 혁련무강이었지만, 영의는 비무대회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안 나가면 그만이었다.
‘음, 너무 심했나? 이쯤 하고 슬슬 하겠다고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영의는 혁련무강의 제안을 수락했다.
“에이. 뭐, 영감님들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어차피 제 말 안 들으실 거면서.”
‘또, 나이 드신 분들이 삐지면 은근히 오래간단 말이야. 어르신들 고집이랑 자존심은 이길 방법이 없지.’
계속 튕겨 봤자 앞으로의 관계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고, 영의의 감에 따르면 둘은 무승부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하하하! 좋다! 본좌에게 아주 특출 난 제자가 생겼구나!”
혁련무강은 크게 웃으면서 기분 좋은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무대회에 나간다면 아마 자네가 우승하긴 할 거야. 적어도 강이나 진이보다는 강하니.”
첫째와 둘째 형들을 이긴다는 말에 깜짝 놀라 영의를 쳐다보는 와룡과 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이 사람이, 큰형님을 이긴다고?’
‘역시 새와 대화를 할 때부터 범상찮은 것을 느꼈지만, 무공마저 강하다니. 대단하다…….’
연화는 이미 일전에 영의의 모습을 보았고, 장화관은 경지가 있었으니 이미 영의를 꿰뚫어 보았기에 놀라지 않았다.
“자! 그럼 본좌는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보거라.”
먹던 치킨까지 억지로 손에 들려 쥐여 주고는 모두를 허공섭물로 들어내 방 밖으로 내쫓는 혁련무강.
타앙!
문이 닫힌 뒤, 장화관과 연화는 그 와중에도 치킨 박스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있었고 와룡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편, 콜라가 담긴 찻잔을 들고 방금 나온 문을 바라보고 있던 혁련운은 무심코 손에 들린 콜라를 마셨다.
“음……!”
입안을 가득 채우는 청량감과 뇌 속을 헤집는 듯한 당분의 습격.
의욕 없이 살던 혁련운에게 변화를 주기에는 충분한 자극이었다.
그렇게 새와 대화를 할 수 있고 엄청난 진미를 가져온 이방인에게 혁련운은 의문의 동경을 품기 시작했다.
모두를 내보내고 난 뒤, 방에 기막을 몇 겹씩 치며 보안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혁련무강.
“흠,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신 거죠?”
아까부터 묘하게 예전과 다른 태도로 나온 혁련무강이 수상했던 영의.
“미안하군, 본좌에겐 하나라도 자네를 믿거나 잡아 둘 만한 구색이 필요했네.”
“그래서 그렇게 임시 제자라도 하라고 천마신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건가요?”
“음, 사실 제자로 삼고 싶은 건 진심이지만 용건이 없었다면 방금 전처럼 나오진 않았겠지.”
“말씀해 보세요. 뭘 말하려고 절 제자로 삼으려고 하고 이렇게 방을 꼭꼭 틀어막기까지 한 건지.”
“사실, 이건 교에서도 나만 아는 이야기일세. 원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네라면 뭔가 방법을 알지도 모르지.”
그렇게 혁련무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교의 외부인인 영의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혁련무강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온 영의.
“하, 이건 진짜 생각지도 못했네. 그보다 되게 의외인데. 안 그래?”
끄덕끄덕.
영의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뇌영.
대전의 내부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려던 영의는 대전에서 그를 기다리던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음? 넌…….”
“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셨군요, 귀인.”
대전에서 영의를 기다리던 것은 혁련운과 그의 누나인 연화였다.
“그보다, 귀인이라니? 갑자기 왜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 거죠?”
“귀인께서 늘 새로운 요리를 가져오시지 않습니까. 저와 최고숙수 같은 이들에게는 최상승 무공의 비급보다 그런 새로운 요리들이 더 귀하니까 그렇습니다.”
연화는 이번에 영의가 가져왔던 파닭을 먹고, 또 다른 신세계를 맛본 듯 영의를 아주 지극정성으로 모시려는 듯이 보였다.
“어, 으음. 네.”
상대가 너무 공손하게 나오자 떨떠름해진 영의는 문득 연화는 그렇다 쳐도 혁련운은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이 샘솟았다.
“운, 이었나?”
영의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자, 그의 곁으로 다가가 꽃이 되려는 듯한 기세로 활짝 웃는 혁련운.
“예.”
“너는, 왜 여기 있지?”
연화에게서는 묘하게 성숙한 분위기를 느꼈고, 또 혁련무강이 감싸고돈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기에 존대를 했었다.
하지만 혁련운은 확실히 영의보다 앳되어 보였고, 혁련무강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기에 말을 놓은 영의.
혁련운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영의에게 존대를 했다.
“저 또한, 귀인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응? 너도 귀인이라고?”
연화의 존대야 나름 이해가 간다.
예전에 장화관과 연화가 보여 줬던 반응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차분하게 존대하는 것이 오히려 얌전한 반응이라고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그저 존대만 하면 모를까, 귀인이라고까지 부른다고?
‘남매가 다 나를 그렇게 부르기로 타협했나?’
영의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혁련운이 바닥에 냅다 엎드렸다.
“귀인! 제발, 저에게 새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혁련운이 그런 돌발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당황한 연화.
정말 당황한 건지, 영의가 앞에 있는 것도 까먹은 듯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 운아야?”
“뭔데? 갑자기 왜?”
혁련운은 엎드린 채 영의에게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귀인! 저는 언제나 새처럼 되기를 소망하고 새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새처럼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영의는 혁련운의 말을 들으며 무림 세계에서는 저런 걸 동경하는 건가? 싶은 생각을 하는 동시에 되지 않나? 싶은 생각도 했다.
‘날 수 있지. 있기는.’
자신의 뇌룡보라든가, 혁련무강과 독고휘가 보여 줬던 허공답보 같은 거라든가.
“아니, 비행 같은 건 못해도 경공을 쓰면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다닐 순 있지 않나?”
“그건 비행이 아닙니다! 사람은 날개가 없지 않습니까? 새처럼 날 순 없더라도, 하다못해 새와 대화라도 할 수 있다면!”
영의는 혁련운을 보며 묘한 감상을 품었다.
‘대체 왜 내가 다른 세계에 건너와서 만나는 인물마다 멀쩡한 사람이 없는 거지?’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에게 빌고 있는 청년을 차마 미워하거나 뭐라고 할 마음이 들지는 않는 영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