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24)
영의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미청년을 보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좋게 말하면 사내답고, 나쁘게 말하면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얼굴인 혁련무강에게서 저런 아들이 나왔다니.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 맑은 눈과 묘하게 선한 웃음을 띠고 있는 입까지.
연화도 수려한 외모였고, 방금 전 본 운도 크게 나쁜 외모는 아니었지만 와룡은 확실히 미남에 가까웠다.
‘대체 엄마가 누구길래? 아니, 뭐 천마 정도면 미인이랑 결혼할 법도 한데.’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고 질문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독고휘의 아들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지금까지 본 혁련무강의 자식들은 거의 다 자신의 동년배이지 않은가.
“흐음, 날 뭐라고 해야 하나? 천마 영감님!”
연화의 잔소리를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흘리던 혁련무강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탈출할 기회라 여긴 듯 큰 반응을 보였다.
“그래, 본좌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가? 뭐든 대답해 주지.”
영의는 혁련무강이 갑자기 뭘 물어봐도 본격적으로 대답해 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당황했지만 원래 하려던 말을 했다.
“어, 물어볼 건 아닌데 여기서 제 정체 밝혀도 되는 거예요? 나름 비밀 아니었나요?”
“흐음, 자네를 본 것이 심복들에 가족들뿐이긴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군. 근데 그건 왜 묻나? 예전엔 이렇게 허락을 구하는 성격이 아니지 않았나?”
예전에는 조금 더 막 나가던 영의였지만,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니 조금 흐뭇해진 혁련무강이었다.
‘흐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걸 보니 우리 교를 그리 싫어하진 않나 보군.’
혁련무강의 말에 영의는 독고휘의 제자란 신분을 말해도 되나 싶은 생각을 했다.
“어, 조금 껄끄러운 신분이 하나 생겨서요. 마교에서 밝히기엔 조금 애매한 거라.”
예전에 뇌기를 느낀 것 하나만으로 보여 주던 그 모습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조심스러워질 만했다.
하지만 혁련무강은 영의의 그 말에 웃으면서 농담까지 했다.
“하하, 껄끄러운 정도야 뭐가 어떤가. 자네가 무림맹주나 대문파의 장문인이면 말이 다르겠지만.”
“아하하, 그렇죠? 별 상관 없겠네요.”
영의가 나름 후련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혁련무강은 문득 무슨 신분이길래 껄끄러워하는 건지 의문스러워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대체 무슨 직함을 얻었길래 그런가? 무림맹 무력대의 대주? 아니면, 어떤 문파의 사범이라도 되나?”
아마 저 나이에 지닌 무력 수준을 생각해 보면 꼬장꼬장한 원로들의 성정을 고려하더라도 무림맹 직속 무력대의 대주직위정도는 얻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음, 일단 자기소개하면서 얘기할게요.”
“뭐, 그러게.”
영의의 대답에 혁련무강은 콜라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음, 이쪽도 알고 권마 검마 영감님도 알겠지만 일단 소개를 하자면 천마 영감님한테 천마군림보를 배웠고-”
무공 한 자락을 배웠고, 기술 이름도 붙여 줬고, 그 대가로 선물을 가져다주던 관계라고 설명했다.
“뭐, 무슨 교환비가 그런가 싶겠지만 천마 영감님이 직접 가르쳐 줬으니까.”
직접 무공을 배웠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할 말을 잃은 운과 와룡.
그리고 장화관도 영의의 신분에 관심이 생긴 듯 질문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직함은 뭐지? 청룡대주? 주작대주? 아니면, 뇌섬문 사범쯤 되나? 소림은 아니겠고.”
영의는 상당히 편해 보이는 분위기에 그만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 그냥 별거 아니고 독고휘 영감님 임시 제자요.”
그리고 그 말은 들은 혁련무강이 음미하던 콜라를 뿜은 것은 덤이고.
푸읍-
“뭐라고 했나?”
갑자기 싸늘해진 방 안의 분위기에 뭔가 잘못됨을 직감한 영의.
“어?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휘익(맞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 와중에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던 연화가 질문했다.
“임시 제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임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연화의 반응과 그 단어에 정신을 차린 혁련무강.
“잠깐, 임시라고? 세상천지에 누가 무공을 가르치는데 임시니 뭐니 하는 말을 붙이느냐. 객잔에 급히 들이는 점소이도 아니고.”
무림인들의 기준에서 스승과 제자는 제2의 부모 자식의 관계와도 같았으므로, 앞에 임시를 붙인다는 건 임시 아버지와 임시 아들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으음, 뭐 그렇게 됐어요. 제가 뭐 정식으로 뭘 다 배울 여건도 안 되고. 비무대회 참여할 때 쓸 대외적인 신분 겸.”
영의는 곧바로 자신이 임시 제자라는 신분을 얻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까지는 무공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더 많은 힘과 싸움 방식을 배울 필요성이 생겼고, 가장 좋은 해법이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독고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련무강은 세상 경험과 무공에 매진한 경험이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많았기에, 그 말의 의도와 배경에 대해서 꿰뚫어 보았다.
“흐음, 틀림없이 자기보다 강한 강자와 만나서 싸웠겠군?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간신히 이겼거나 도망쳤겠고.”
혁련무강이 정확하게 짚어 내자, 영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정확하네요.”
“휘야오(딱 맞아)!”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어지간해서는 패배하기 쉽지 않을 걸세. 뇌기에 대해 통달할 정도로 연구를 했거나 뇌기에 아랑곳하지 않을 만한 절대고수를 빼고는. 흠, 누구지?”
혁련무강은 영의가 상대한 인물의 후보를 머릿속으로 추려 보고 있었다.
“뭐, 뭘 어떻게 때려도 멀쩡했던 상대라서요.”
“흐음, 외공의 고수인가 보군. 그럼 그럴 수 있지. 뇌기가 몸 안에 침투해야 비로소 상대의 움직임을 봉하게 되니까.”
“아, 외공 고수면 그게 조금 안 먹혀요?”
지금까지 뇌기를 꽂아 넣기 이전에 자체적인 능력만으로 어지간해서는 다 해결이 됐었다.
하지만 혁련무강의 설명에 따르면, 뇌기로 자신을 강화하거나 공격 수단으로 삼는 것도 충분히 강하지만 가장 강한 건 체내에 침투해 행동을 억제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마비를 일으키는 게 제일 핵심이란 거네요?”
“그렇지. 아주 잠깐이나마 몸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다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검을 꽂아 넣는 게 가능하니까.”
영의는 그 말을 들으며, 어째서 독고휘가 검황이라고 불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떻게든 상처를 내고 직접 체내에 뇌기를 때려 박은 거겠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검술이 단련된 것일 테고.’
혁련무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뇌기를 완전히 무시할 법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사파의 몇 놈 빼고는 크게 떠오르지 않는군. 소림의 땡중 놈은 목숨 걸고 싸울 일이 없을 거고.”
소림의 땡중, 혜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장화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혜윤, 그 녀석은 절대 살계를 열지 않습니다. 저와 싸울 때 빼고는 한 번도 열지 않았지요.”
혜윤은 망명 높은 스님답게, 살계를 절대 열지 않았다.
마교의 인물들을 상대할 때도 무조건 제압만 했었고 그런 혜윤을 나무라거나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병장기에 몸을 내어 주고 상처 하나 없이 웃으며 상대방을 바닥에 쓰러트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혜윤도 모든 걸 집어던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가 있었으니, 바로 장화관과의 결전 때였다.
“아아, 그래. 둘이 싸울 때가 가장 처참했었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이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별 없이 머리통이 터지거나 핏줄이 터지거나 둘 중에 하나였으니까.”
지금이야 민머리에 수염을 길러서 허허 웃는 할아버지의 풍모를 지닌 장화관이었지만, 과거에는 엄청났다는 얘기를 하자 흥미를 보이는 영의.
“뭐야, 옛날에 좀 날렸어요?”
장화관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자 손사래를 쳤다.
“옛날의 이야기다. 지금은 숙수일 뿐이지.”
하지만 혁련무강은 옛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났는지 계속 과거의 썰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검마와 권마도 전장에서 저 녀석이 싸우는 곳에는 가지 않았지. 한번 눈이 돌아가면 주변의 살아 움직이는 걸 다 베어 넘겼으니.”
그리고 와룡도 옛 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듣자 흥미가 샘솟았는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버님. 그게 그 유명한 폭혈도의 전설인가요?”
“그래, 스칠 때마다 베여 버린 몸에서 피가 폭발하듯 터져서 붙은 이름이지. 피를 터트려 버리는 칼잡이.”
지금이야 숙수지만 과거에는 마교에서도 이름 높은 마인이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직접 인정하고 칭찬까지 하자 눈을 빛내는 와룡.
“크흠,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시죠.”
분명히 대화의 방향을 틀어 버린 건 장화관이었지만 그는 부끄러웠던 건지 이야기의 주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했다.
“뭐, 본인이 싫어하니 그만두도록 하지. 본좌 또한 식사를 책임지는 숙수가 감정이 상하는 건 싫으니.”
영의는 다른 세계에서의 거물 각성자를 상대로 싸웠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음, 아마 천마 영감님이 아는 상대는 아닐 것 같은데요. 아무튼 그런 상황이 왔을 때 대처할 방법이 필요해서 그렇게 제자가 됐죠. 아, 임시 제자요.”
혁련무강은 영의의 말을 듣고는 생각을 정리하려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좋다. 그런 거라면 본좌도 이해하지.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시련과 고난도 감수해야 하는 법.”
뭐라고 하거나 조금 난리라도 칠 줄 알았건만, 이해해 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혁련무강을 보자 안심하는 영의.
“아, 이해해 주시니 고맙-”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그러니! 본좌의 제자가 되어라!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자잘한 기술과 어쭙잖은 힘은 상대도 안 되는, 압도적인 힘을 손에 넣게 해주마!”
“예?”
갑작스러운 독고휘의 급발진에, 영의는 당혹스러워졌다.
“너에게 내공심법이 안 맞는 것은 알고 있다! 내공이 보잘것없어 뇌기로 대체하는 것도!”
물론 절대자에 가까운 혁련무강의 입장에서야 보잘것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마력이 있는 편이었기에 약간 발끈한 영의.
“아니, 보잘것없다고요? 영감님, 말이 좀 심하신-”
“하지만 천마신공은 다르다! 지상에 내려온 절대적 존재, 천마께서 직접 만들고 전수하신 무공! 본래는 최고의 자질을 가진 이에게만 전수되나 반드시 한 명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지!”
뭐라고 반박하려던 찰나, 혁련무강의 말을 듣고 내용이 파악되기 시작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존이시여! 설마?!”
모두가 천마신공을 외인에게 전수해 준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몸이 굳어 있을 때, 장화관만이 입을 열 수 있었다.
“너에게 신공을 가르쳐 주마! 천마군림보를 자신의 것으로 바꿨던 너의 재능이라면 신공의 무공 또한 너에게 도움이 될 거다! 심법은 못 배우겠지만, 초식은 다르다!”
그 이야기를 듣자, 장화관은 말을 거두어 달라고 외치려 한 것을 멈추었다.
‘모든 초식은 심법에 최적화된 동작들이다. 하지만 심법을 뺀다면 그건 그저 움직임일 뿐.’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아마 심법까지 전수한다 했다면 모든 교인들이 들고일어나도 할 말이 없었다.
“본좌의 제자가 되거라! 교에 입적하라고도 하지 않겠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것도, 본좌에게 구배지례를 하라고도 하지 않겠- 그건 하는 게 낫겠군.”
그래도 절만큼은 받는 게 맞지 않은가 싶은 생각에 구배지례는 받겠다고 하는 혁련무강.
“자, 어떠냐? 본좌의 가르침을 받아 보겠느냐?”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넙죽 절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무엇보다 이름 높은 신공인 천마신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 아닌가.
심지어 별 조건도 없다. 마교에 들어올 필요도, 가르침을 받은 뒤 연을 끊으란 것도 아니다.
구배지례야 뭐, 없는 셈 치고.
모두가 영의의 입에서 예라는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 그건 좀.”
그건 좀?
그건 조오오옴?!
혁련무강이 외쳤을 때보다 더한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