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22)
점심을 먹기엔 늦었고,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치킨집을 나서는 영의의 손에 들린 치킨 봉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치킨을 먹고 싶은 마음이라는 건 마치 교통사고처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급격한 속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마음이 들자마자 사 먹지를 않는 것일 뿐.
“흠, 뭐 그 영감님이면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보관하다가 밥 먹을 때 먹을 것도 같긴 하지만.”
혁련무강이 치킨에 대해 보여 주는 태도를 고려해 보면 사실 밤에 잘 때 찾아가도 활짝 웃으며 반겨 줄 것 같긴 했다.
“음, 콜라도 챙겼고.”
사실, 치킨보다는 콜라를 조금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눈치였지만 아무렴 뭐 어떤가.
영의가 바이크에 올라탄 뒤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디선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안착하는 뇌영.
“그럼 가볼까?”
도심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르자, 영의의 눈앞에는 교외의 한적한 풍경이나 도로가 아닌 노을 진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태양이 타오르는 불덩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일렁이는 공기의 뒤로 붉게 물든 석양이 아름다웠다.
“이야, 역시 도시가 아니라서 그런가. 경치는 좋네. 그렇지?”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물은 말이었지만, 뇌영은 풍경 같은 것보다는 지상의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래, 노을 지는 게 너한테 뭐가 중요하겠어?”
마교의 성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영의는 문득 이번에는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시각, 혁련무강의 개인 방에서는 찻잔이 올려진 탁자의 앞에 혁련무강과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혁련무강에게는 정실부인들과의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곧 이립인 첫째 아들 강.
맏이인 만큼 주변의 기대를 안고 컸으며, 혁련무강의 아들 아니랄까 봐 권각술에 조예가 깊어 권마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후계 경쟁이 있는 만큼, 혁련무강이 직접 가르치지도 못했고 정해진 스승도 없었으나 권마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재 경지 초절정 중후반. 벽을 만나 막힌 지 이 년째였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로, 형과 두 살 차이 나는 둘째 아들 진.
형을 따라 권각술을 연마하던 때에, 몸의 움직임이 검술에 조금 더 적합할 거라 생각해 본 숙부 혁련무성의 조언을 들은 뒤 검술에 매진했다.
실제로 수련해 보니 권각술보다는 검술의 성취가 더 잘 늘었지만 권각술에 대한 미련이 있는지 둘 다 파고들기 시작해 현재까지 계속 두 가지를 다 잡으려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심오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대련에서는 확실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현재 경지 초절정 중반. 형과는 달리 아직 벽을 만나지 못했다.
셋째인 딸 연화.
어린 나이부터 재능을 보여 오빠들보다 빠른 성취를 이뤘지만, 후계에 관심이 없었고 장화관을 따라 요리의 길로 빠졌다.
최근에는 또다시 혁신적이고 새로운 요리가 없을까 고민 중.
곧 약관에 이르는 막내아들 와룡.
사실 처음 이름은 그냥 용이었다. 다만 나중에 바뀌었을 뿐.
무재를 타고난 와룡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교육을 받을 때 수련보다는 제왕학과 이런저런 지식에 더 관심을 보였다.
혁련무강은 그런 와룡을 타일러 보려 했으나, 와룡은 어린 나이에 감히 혁련무강에게 대들며 공부하는 게 더 좋다고 외쳤다.
그 패기에 감탄한 혁련무강이 마음대로 하라며 허락했고, 이내 서고에서 틀어박혀 살다시피 하다 혁련무강과 다시 만났을 때엔 마뇌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본인의 꿈은 학자가 되는 것이나, 여건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기회를 봐서 과거를 치르러 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공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혁련무강이 이왕 할 거면 제갈량처럼 되라며 이름을 와룡이라 바꾸었다.
물론, 혁련무강은 제갈가를 싫어하긴 했지만.
그리고 정실부인들에게서 나오진 않았지만, 혁련무강의 자식이 한 명 더 있었다.
대전 이후 세력을 다시 다지며 회복하던 때에 잠깐 만난 매력적이면서 강했지만, 돌연 사라져 버린 한 여인의 아이.
그 여인은 비밀로 하고 아이를 키우려 했으나,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다 무리한 건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녀가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 따라 그녀의 아들이 유품과 편지를 가지고 어린아이의 몸으로 혼자 사막을 가로질러 수백 리를 걸어왔고, 거의 쓰러지기 직전에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아이 혼자 수백 리를 걸어왔다는 이야기는 혁련무강의 귀에도 들어갔고, 직접 보러 갔을 때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아들이라고 직감했다.
아이에게 편지와 유품을 전해 받고 편지에 적힌 운이란 이름대로 아이를 혁련운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아들이라 교인들 앞에서 공표했다.
그렇게 친부를 찾았으니 제대로 살 거라 생각한 운은 어째서인지 모두와 거리를 두는 듯한 행동을 했다.
처음에야 낯선 환경에 갑자기 생긴 친부와 형제자매에 어색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10년을 넘긴다면 얘기가 다르다.
어린 나이에 사막을 가로질러 찾아왔으니만큼 대부분의 교인들은 인정했고, 연화와 와룡도 새롭게 생긴 형제를 환영했다.
물론, 후계 경쟁에 관심 없는 둘이었기에 진심으로 환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강이나 진이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본인들의 수행에 몰두하는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빴기에 새로운 형제가 생겼어도 자신의 경쟁 상대는 두 살 차이 나는 형제라 여겼기에 거의 무관심했다.
무공을 가르쳐도 기본기만 배우고 나머지는 배움을 거절하고, 와룡처럼 학문에 뜻이 있는가 싶었지만 학문도 몇몇 필요한 것만 배우고 그만두었다.
그 외에 다른 대장일과 요리, 재봉, 세공 등의 모든 것들을 배우러 다닌 운.
그러나 기본기와 적당한 응용 기술을 배운 뒤에는 더 이상 배우지 않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오래 잡고 있는 것이 의학이었지만, 그마저도 적당히 뒤적거리다 마는 수준이었을 뿐.
어지간해서는 그렇게 의욕이 없다는 듯 아무거나 배우다 멈추는 자식이 있다면 화가 날 법도 하지만, 혁련무강은 어째서인지 절대 화내지 않았다.
모든 교인이 매일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기만 하는 혁련운을 왜 방치하는지 의문을 품었지만, 단 하나. 그들도 납득할 그 모든 것을 뒤엎을 장점이 있었다.
혁련운에게 기본적인 무공을 가르쳐 본 교관도, 학식을 가르친 학자들도, 그 외에 다른 것을 배우러 찾아갔을 때 만난 이들도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말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전무후무한 천재다!
혁련무강이 보는 앞에서 무공을 쓰거나 배우는 걸 본 적이 없었고, 직접 찾아갔을 때에도 절대 자신의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처음 무언가를 익힐 때 어디까지 하는 것이 보통인지 몰랐기에 보여 준 재능의 편린만이 유일한 증거였고, 무공이나 학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운의 방에 그 잔재가 남아 있었다.
실물과 똑같이 그려내 선물했던 연화의 초상화나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 개조 의복, 더 편하게 만든 침상 등 재능의 결과물이 많았지만 절대 그 이상을 만들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전 무림인이 모일 예정인 비무대회도 열리고, 나이도 약관이기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불러서 대면한 혁련무강.
그는 늘 무표정으로 지내는 혁련운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요즘, 별일은 없느냐?”
“없습니다.”
나름 다정하게 물어본 혁련무강의 질문에 냉랭하게 답하는 혁련운.
“연화와 와룡과는, 잘 지내고 있겠지? 뭔가 다른 점이라도?”
“없습니다.”
그는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 이게 그의 대화 방식인 건지 다른 미사여구나 수식 없이 짤막한 대답만을 했다.
“크흠, 혹시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어지간해서는 구해 줄 수 있다. 나이도 약관이니, 비고를 열어 줄 수도-”
“없습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솔직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옷도 침상도 개조할 정도로 손재주가 있고 똑똑한데 뭔가를 원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에 뛰어들지도 않았지만 비고의 선물을 준다면 원로들에게서도 불만이 나올 수 있었고.
그렇기에 그저 형식상으로 물어보는 것이었으나 정말로 원하는 게 있었더라면 줄 생각이었다.
그 마음과는 달리 혁련운의 대답은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혁련무강도 그런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은 알겠다. 정 그렇다면-”
이제 이 자리를 끝내고 비무대회에 출전할 준비의 마무리를 하려고 한 혁련무강.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지존이시여, 지존을 뵙고 싶다는 방문객이 있나이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존재에 잠깐 멈칫하는 혁련무강.
“방문객이라고?”
“예!”
그는 기감을 일으켜 주위의 모든 것들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리우면서도 껄끄러운 인물의 기척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인물과 붙어 있는 영물의 존재가 인물의 정체를 더욱 특정해 주었지만.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질문하기 시작하는 혁련무강.
“하하. 혹시 이곳의 복식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특이한 복식을 하고 있었나이다!”
“그래, 뭔가 이상한 걸 타고 왔을 거고.”
“예!”
혁련무강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거의 확실했다.
“옆에 뇌령조가 있었을 테지?”
“뇌령조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사오나, 큰 새 한 마리가 하늘에 있는 것은 봤습니다!”
맞다. 그 녀석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얼굴의 웃음기를 싹 거두고 근엄하게 묻는 혁련무강.
“마지막으로 묻겠다. 방문객의 손에나 짐에 무언가가 있었더냐?”
“예! 반대편이 비칠 정도로 얇은 천 같은 것으로 싼 무언가를 들고 있었나이다!”
비닐봉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극히 얇은 천이라고 생각한 듯한 보고.
“좋다! 들어오는 것을 허하라! 그리고, 연화를 불러오너라.”
“예! 지존이시여!”
혁련무강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혁련운.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혁련무강이 겉으로만 웃을 때는 많이 봤다.
연회나 행사가 있을 때 연설을 하며 웃거나, 종종 정실부인들의 앞에서 짓는 웃음 말이다.
물론 감정이 어느 정도 섞여는 있었겠지만, 작은 감정에서 부풀려 이끌어 낸 웃음의 기운이 강했다.
가끔, 아주 가끔 진심으로 웃을 때도 있었다.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라든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누이인 연화를 만날 때.
혁련운은 그렇게 몇 안 되는 혁련무강의 행복한 웃음을 불러일으킨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다.
‘누이도 함께 불러오라고 한 것을 보니 확실히 누이는 아닐 것이다. 대체 누구인 거지?’
그런 궁금증을 마음 가득히 안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며 방문객이 들어왔다.
“어, 천마 영감님! 얼굴색 좋아 보이네요.”
세상 천하에 그 누구도 혁련무강에게 할 수 없을 인사말과 태도.
그리고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의 아버지, 혁련무강의 모습을 보자 혁련운의 무표정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휘익!”
저 큰 새는 아까의 대화 내용과 과거 지식에 의하면 분명히 뇌령조일 것이다.
“얘도 반갑대요. 여기가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나?”
“누가 보면 영물과 무슨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줄 알겠군. 반가워 보이긴 하지만.”
“네, 뭐. 그럴 일이 좀 있어서요. 식물은 힘든데 동물까진 의사소통이 되더라고요.”
‘뭐라고? 영물과 대화를 해?’
어릴 적부터, 혁련운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
혁련무강의 자식이나 사생아라는 신분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머니의 유언으로 전해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아버지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나마 마음을 놓는 것이 누이인 연화와 아버지뿐이었고, 종종 울적함이나 복잡한 심경을 해소하러 전서구와 전서응이 있는 새장에 찾아가곤 했었다.
물론 마음을 놓는다 해도 방금 전과 같은 대화를 하는 게 전부였으나, 혁련무강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저 넘어갔고 연화는 묵묵히 옆에 있어 주었다.
그렇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오직 새뿐이었던 그에게 새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남자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