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20)
호엔하임.
분명히 일라이저가 예전에 언급했었고, 영의는 몰랐지만 이번 발표회에 참여할 예정이기도 했던 연금술사다.
하지만 치과 의사가 진료를 할 때 간호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더라도 시술을 받고 집에 가는 고객이 그 간호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듯, 영의는 고개를 저었다.
“네? 어어, 아뇨.”
그 간호사가 정말 뇌리에 남을 만큼 강한 인상이 없었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라이저도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일전에 내가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말일세. 허허, 지나가듯 한 말이라 기억 못 해도 이상하진 않겠군. 가끔은 내가 일반인의 기억력을 너무 높게 평가한단 말이지.”
묘하게 잘난 척하는 걸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 영의.
‘아니, 난 머리가 천재는 아니라도 몸은 천재잖아. 독고휘 영감님도 그랬었고.’
하지만 머리는 몰라도 몸 하나는 타고났으니 거기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아무튼, 그 친구에게 마력 염료를 얻어야 하는데 편지에 답장을 안 해주었네. 적어도 물건을 보내 줄 때 답장을 해주는데 말이지. 발표회 때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려 했지만 불참이었고.”
일라이저가 호엔하임을 언급하자 베키도 불만이 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나도 호엔하임 아저씨한테 부탁할 거 좀 있는데. 특수 용액으로 가공한 금속이 좀 필요하단 말이야.”
베키의 불평에 일라이저는 어째서 호엔하임을 필요로 하는 건지 의문인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일반 연금술사도 해주는 것 아닌가? 의외로 간단한 작업인데.”
“아니, 실험에 가까운 거라 호엔하임 아저씨가 해주는 게 아니면 힘들어. 이미 나도 구해서 해봤지. 근데 강도가 균일하지 않아서 힘을 못 버티더라고. 내가 아는 연금술사 중에서 그걸 제대로 해줄 사람은 호엔하임 아저씨밖에 없어.”
“으음, 확실히 뭘 해도 해내는 연금술사는 그 친구밖에 없긴 했었지.”
베키는 일라이저도 동의해 주자 약간 신이 나서 불평을 더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협조를 해줘야 신작의 시제품을 만들어 본단 말이야. 소형화를 하려면 특수 가공된 금속이 꼭 필요한데. 아저씨는 대답이 없고.”
“크흠. 그런고로. 혹시 여유가 된다면 언제 한번 호엔하임을 찾아가 볼 수 있겠나? 내 소개장을 들고 가면 문전 박대는 안 당할 걸세.”
“으음, 조금 이상한 면이 있긴 해도 스승의 편지면 일단 얘기는 들어 줄 거야. 만나면 꼭 거기서 내 얘기도 해주고.”
그 뒤로 자신의 새 발명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베키를 일라이저가 제지하여 다행스럽게도 작별의 시간이 길어지진 않았다.
“자, 그럼 전 일단 가볼게요. 영감님은 나중에 마탑에 찾아갈게요. 편지도 받고 이것저것 정리할 것도 정리하고.”
바이크에 올라타며 작별 인사를 하는 영의에게 웃어 주는 일라이저와 베키.
“언제든지 환영하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1층으로 와도 문전 박대는 안 당할 걸세.”
“으음,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그냥 평소처럼 찾아가죠.”
“뭐, 솔직한 자네의 성격을 보면 그리 대답할 것 같았네. 그동안 주머니를 한번 잘 사용해 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의논해 보지.”
탁. 탁.
마법진은 일라이저가 따로 손을 써둔 건지 모습이 희미해져 지금은 어딘가에 살짝 긁히거나 찍힌 자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일단 써보고 얘기할게요.”
그리고 일라이저의 옆에서 영의를 보다가도 계속 바이크로 시선이 돌아가는 베키를 발견한 영의.
“베키. 나중에 바이크 개조하러 찾아갈게. 전에 쓰던 거에서 새로 바꾸니까 조금 별로라서 말이야.”
바이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바이크에서 눈을 돌려 영의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베키.
“이 베키 님만 믿어! 완전 예쁘고 흉악하게 만들어 줄게!”
영의는 이제는 아예 대놓고 마개조를 하겠다는 베키의 말이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그, 흉악 부분은 필요 없지 않을까?”
“성능이 흉악해야 멋진 거야!”
베키의 의견을 반대하고 싶었지만, 속도감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영의였으니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
“어, 어어. 음. 그런 거로 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려는 듯, 영의가 얼버무리며 대화를 끝냈다.
“힝, 잘 가. 바이크야. 다음에 볼 때는 언니가 더 예뻐해 줄게? 우후후후.”
영의가 떠날 거란 낌새를 느꼈는지, 바이크를 껴안으며 쓰다듬는 베키.
일라이저는 그런 베키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어쩌다 저 재능을 가지고 길을 새어 나가서는…….”
‘아니, 그냥 말 꺼내지 말 걸 그랬나?’
예전과 같은 광기와 열정 그 사이 어딘가의 모습을 보여 주는 베키를 보며 잠깐 말을 꺼낸 걸 후회하는 영의였다.
사실 베키에게 개조를 맡길까 할 때도 저런 모습 때문에 약간 고민을 했었고.
하지만 베키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저런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일종의 자기암시? 아니면 세뇌겠지. 뭔가에 열중해서 다른 걸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런 종류의.’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베키를 바라봤지만, 바이크에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져서인지 상태가 더 심각해진 베키.
“흐헤헤, 더 매끈매끈한데? 너, 상당히 어리구나? 흐히히히…….”
이제 조금만 더 놔두면 핥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저게 본성인 게 아닐까? 뭔가에 몰입하려 했으면 마공학이 아니라 그냥 마법을 팠겠지.’
매번 좋게 봐주려 해도 어떻게 좋게 봐줄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 베키.
“그, 그럼 가볼게요!”
“그래, 가보도록 하게. 자네도 자네의 일이 있을 터인데.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군.”
“하하, 뭐. 그렇죠?”
사실 그 일이란 게 지금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일단 적당히 맞장구쳐 주기로 했다.
영의가 하늘로 날아가고 난 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라이저와 베키.
“자, 그럼 우리도 가야지. 요즘 마공학이 상단들에게 인기가 좋다던데, 안 가봐도 되겠나?”
“뭐야, 스승. 우리 마공학에 관심 있구나?”
일라이저의 말에 베키가 팔꿈치로 일라이저를 쿡쿡 찌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특유의 작은 키 탓에 일반적으로 옆구리에 닿았어야 할 베키의 팔꿈치는 일라이저의 골반 위쯤에나 닿았지만.
“크흠, 같은 협회 소속이니 싫어도 들리게 되어 있지.”
“빼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일라이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걸음을 재촉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됐다. 각자 볼일이나 보러 가자.”
“하하, 부끄럼 타기는?”
그렇게 사이가 틀어졌던 사제지간은 한 명의 남자로 인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그 사이를 이어 주었던 남자인 영의는 도심의 바깥 지역에서 넓은 평야와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금술사라…….”
흔히 연금술사라 하면 가장 대중적이고 알려진 것이 연금술을 쓰는 형제와 등가교환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영의도 최근에 다시 시작한 문화(?)생활과 예전의 경험이 있어서 그 정도는 안다.
“쓰읍, 연금술사?”
연금술사라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연신 중얼거리는 영의.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보려는지, 휴대폰을 열어 검색창에 연금술사라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고민해 봐야 뭔 소용이겠어.”
그렇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영의는 휴대폰이 저항 없이 쑥 들어가는 느낌이 들자 깜짝 놀랐다.
“뭐야? 아. 맞다.”
일라이저가 공간 확장 마법진을 그려 준 주머니에 휴대폰을 무심코 찔러 넣었던 영의.
“오오.”
휴대폰을 넣었음에도 아무런 무게감도 없었고, 넣을 때엔 마치 입구를 벌려 둔 비닐 봉투에 넣는 느낌이 들었다.
“보자…….”
이내 지갑과 보온 박스까지 들어서 주머니에 넣는 영의.
놀랍게도 그 모든 것들이 주머니의 입구에 닿자 거기에 맞게 입구가 커지는 것처럼 쑤욱 들어갔다.
“어, 꺼낼 땐 어떻게 꺼내는 거지?”
문득, 안쪽이 거대한 주머니의 형태라면 물건이 섞여서 꺼내기 힘든 게 아닐까 싶은 걱정을 했던 영의.
‘설마, 이거 원하는 거 나올 때까지 꺼내야 하나? 아니면 손에 닿는 느낌으로 추측해야 하나?’
혹시나 싶어 손을 넣어 가장 먼저 넣었던 휴대폰을 꺼내 보려 했고, 휴대폰을 생각하자 손끝에 곧바로 휴대폰이 닿았다.
“응?”
‘그럼…… 지갑.’
지갑을 떠올리자 다른 손가락에 지갑이 닿았다.
‘보온 박스?’
보온 박스는 손가락이 닿는다고 꺼낼 크기가 아니어서인지,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쪽에 익숙한 박스의 촉감이 느껴졌다.
“좋아, 좋아. 역시 마법이다 이거지.”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꺼낼 물건을 생각하면 손에 닿게끔 해주는 것 같았다.
마치 좁은 틈 사이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의 느낌을 받은 영의.
“급한 상황일 때는 조금 불친절한 느낌이 있어도 금방 잡아채서 꺼내면 되겠지.”
그 정도야 신체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으니 이 정도 단점이야 별 상관이 없었다.
“흐음. 어떤 가방으로 해야 할까?”
가볍게 메고 다니는 가방도 나쁘진 않고, 지금처럼 재킷에 달아 놔도 괜찮다.
아니면 군인들이 하는 것처럼 허벅지나 팔에 두르는 식으로 해도 괜찮고.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공간 확장 주머니를 실험하느라 잠깐 까먹고 있었지만, 연금술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영의.
알려 주지 않는 것도 있고 때로는 수상하기도 했지만, 다른 세계에 대해서 물어봐야 할 때 유일한 선택지인 알림이를 불렀다.
“알림아?”
[말씀하시면 됩니다, 사용자.]
“연금술사는 정확히 어떤 직업이야? 아니,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뭘 할 수 있는지 얘기해 줘.”
독고휘가 있는 무림 세계는 처음이기도 했고, 몸으로 먼저 깨쳐서 상관없었다.
일라이저는 소개부터 대마도사였고, 돈과 마정석 등 다양한 보상을 받았었다.
베키는 뭐, 당시 상황도 급했고 여유도 있었을 때였으니 크게 신경을 안 썼고.
숲에서 겪었던 일은 배달 주문보다는 일종의 도주에 가까웠었지만 적어도 알림이의 말은 있었다.
다만 이번엔 얘기가 다르다.
주문도 들어오지 않았고, 주문인의 소개로 가는 것인 데다 보상이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았기에 정보가 필요했다.
영의는 스스로도 제법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권왕이나 지금까지 만났던 노인들처럼 진짜로 강한 이들 앞에서는 약함을 느꼈었기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강자의 오만함 덕분에 음식을 주고 호감을 사서 어떻게 넘기긴 했지만 그때 만났던 무림 영감님들 중 한 명도 못 이겨.’
혁련무강과 마주했을 때 조금이라도 느렸거나, 그가 영의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뭐, 사이가 그리 나쁜 것 같진 않았으니 죽이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몸이 성하진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사용자가 요청하는 연금술사에 대한 정보가 종류별로 상이하므로 개체명 호엔하임과 같은 종류에 대한 것만 설명하겠습니다.]
알림이는 마치 세계에 따라 연금술이 다르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지만 영의도 그건 대충 넘겼다.
무림에서는 자연에 있는 기를 받아들여 몸을 강화하는 데에 사용하고, 일라이저가 있는 세계에서는 그것을 마법에 사용하니까.
뭐, 무림에서도 마정석이 흔하게 보이는 경우가 없었던 걸로 보아 같은 것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알림이의 설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영의였지만, 어째서인지 알림이가 평소처럼 곧바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뭐지, 오류인가?’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설명을 시작하는 알림이.
그러나 설명의 내용이, 조금 특이했다.
[사용자, 설명을 하기에 앞서서 개체명 호엔하임에게는 접근하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찾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서 정보를 요청한 건데, 알려 주겠지만 찾아가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