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19)
갑작스럽게 벌어진 해프닝, 그리고 멍하니 그것을 구경하던 마도학회의 인원들은 수프를 먹은 맥크리거가 잠드는 것을 보았다.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겠는데요?’
‘그래, 저 인간도 일이 커지지 않게 잠들도록 손써서 망정이지. 독 같은 걸 넣어 뒀더라면 아마…….’
‘정말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먹을 뻔했었지. 우리만 먹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먹는 건데 말이야. 응? 잠깐.’
발표를 하러 나오기 전 수프를 먹을 뻔했던 때를 떠올리며 서로 염화로 대화를 나누던 마도학회는 문득, 남겨 두고 온 것이 수프와 피자뿐만이 아니란 것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아직 거기에 있지 않나?’
‘그리고, 수프를 이미 먹었을지도……?’
물론 잠드는 것뿐이니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지만, 잠드는 과정에서 넘어지거나 과다 복용으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제자들의 분위기를 감지한 일라이저도 제자들에게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들을 테니, 너희는 먼저 돌아가서 그 수프들을 하나만 확보하고 나머진 처분하도록 해라.”
일라이저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모두들 다급히 여관으로 돌아가는 마도학회의 인원들.
그리고 그런 마도학회의 분위기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베키도 그들을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콰앙!
부서지고 다시 복구한 지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여관의 문이 다시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열렸다.
“상태는 어떤가?”
영의에 대한 걱정과 피자에 대한 걱정이 반반 섞인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이닥친 마도학회의 인원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네?”
후룹.
수프를 접시째 들고 맛있게 마시고 있는 영의의 모습이었다.
“그, 그거 내려놓게!”
“아니, 먹어도 해가 되진 않지만 일단 내려놓고 편안한 자세로 앉게!”
“아니지! 침실로 옮겨!”
마도학회의 인원들은 영의가 이제 막 수프를 먹는 것이라고 착각해 부산을 떨며 들어왔지만 이내 탁자 위에 쌓인 수프 그릇을 보았다.
“응?”
척 보기에도 적지 않은 양을 먹은 듯, 네댓 개의 그릇이 깔끔하게 비워진 채 쌓여 있었다.
“아, 죄송해요. 하나만 먹어 보려고 했는데 수프가 생각보다 진국이라. 그래도 피자 드실 거죠? 네?”
영의는 문득 본래 그들이 먹어야 했던 몫까지 뺏어 먹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듯 사과하며 수프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 아니. 먹고 나서 갑자기 졸리거나 잠들지는 않았나?”
“일단 확보부터 해야 합니다!”
어째서인지 멀쩡한 영의에게 다가와 이것저것을 묻거나 수프 그릇을 조심스럽게 들어 확보하는 등, 각자 행동하기 시작하는 마도학회 인원들.
그리고 베키도 무대에서 대략적인 말은 들었기에 영의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외쳤다.
“영의! 너 뭐 위험한 거 아니지?”
이때쯤 되자, 영의도 의문이 가득해졌다.
‘들어와서 졸리거나 잠든 건 아니냐고 묻고, 수프 그릇을 저렇게 조심스럽게 가져가고 날 보는 사람들은 죄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뭐야?’
“아니,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말을 좀 해줘. 다짜고짜 들어와서 이게 무슨 일인데?”
“그건 내가 설명해 주지. 아직 밝혀야 할 것은 남아 있겠지만 대강 이야기를 듣고 왔네.”
설명을 요구하는 영의의 목소리에 대답해 준 것은 뒤늦게 들어온 일라이저였다.
일라이저는 영의와 베키, 마도학회 인원들에게 협회로부터 전해 들은 대략적인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맥크리거가 마도학회의 인원들을 잠들게 해 발표를 망치게 하려 했다는 기본적인 설명까지는 대부분 들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음모나 암투라 하면 암살과 독살, 여차하면 쿠데타까지 동원하는 이야기나 역사들만 접했던 영의로서는 조금 심심한 이야기였다.
“뭐야, 겨우 수면제?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요?”
“그건 맥크리거의 성향 때문에 그런 걸세. 독을 썼다가 만에 하나라도 일이 틀어졌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거든. 수면제 정도라면 잘해 봐야 학회장직 박탈이겠지.”
비록 정치 능력이나 암투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전장 출신이니만큼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해 주는 일라이저.
“뭐, 나름 치밀하긴 했네. 식재도 시중에 신선도가 떨어지는 버섯을 푼 뒤, 신선도가 제법 좋은 북방의 버섯을 풀어 그것을 쓰게끔 유도했으니.”
레시피에 사용되는 버섯만을 바꿔 수프를 수면제로 바꾸는 계획은 나름 잘 짜여 있었다고 칭찬하는 일라이저.
실제로도 계획은 잘 풀려서 마도학회가 수프를 먹기 직전까지 갔다.
“다만, 거기서 자네가 식사를 가져올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겠지만 말일세.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자네에게 빚을 진 셈이겠지.”
일라이저는 영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일라이저를 따라 고개를 숙이는 마도학회의 회원들.
그들은 이제 영의를 묘한 외부인을 보는 시선이 아닌, 친구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뭐.”
영의는 머쓱한 듯 손을 내저으며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럼…….”
그렇게 서로 간에 인사가 오가자, 일라이저는 눈을 빛내며 영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자네, 어째서 그렇게 멀쩡한 건지 조사해 봐도 되겠나? 그리고 하는 김에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건지도 이야기해 주면 좋겠군.”
“예?”
갑작스럽게 시작된 일라이저의 질문에, 자신도 빠질 수 없다는 듯 질문하며 끼어드는 베키.
“응! 나도 그건 궁금했어! 어디 출신이야? 외모로는 파악하기 힘들긴 한데, 내 감에 따르면 넌 동방 출신일 거야!”
“응?”
그렇게 질문이 시작되자, 마도학회의 인원들도 모두 질문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음식은 어디에서-”
“대체 스승님과는 어떤 관계를-”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예전에 문 앞에서 헛소리하던-”
로버도 영의를 만났을 때가 기억난 건지 소리치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 하하?”
자신을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 앞에서, 영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피자와 일라이저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던 대략적인 설명의 시간이 지나가고, 영의는 여관 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흐음, 자네의 몸에 대해서는 나중에 연구를 하고 싶지만…… 허락은 안 해주겠지?”
“네.”
자연과의 소통은 뇌영과의 대화와 대략적인 신체 스펙의 상승 이외에도 부가적인 장점이 있었다.
그중에서 쓸 만했던 것이 이번에 먹었던 수프의 효과인 수면에 대한 면역이었다.
정확히는, 식물이나 동물에게서 나온 성분에 의한 효과에 내성이 생기는 것이었지만 이번 수프는 효과가 강하지 않았기에 통하지 않았다.
알림이의 말에 따르면, 내성으로 외부의 것을 구분 지어 내기만 한다면 외부 유입 물질은 뇌기로 태워 없애는 게 될 거라고도 했지만 딱히 쓸 곳은 없어 보였다.
“걱정 마, 스승.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일라이저의 제안을 영의가 거절하자, 자신 있게 말하는 베키.
“절대 안 돼.”
하지만 영의가 자신의 몸을 저 열정 가득한 두 사제지간에게 허락해 줄 리 없었다.
“진짜로 안 돼?”
“안 돼.”
“쳇.”
영의에게 과거를 털어놓은 뒤 마음이 후련해진 건지, 알림이의 기억 조작으로 인해 일라이저와의 기억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바뀐 건지 베키는 일라이저와 친해 보였다.
“이젠 사이가 별로 나쁘지 않은가 봐?”
“뭐, 예전에도 지금도 크게 좋았던 적은 없었어. 대신 네가 있으니까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어야겠다 싶었던 거지.”
알림이는 영의가 말한 대로 일라이저와의 관계를 건드리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영의의 존재가 둘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낫게 만들어 준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 뭐. 몇 없는 지인인데 싸우지 말고.”
영의의 놀리는 듯한 말에 베키는 발끈하려 했지만, 지인이 몇 없다는 말은 뭐라 반박하기 힘들었다.
“이익…….”
그리고 영의와 사이좋게 지내는 베키의 모습을 보자 웃음을 짓는 일라이저.
“하하. 이것저것 들어오는 제안이나 계약에 대한 문제로 지금 자네에게 음식값과 신세진 것을 갚기 힘들 것 같군.”
“으음, 나도 이번에 상단들이 계약을 좀 하자고 해서. 조금 있다가 가봐야 할 것 같아.”
신 마도학회가 저질러 버린 이번 사건으로, 마도학회와 마공학회는 조금 더 바빠졌다.
기존에 있던 그들의 몫까지 나눠 쥐게 된 것.
물론 신 마도학회에 몸담고 있는 이들도 만만치 않은 만큼 망하지는 않겠으나, 상당히 위세가 줄어들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자, 일단 자네의 옷에 마법진을 하나 그려 두겠네. 예전의 문신처럼 재료가 까다롭진 않지만 유지 시간이 끝나면 효력이 다할 걸세.”
“네?”
“아, 이걸로 보상을 대체하겠다는 말은 아니니 안심하게. 다만 자네가 지난번에 피자를 들고 올 때, 일일이 쌓아서 들고 오는 게 조금 불편해 보여서 말일세.”
지난번 15판의 피자를 들고 올 때 영의가 자신의 앞을 가릴 정도로 쌓아서 들고 온 것을 눈여겨본 일라이저.
그는 보상의 체험판 같은 개념으로 영의의 재킷 주머니에 마법진을 새겨 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거랑, 제 옷의 주머니랑은 무슨 상관인 거죠?”
“자네가 쓰기에 적합할 만한 건, 공간 확장 배낭 같은 것 아닌가? 힘이야 충분할 테고. 부피가 문제일 뿐이잖나.”
사실, 힘이야 크게 쓸 곳이 없다. 물론 강하긴 하지만 영의는 권왕처럼 육체로 싸우기보다는 뇌기의 특성과 기술로 승부하는 타입이니까.
“어, 으음. 그렇죠.”
“내가 하나 만들어 주지. 그리고 자네의 복식은 우리와 맞지 않으니 내가 물건을 직접 건네주면 어울리지도 않을 테고. 나중에 스크롤에 마법진으로 그려 줄 테니, 자네가 가져가서 마력만 주입하게.”
일라이저는 영의의 정체를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지만 일단 적어도 다른 세계의 인물일 거란 의심까지는 하고 있었다.
당장 견문이 넓은 일라이저 본인도 영의의 하나하나가 들어 본 적 없는 것들 아닌가.
그리고 영의는 일라이저의 말에 게임이나 창작물 속의 인벤토리, 또는 마법의 배낭을 떠올렸다.
“네? 그러니까, 막 이것저것 무한대로 들어가고 들어간 물건의 무게도 없어지는 그런 가방이요?”
영의의 질문에 일라이저는 공간 확장 배낭에 갖고 있는 환상이 조금 과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뭐, 무게야 적당히 반쯤 경감되지만 제한이 없진 않네. 공간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어지간한 건물 두 채까진 들어갈 게야. 그리고 자네는 마법에 재능이 없지, 마력에는 재능이 있잖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로 얻어맞는 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적당히 주위에서 마력만 흘리면 알아서 마법진이 흡수할 걸세. 그마저 부담될 것 같으면 전마석을 올려 두면 좋고.”
일라이저의 말에 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 전마석으로 불리는 마정석은 거의 순수한 대기의 마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어설픈 자신의 뇌기 주입보다는 그럴듯하리라.
‘우와, 실제로 시중에 있는 건 진짜 비싼데 그걸 공짜로 주겠다는 거 아냐?’
물론 아이디어는 게임이나 소설 등에 얼마든지 있으니 인벤토리 같은 것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가 현대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극히 드문 인챈터라 불리는 일부 보조 계열과 그보다 더 드문 공간 조작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협력해서 만들어야 했기에 문제였을 뿐.
그리고, 일라이저가 말한 것처럼 무게를 경감해 주는 효과도 없었고, 크기도 컨테이너 하나 정도였다.
물론 컨테이너 하나만큼의 공간이라면 스티로폼을 넣어도 무겁겠지만.
아무튼 그런 귀하고 좋은 물건을, 더 좋은 버전으로 자신에게 주겠다는 것 아닌가?
“그럼, 일단 임시로 자네의 옷 주머니에 마법진을 새겨도 되겠나? 물론 외부에서 보이진 않을 걸세.”
‘피자 30판 가격치고는 비싼데?’
그렇게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던 영의는 일라이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일라이저가 품속에서 작은 완드를 꺼내더니 영의의 재킷 위로 겨누었다.
예전에 문신을 새겨 줄 때처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그려지는 마법진.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옷에 새겨서인지 아니면 지난번의 염료가 아니어서인지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흠, 끝났네. 아마 두 달이면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다음번에 마탑으로 찾아오게. 그때 음식값과 함께 스크롤을 만들어 주겠네.”
“네? 이게 음식값이 아니라요?”
“마법진은 우리가 신세 진 것에 대한 보답일세. 뭐, 못난 제자 부탁할 겸.”
일라이저의 말에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의 스승을 노려보는 베키.
“내가 못났어?”
“그래, 못났지. 20년만 배웠으면 나보다 젊은 나이에 대마도사란 직함을 달았을 녀석이건만.”
“아, 취향이 아니야. 스승.”
베키가 취향이 아니란 말을 하며 고개를 다시 홱 돌리자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일라이저.
“뭐…… 저런 녀석이지만 심성이 나쁘진 않으니 잘 보살펴 주게. 으음. 그러고 보니, 혹시 자네 호엔하임이란 이름을 들어 봤나?”
예전에 영의에게 문신을 새겨 줄 때 염료의 제작자로 잠깐 언급했지만, 영의로서는 기억할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