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15)
무언가에 대해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말을 하다 끊는 것이 더욱 궁금증을 유발한다.
사람을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이 말을 하다 마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영의는 알림이가 정보를 주다 말자 의구심이 더욱 강해졌다.
“알림아, 뭐든 간에 말해 봐!”
영의의 간절한 외침은 침묵이라는 감정에 비해 보잘것없는 결과로 돌아왔다.
“아무거나 말해 보라고! 벙어리도 아니고!”
그의 외침은 아무런 소득 없이 허무하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하아. 하다못해 주인의 정체에 대해서라도 알려 줘.”
그리고 그때, 알림이가 드디어 대답을 했다.
[죄송하지만,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뭐?”
영의는 순간 감정이 끓어올라서 화를 낼 뻔했지만, 알림이가 다시 침묵할까 싶어 입을 꽉 다물었다.
“그, 그럼 수첩이 왜 존재하는지 얘기해 줘.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 수첩도 진작에 처리할 수 있었던 거 아냐?”
가장 궁금했던 남자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 안 되자, 다른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한 질문을 하는 영의.
[죄송하지만 그것도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용자.]
알림이는 공손한 어조였지만 여전히 안 된다는 말만 돌려줬다.
“하다못해 언제 적 사람인지 정도만 얘기해 주면 안 될까?”
영의는 알아봐야 별 소득도 없지만 최소한의 단서라도 잡기 위해 시대를 물어보았다.
‘베키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인물이다. 물론 내가 과거의 세계와 오가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 남자가 건네줬다는 수첩을 생각해 보면 미래의 세계로 간 인간일 가능성도 있다.’
자신이 과거로 간 걸까, 아니면 그 남자가 미래를 엿보고 오는 걸까 싶었으나 일단 동시대에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물어본 영의.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알림이가 조금 특이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질문은 저로서는 아직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안 된다고만 했던 아까의 대답과는 달리, 아직이라는 시간부 조건을 언급한 알림이의 대답에 영의는 마음속 희망이 차올랐다.
“그래, 언젠가는 알려 준다는 거지?”
‘내가 알림이와 더 관계를 유지하거나, 업데이트 같은 게 더 있다면 정보도 더 풀어 줄지도……?’
알림이에게 조금 더 협조하자는 생각과 함께, 늘어날지도 모르는 신규 고객들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살짝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불안을 떨쳐 버렸다.
‘정신이 이상하고 행동이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었잖아. 보람도 좀 있고.’
영의는 지금껏 음식을 배달했을 때 정말 기쁜 표정으로 음식을 먹던 독고휘 같은 노인들에서부터,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먹던 베키까지 생각하다 문득 베키의 기억 문제가 떠올랐다.
“잠깐, 그럼 베키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기억을 삭제하고 다른 거로 주입하나?”
한때 영화에서 봤던 섬광과 함께 일정 구간의 기억을 지워 주는 장치를 떠올리는 영의.
그리고 알림이는 그 질문은 무언가 위반되거나 조건에 걸리는 질문이 아니라는 듯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통상적 절차에 따르면 기억의 대체 또는 변질입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의 변경은 까다롭습니다만, 잠깐 스쳐 지나간 인물이기에 변질로 처리하게 될 겁니다.]
알림이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는 영의.
‘대체라는 건, 영화에서 봤던 거처럼 지운 다음 다른 기억을 주입하는 거겠고. 변질은…… 뭐지?’
그리고 영의의 생각을 읽은 듯, 그것에 대해서도 대답해 주는 알림이.
[기억의 대체는 사용자의 추측과 일치합니다. 기억의 변질은 과거의 관점에 영향을 주어 스스로 다른 것이라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알림이의 설명에 따르면, 세월이 지나며 기억이 풍화되듯이 그 당시 기억을 조금씩 애매하게 만든 뒤 다른 설정을 주입하는 것이라 했다.
약간 최면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와 같은 방식으로 보이자 고개를 끄덕이는 영의.
“그래. 혹시, 가능하면 그때 당시에…… 가족과도 같은 친구를 잃었던 기억도 조금 고쳐 줄 수 있을까? 적어도 친구의 최후가 비참하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베키의 과거를 알게 된 영의는 이 기회에 그녀를 위해 발레리의 죽음을 조금 바꿔 주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비참의 기준을 알 수 없기에 사용자의 요청 사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래……?”
영의는 살짝 기대하긴 했으나 알림이가 아무리 똑똑하고 신비한 점이 많다 해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기에 실망이 크진 않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사용자의 주변에서 관찰한 것들을 참고하여 적합한 방식을 고르겠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을 들려주는 알림이.
“알림아……!”
[사용자, 혹시 조언을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같은 인간이 가장 잘 알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 사람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알기 힘든 건데……. 일단 최대한 노력은 해볼게.”
그렇게 높은 하늘에서, 영의와 알림이의 각본 제작이 시작되었다.
베키를 구해 준 건 의문의 마도사로, 베키가 봤던 수첩의 내용은 마도사가 가르쳐 준 것으로 말이다.
다만 베키가 발레리와 아이들을 두고 간 게 마음에 걸렸으므로, 영의는 베키에게 조금 미안해졌지만 그녀가 마도사에게 반쯤 강제로 끌려간 걸로 하기로 했다.
물론, 어느 정도 설득력을 위해 마도사가 사악한 마법사 같은 분위기로 힘을 원하냐고 꼬드기는 것까지.
마도사는 싹수 있는 제자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여행하다 오랜 지병으로 그만 기력이 다해 쓰러져 발렌타인 갱에게 끌려간 것으로 했다.
아무나 제자로 받았다가는 출세의 욕망에 자신의 연구 성과를 라이벌 마도사나 마법 협회에 홀랑 제보해 버릴 수 있으니, 배신하기 어려우면서 재능 있는 제자를 찾아다닌 것이고.
그러나 베키를 가르치는 동안 갑작스럽게 병이 악화되었고, 죽을 때가 되자 그의 연구를 그냥 학회에 밝히고 해답을 얻어만 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끝맺음을 지었다.
그렇게 수첩 속의 몇몇 지식에 대한 설명을 해두었고, 베키의 악동 기질 탓에 학회가 아닌 일라이저 개인에게만 밝혔다고 이야기를 구성해 두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의외로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사용자, 발레리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부분은 아직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발레리의 죽음에 대한 건…… 그냥 두자. 그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과연. 베키의 반항심이 더 설득력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인가요?]
“아니, 이미 베키는 스스로 마음을 정리한 것 같은데 내가 거기에 손을 댈 자격은 없는 것 같아서. 남자야 외부인이었지만 발레리는 베키의 가족이었잖아. 가족도 아닌 한낱 친구인 내가 건드릴 건 아닌 것 같아.”
[알겠습니다. 사용자. 그럼 지정하신 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영의는 알림이가 몇몇 정보는 알려 주지 않더라도, 아니, 알려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니 안심했다.
“아, 알림아.”
[왜 그러시나요? 사용자.]
“그게, 기억을 과하게 조작하는 게 아니라니 안심이 되긴 하는데 왜 그렇게 설정까지 세세하게 짜서 넣는 거야? 그냥 조작해 버려도 난 알 방법이 없잖아.”
그냥 냉큼 조작해 버리면 될 것을 굳이 영의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며 협조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저는 사용자의 의지를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사용자에게 모든 걸 허용할 수 없는 점만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의는 알림이의 그런 대답을 듣고 적어도 자신을 위하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럼, 아까 말했던 비밀이란 정보도 말해 주지 그랬어?”
그러나 방금 전 이야기가 나오자 알림이는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휴, 융통성 없는 거 보니 결국 너는 너구나.”
영의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알림이를 보며 기계나 인공지능이라고 칭하지 않고, 너라고 칭했다.
어느 정도 알림이를 인격체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나 영의는 지구로 돌아가려는 생각에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지구로 돌아온 뒤 영의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근래에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다시 제대로 배달 일을 하기 위해 늘 모이던 그 장소로 돌아간 영의.
“행님! 오셨네예!”
“어, 형. 왔어? 휴가 썼단 얘기는 들었는데.”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를 맞이하는 병찬과 병민.
‘뭐지……? 얘들은 내 정체를 모르나?’
가족들이나 화연, 호찬 정도를 제외하면 영의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게 병병 브라더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은색 헬멧이 더 친숙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맞이해 주고 있는 것이 의아해진 상황.
‘아, 배려하는 건가?’
혹시나 알려지면 어쩔까 싶어 애써 모른 척하고 평소처럼 대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 영의.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모자라지만 착하던 두 동생이 오늘따라 더 착해 보였다.
“얘들아, 잘들 지냈지?”
영의는 웃으면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그에게 돌아온 건 답하는 인사가 아닌 호들갑과 흥분이었다.
“행님, 지난 금요일 날에 나타난 은색 하이바(헬멧) 봤어예? 막! 나타나서 번개 쏘고 막! 무슨 히어로처럼!”
“와! 진짜! 엄청 쩔었지! 신기한 게 뭐냐면 거기서 나온 사람이 쓴 헬멧이 영의 형 거랑 똑같은 거라니까? 물론 나름 보급형이긴 한데 색깔마저 똑같잖아요!”
이내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각자 영상과 사진을 띄워서 보여 주려 하는 병찬과 병민.
“응? 얘들아?”
영의가 동의나 부정 대신 당황하는 반응을 보이자 주춤하는 둘.
“뭐고, 행님 모르시는 거 아이가?”
“어…… 평소에도 인터넷 잘 안 하는 형이긴 한데, 적어도 유명한 영상 같은 건 찾아보는 편이니까 알지 않을까?”
영의는 문득, 이 모자라지만 착한 녀석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조금 더 모자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어, 나도 알긴 알아. 봤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흥분해서 물어보는 거야?”
“와 물어보기는! 임마랑 의견이 안 맞으니까 행님이 판단 좀 해달라 캐서 하는 거 아임니까!”
“아니, 형. 진짜. 들어 보세요. 얘는 여기 영상에서 나온 사람이 무슨 무림 고수처럼 속세가 싫어서 떠나 있던 각성자라고 주장한다니까요.”
병민의 말에 열을 내며 빠르게 반박하기 시작하는 병찬.
“마! 사람이 임마! 저렇게 쌈빡한 능력이 있으면 누구든 간에 출세하고! 막 그런 마음이 있을 거 아이가! 근데 저렇게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튀어나오고 아무 말 없이 잠적한다꼬? 누가 봐도 은거한 고수 아이가!”
평소에도 사투리가 좀 섞이긴 했지만 감정이 격해지자 어조가 강해지고 더더욱 사투리가 나오는 빈도가 늘어나는 병찬.
“병찬아, 진정해. 너 점점 사투리가 심해진다.”
“행님! 진짜 딱 은둔고수 맞다 카니까는! 행님도 저랑 무협지깨나 읽어 봤다 아입니까!”
지난번 휴대폰을 교체하고 난 이후, 영의는 무림과 마법에 대한 이해도를 조금이라도 높여 보기 위해 참고 자료 삼아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을 찾아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게 문화(?) 쪽으로 소양이 있는 병찬과 병민이었고.
“그게, 좀 읽어는 봤지. 그리고 은둔고수랑 패턴이 비슷하긴 한데-”
영의가 병찬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아 보이자 다급히 끼어드는 병민.
“형! 여기 나온 사람은 은둔고수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각성자가 분장하고 등장한 다음 누구 도움 받아서 없어졌거나, 다른 세계에서 온 마법사일 거라니까요? 번쩍 하고 난 뒤에 사라진 거 보세요! 각성자가 능력이 두 개인 경우는 없었잖아요!”
은둔고수 설을 주장한 병찬과는 달리, 병민은 각성자 분장 및 이계인 설을 주장했다.
“하하…… 재밌네.”
영의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재밌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 주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얘네들 뭐지? 모른다는 건 알고 있는데 한 부분에서만 쓸데없이 정확하게 맞히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영의의 정체가 은색 헬멧이란 건 하나도 눈치채지 못한 동생들의 추측이 거짓말처럼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진실을 꿰뚫었다.
“재밌는 의견이었어. 근데, 누군지는 모르는 거지?”
영의의 물음에 병찬과 병민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예.”
“당연히 모르죠. 후보가 좀 있긴 한데 대부분 본인이 부정하고 있고.”
그리고 돌아오는 해맑은 대답에 영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난 그래도 너희가 참 착한 녀석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예??”
병민과 병찬은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걸 듣던 형이 갑자기 훈훈하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자 의아해했다.
-뭐지? 왜 웃는 거지? 아, 우리가 말한 게 너무 허무맹랑하긴 했지?
-그라믄 니는 그게 말이 된다꼬 생각했나?
-지는?
병찬과 병민은 눈빛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동시에 영의의 따뜻한 시선에 머쓱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