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14)
미국. 수도 워싱턴 D.C.
조지타운과 웨스트엔드 사이에 한 작은 세탁소가 있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가득한 이곳은 주변에 있는 공원과 체육관 덕분에 매출이 제법 나오는 듯 사람이 매번 오가는 곳이었지만 심야에는 그런 이용객도 발길이 뜸했다.
그리고, 이 세탁소 안으로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 들어갔다.
남자는 세탁소에 오면서 세탁이 용건은 아닌 듯 빈손이었고 어느 한 세탁기를 주의 깊게 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창고로 쓰는 작은 방.
세제와 바구니를 비롯한 이런저런 도구들이 쌓여 있는 그곳은 잠겨 있지 않았고, 또 안에 또 다른 문이 하나 있었다.
똑똑.
안쪽의 다른 문에 노크를 하는 남자.
“문 좀 열어 보시죠. 거기 있는 것 압니다.”
마치, 누군가 건너편에 있다는 듯 행동했다.
“후우, 당신이 만들어 둔 비밀 통로는 이미 막아 두고 오는 길입니다. 순순히 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차단기의 전원까지 내리겠습니다. 뭐, 그것도 대비는 해뒀겠지만.”
남자가 반쯤 협박하듯 말하자, 문에서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름 빨라서 좋군요.”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에는,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잠금장치는 원격으로 가동한 듯 이런저런 기기가 붙어 있었고, 남자가 문을 닫자 곧바로 잠겼다.
계단을 따라 쭉 걸어 내려간 남자는 이내 빛이라고는 천장에 매달린 작은 전등의 빛만 존재하는 좁디좁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위층의 창고와는 크게 다를 것 없는, 세제와 청소용구 등이 널브러진 곳이었으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메마르고 갈라지는 남자의 목소리.
“난 당신을 알지. 그리고 왜 여기 왔는지도.”
“네, 저도 당신을 압니다. 닷지 씨. 하지만, 제가 온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실 겁니다.”
닷지라 불린 남자는 무언가를 하려는 듯 몸을 움직였으나 방문객인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삐익.
작은 소리와 함께 불이 밝혀지는 지하실.
순식간에 밝아진 탓에 눈을 찌푸리거나 놀랄 만도 했지만 두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얼굴과 진짜 이름을 모르는 범죄자, 닷지의 생김새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동네 음반 매장에 가면 있을 법한 장발의, 수염까지 기른 살집 있는 남자 같은 생김새의 닷지.
물론 수염과 머리카락이 상당히 덥수룩했으나, 미국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특이할 게 없는 정도다.
“그래서, 나한테는 왜 온 거지? 새로운 작전 인원을 구해 달라고? 미안하지만 이런 나도 의리란 게 있어. 죽을 위험이 있는 곳에 보내는 건 개의치 않아도 막 쓰고 버릴 고용주에게 보내는 건 안 한단 말이지.”
닷지의 신랄한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자.
“글쎄요, 그건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었기에 벌어진…… 네. 일종의 사고죠. 탈출 계획까지 짜두었지만 경찰이 인질을 무시하고 돌격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러시아도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남자의 뻔뻔한 말에 닷지는 역정을 내듯 소리쳤다.
“닥쳐! 너에 대해선 알 만큼 알지, 파렌하이트 양반. 아니지. 중국 각성특무대 샤오롱 요원이라고 불러 줄까?”
그리고 샤오롱이란 이름이 나오자 표정이 굳는 남자, 파렌하이트.
“과연 강도들과 사기꾼들의 정점에 앉은 남자라더니 정보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하군요?”
파렌하이트는 표정을 굳혔으나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다.
“칭찬은 고맙게 듣도록 하지. 아무튼 나한테 뭔가를 부탁하러 온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어. 다른 곳으로 가봐. 크로아티아나 러시아 쪽 녀석들이면 죽어도 상관없는 녀석들을 중개해 줄 거다.”
닷지는 파렌하이트를 내쫓으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뒤를 돌았지만, 파렌하이트는 순순히 나갈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군요, 닷지 씨. 저도 윗분의 명령을 받고 온 거라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의뢰는 정보 수집과 인물 탐색이고요.”
파렌하이트의 의뢰 내용에 닷지는 잠시 멈칫했다.
“정보 수집? 그쪽이? 나도 찾아오는 인물들이 그건 사소한걸 왜 의뢰하지?”
“흐음, 의뢰를 받으실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계속 이야기나 할 겁니까? 이야기를 할 거라면 이렇게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지하실 말고 택시를 타고 저기 워싱턴 기념탑으로 가서 경치나 구경하며 이야기하죠.”
“아니, 나는 대답을 들어야겠다. 왜 굳이 너희의 잘난 정보력을 두고 나 같은 사람을 찾아온 건지 말이야.”
닷지의 말에 파렌하이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해 줘도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씀드리죠. 저희는 아무래도 사람을 통한 정보나 중요한 정보는 잘 알지만 세밀한 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할 시간은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까, 샅샅이 찾아봐야 할 안건이다 이건가? 너희는 시간이 없으니 시간이 남아돌 것 같은 나를 찾아온 거고?”
“워, 워. 그게 아닙니다.”
“하, 입 발린 소리는 하지 말자고 서로. 네놈들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어지간한 녀석들은 다 알 거다.”
“사실 당신 이외에도 정보를 부탁할 이들은 많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그들 모두를 동원할 예정일 뿐이죠.”
“뭐?”
“태스크 포스를 운영할 겁니다. 협조해 주시죠.”
파렌하이트의 말에 닷지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세력에 대항할 힘도 없고, 지금껏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세탁소 기지도 들켰다.
실제로 세탁소를 운영하며 지하실의 비밀 벽 뒤에 있는 작전실은 본인이 만들고 개조했기에,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도 실제로 이곳으로 등록해 둔 거고.
그러나 그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몇 년 전, 한 노인이 찾아와서는 의뢰를 직접 맡겼다.
‘일은 직접 얼굴 보고 맡기는 게 더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이름처럼 위험한 일과 상황은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들에게 적대하려는 마음은 없어졌다.
“뒷조사는 건당 백만에서 천만. 기본으로 2주. 대상의 위험도에 따라서 가격이랑 기간도 달라져. 너무 단서가 없으면 추적도 힘들고. 적어도 이름이나 기본적인 정보는 있나? 중국 어딘가의 왕 씨나 이 씨인 남자를 찾으라는 방식이면 나도 힘들어.”
“괜찮습니다. 상당히 유명 인물이니까요.”
“뭐? 나보고 파파라치 짓이나 하라고? 정치계 거물이나 연예인들의 비밀을 캐본 적은 있어도, 그걸 의뢰받은 적은 없는데.”
닷지의 말에 파렌하이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일어난 습격 사건을 기억할 겁니다.”
“알지. 내 예전 동료가 잡혀갔는데. 네놈이 버린 탓에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같이 작전에 참여하겠다고 했었지만 거절당했지.”
“그건 안 됩니다. 저의 통제 아래에 없는 작전은 못 믿어서 말이죠.”
“그래서 이번 작전이 망했나? 너의 통제 아래에서 완벽히 굴러가서?”
닷지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파렌하이트는 화를 참듯 어금니를 악물었고 그 탓에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변수가 상정한 것보다 많고, 또 컸습니다. 아군의 돌발 행동과 포섭한 이의 돌발 행동은 계획을 세웠지만 갑작스러운 강자의 난입은 계획에 없었으니까요.”
“그래, 나도 그건 흥미롭더군. 세상에 숨어 사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동질감을 느끼니까.”
“바로 그 인물이 이번 조사 대상입니다.”
“뭐?”
파렌하이트의 말에 닷지는 당황했다.
인간 탱크랑 정면 승부를 내던 존재의 뒤를 캐라고? 개인이면 모르겠지만, 어떤 단체에 속해 있으면 어쩌려고?!
“비용, 기간, 조력. 전부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그 인물에 대해서만 철저히 조사해 주십시오.”
“아니, 나보고 그런 위험한 일을 하라고?”
닷지의 항의에 파렌하이트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지하실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상부에서 추가정보를 주진 않았지만, 아마도 상대는 개인일 겁니다. 만약 그런 인물이 속한 조직이 있었다면 저희가 유유히 탈출하게 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정말 그런 인물을 소속시키고 키워 냈을 조직이라면, 그때 권왕만 상대하러 오진 않았을 거다.
다른 현장에도 누군가가 나갔거나 적어도 수많은 괴수들을 막아 낼 이들을 보냈을 터.
파렌하이트의 말에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 이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닷지.
“그래, 그건 맞겠군. 조사하도록 하지.”
“네, 잘 부탁드립니다.”
파렌하이트는 그대로 길을 올라갔고, 닷지는 곧바로 조사를 하기 위해 지하실에 숨겨진 비밀 문을 열려고 했으나…….
“저기! 문 좀 열어 주시죠! 이거 어떻게 여는 겁니까?”
삐익.
“감사합니다!”
파렌하이트가 진짜로 나가고, 그것을 자신의 휴대폰에 연결된 CCTV로 확인한 다음 정말로 비밀 문을 여는 닷지.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수많은 모니터와 여러 대의 컴퓨터가 있는 어두운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총기가 들어 있는 캐비닛과 언제든 들고 나갈 수 있게 준비한 배낭이 있었고, 방의 구석에는 어디론가 통하는 문까지 있었다.
닷지라는 이름답게 피할 구석을 마련해 둔 모습이었다.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일단 당시 주변 CCTV부터 확인을 해야겠군.”
그때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의 정보 거래상부터 은둔 해커까지 동원된 은색 헬멧 찾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도달하게 된 난관이 이것이었다.
-대체 격돌 이후에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하는 이들도 그 주제에 대해 순간 이동을 했다 또는 섬광탄처럼 눈가림용으로 사용 후 전력으로 도주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앞선 전투에서 보인 능력으로 인해 순간 이동 설은 제외되었고, 전력으로 도주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주변에 영상이나 흔적이 남아야 했으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보는 안 나오고 결론은 미뤄지는 혼란스러움이 한동안 그들에게 남게 되었다.
* * *
한편, 이스데의 상공에서는 마정석 바이크가 매우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이크의 위에는 오직 영의만이 타고 있었다.
베키에게 수첩을 받고 내용을 살펴본 뒤, 알림이에게 자신 같은 사람이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난 영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심각한 표정을 한 영의를 지켜보던 베키는 영의가 아픈가 싶어 당황하며 예전에 본 치료사의 행동을 따라 하듯 영의의 이마나 손목 등 여기저기를 짚어 보았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이 수첩이 문제야?”
영의는 베키의 손을 떼어 내고는 고개를 저으며 바이크 위에 앉아 핸들을 붙잡았다.
“아니, 그냥. 머리가…… 좀 복잡할 뿐이야. 조금 달려야겠어.”
“그럼 나도 탈게! 혹시 모르잖아!”
영의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바이크를 타고 싶어서인지 영의의 뒤에 폴짝 올라타는 베키.
“그래, 마음대로 해 그러면. 꽉 잡고.”
그렇게 시작된 이스데 상공의 비행은 한 시간을 넘게 이어졌고, 아무리 베키라도 한 시간 넘게 공중을 나는 것은 무리였던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 내려 줘! 이 정도 하는 거 보면 괜찮은 것 같으니까! 나는 내려갈게!”
베키는 속이 좋지 않은 건지 아니면 오랜 시간 바이크의 뒤에 타서 그랬던 건지 몰라도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걸어갔다.
“내일 보자. 아구구…… 나중에 개조할 때 승차감을 조금 손봐야겠어.”
영의의 바이크를 자신이 개조한다는 것이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확정된 미래인 건지 확신에 가득 찬 말을 하며 멀어져 가는 베키.
영의는 그런 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걱정을 털어 버렸다.
‘후우, 베키가 위험할 것 같다니 확실히 아직까지 머리가 복잡한 것 같네. 아까 문 부수고 들어왔던 것만 봐도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영의는 일단 집에 가기 위해 잃어버린 것은 없나 확인하려 이것저것 확인하던 중, 그의 주머니에 베키가 준 수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내가 안 줬나?”
그리고 그 순간, 영의에게 수첩의 소유자에 대한 말을 해준 이후로 묵묵부답이던 알림이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개체명 베키는 그 수첩에 대해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가 보았던 정보의 출처에 대한 기억은 모두 다른 기억으로 바뀔 것입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사람의 호감 같은 것을 조작하는 걸 본 영의였지만 그 모든 건 음식을 먹고 난 이후의 이야기였다.
보상을 받을 때의 일종의 규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영의였지만,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기억이 조작당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표정이 굳었다.
[본디 있어선 안 될 기억과 물건이었습니다. 그리고- ■■■…….]
그 순간 알림이의 대답에, 마치 방송에서 나오면 안 될 말을 검열하듯 다른 소리가 덧입혀졌다.
‘대체, 이게 뭐길래?’
영의는 차원을 건너는 누군가의 소유라는 것 이외에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는, 낡은 수첩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