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13)
이스데의 거리에는 사람이 조금씩 오가고 있었으나, 도시 내부를 가로지르는 개울의 근처에는 아무도 오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던 남녀가 있었겠지만.
“……여기까지야. 내 과거는.”
베키의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과거 이야기가 끝나자, 영의는 베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뭐랄까. 미안하네.”
“뭐가?”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유 없는 미친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생각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영의는 얼버무렸다.
“아니, 여러 가지로. 전부?”
“괜찮아. 불이 안 났어도 빅터는 문을 잠그고 갔을 녀석이었고, 발레리는 내가 정문에 다다랐던 그 순간에 이미…….”
베키의 말을 듣던 영의는, 문득 무언가 궁금해졌는지 질문했다.
“그럼, 그다음에는?”
“다음이라니?”
“아니, 그 이상한 남자에 대해서라든가. 빅터에 대해서라든가. 같이 지내던 빈민가 애들은 어떻게 됐나 해서.”
베키는 영의의 말에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보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일 없었어. 내가 모은 돈이랑, 발레리가 모은 돈을 헤링스 영감한테 주고 애들을 좀 보살펴 달라고 했지.”
헤링스는 베키의 설명을 들었을 때 그중에 하나도 못 믿겠다는 듯 반응했다.
“뭐라고?! 빅터가 발렌타인 녀셕들과 한패고, 발레리는 죽어?! 그리고 발렌타인 갱은 전멸? 그게 무슨 소리냐?”
하나만 들어도 못 믿을 이야기를 세 개나 연달아 하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됐어. 영감. 여기, 나랑 발레리가 모아 둔 돈이야. 애들 잘 보살펴 줘. 이 뒷골목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게 영감뿐이네.”
베키는 헤링스의 앞에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던져 두고 곧바로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니, 설명은 해주고 가야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발레리는 어쩌다 죽은 거고?!”
다급히 절뚝이며 베키를 따라 나오는 헤링스.
“……잘 있어, 영감. 나는 가볼게.”
베키는 그런 헤링스를 외면하고는 달려서 뒷골목을 벗어났다.
“베키! 베키!”
베키를 따라갈 만큼의 체력도, 신체 여건도 되지 않았던 헤링스는 사라지는 베키의 뒷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또 나만 남게 되는구나…….”
그런 자세한 사정은 제쳐 두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끝맺은 베키.
“그럼, 빅터는?”
빅터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베키는 순간 얼굴을 굳혔으나 이내 작게 코웃음을 쳤다.
“흥. 빅터는, 배신자답게 비참하고 보잘것없이 죽었지.”
“네가…… 한 거야?”
영의는 혹시 베키가 직접 빅터를 처리했나 싶어 물어보았으나, 베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옆 도시로 가서 졸부가 된 것처럼 바로 금화를 꺼내서 술을 진탕 퍼마셨대. 그리고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며 걷는 걸 그 동네 도둑들이 털어먹은 거지.”
빅터는 헤이로크에서 벗어나 나름 번화한 도시인 도비데까지 갔으나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날 봤던것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술을 무지하게 마셨다고 했다.
주점에서 금화가 들어찬 주머니를 자랑하듯 보여 주며 옆 테이블에게 술을 사는 등, 눈에 띄기 좋은 행위만을 골라서 했던 빅터.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 길거리를 걷다 돈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도둑들이 빅터의 돈을 노리고 습격했고 빅터는 거기 대항하려다 제압당했던 것이다.
물론 눈앞에서 돈을 빼앗길 순 없었기에, 거칠게 반항하다 그만 목숨까지 잃고 만 것이고.
“내가 빅터의 인상착의를 물어 가며 쫓아갔을 때엔, 이미 길거리의 핏자국 중 하나가 되어 있었더라고. 피같은 돈을 포기 못해서, 결국 자기 피를 포기하게 된거지.”
영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게 빅터였다면, 도대체 뭘 위해서 함께 자란 가족 같은 이들을 죽이고 도망을 친 걸까?’
“혹시, 그게 빅터가 아니라거나…….”
“아냐, 내가…… 확인했어. 매립지까지 가서 직접.”
베키의 말에 영의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 그런 다음에 원동력을 잃었지. 빅터를 죽이겠단 일념으로 돈이고 뭐고 다 버리고 칼 한 자루 들고 쫓아간 거였는데 정작 그 빅터가 죽었다니.”
베키는 영의와는 반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뒷골목 부랑아치고는 상당히 굵고 길게 살아남았던 거지. 동네에서 알아주는 녀석들이었으니까.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 본다면 빅터가 옳았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만 아니었다면.”
베키의 말에, 영의는 문득 그녀의 이야기에 나오는 남자에 대해 궁금해졌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물론 그가 만난 이들 중에 기인들도 많았지만 베키의 말을 들어 보니 의구심이 커졌다.
“그런 다음 도비데에서 적응하다가 마법으로 전향했고, 의외로 재능이 있어서 마탑까지 들어갔지. 거기서 영감을 만났고. 물론 적성에 안 맞아서-”
‘기사 출신이었다는 잭은 검과 몸에서 기 비슷한 걸 뿜어냈다는데, 남자는 그런 게 없었다고 했지. 그리고 비정상적인 신체 능력까지.’
철로 된 금고를 찢은 것 같아 보였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신체 능력으로만 보자면 C급 각성자쯤 되리라.
“그 남자 말이야, 고개를 돌리니까 사라져 있었다고 했지?”
“지금처럼 멋진 마공학자가- 어어, 응. 바람처럼. 그 남자가 주고 간 수첩이 없었다면, 존재도 못 믿었을걸.”
“혹시 목격한 정보를 물어보거나 하진 않았어?”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어. 시장이 날 잡으려고 병사들을 풀었었거든. 그래서 인사도 못 하고 급하게 도망쳤지.”
베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용케 이렇게까지 성공했구나 싶었다.
“정말이지, 너는 대단해.”
가족 없는 길바닥 출신에, 14살까지 교육도 못 받았다.
그러다 14살에 그나마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친구 둘을 잃고, 자신이 살던 곳에서 도망쳐 나와 홀몸으로 이렇게까지 성공했다니.
“뭐가?”
“그런 사건을 겪었어도 이렇게 금방 성공한 마공학자가 됐잖아.”
영의의 말에, 베키는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게 말이지…… 나, 마법 교육 받은 적 없어.”
베키의 의외의 진실 고백에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 눈이 커지는 영의.
‘배우지도 않고 마탑에 들어갔다고? 마탑이 그런 곳이었나?’
영의의 상식선에서 마탑은 마법 초보자를 위한 곳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배운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물론 일라이저가 마력 주입기를 가지고 있던 것을 보면 그는 조건만 맞으면 초보자들도 가르치는 것 같긴 했지만.
“뭐?”
베키는 영의의 반응이 자신에 대한 불신이라고 생각한 듯,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 아니! 마탑에서 공부한 건 확실해! 저 고리타분한 자식들이 말하는 건 봤잖아!”
“그럼 교육받은 적이 없단 건 뭐야?”
“그게, 으으. 이거 보여 주면 안 되는데. 그래도, 너니까. 보여 줄게.”
베키는 뭔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품에 손을 넣어 늘 입고 다니는 옷의 안주머니에서 낡고 꼬질꼬질한 수첩을 꺼냈다.
“수첩?”
“이게 아까 말한 그 수첩이야. 이해가 안 되는 내용도 있고, 뭔지 모를 문자도 있지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도 있어. 그것만 보고도 마법을 배웠지만.”
“대체 뭐가 적혀 있었던 거야?”
“으음. 마력의 기본 구조랑 운용법, 기본 마법 공식이랑 응용법 같은 것들? 그리고 조금 넘겨보니까 마탑에서도 본 적 없는 게 있더라고. 스승한테는 보여 줬는데, 어디서 얻었냐고 물어보더라?”
일라이저까지 흥미를 보였다면 상당히 엄청난 물건일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 적힌 생각이랑 설명 몇 개는 나도 모르겠고, 스승은 그중에 몇 개 베껴 갔는데 아직도 못 푼 게 많아. 발표하는 논문 중에 연관된 게 없었으니까 확실할 거야 아마. 한번 볼래?”
베키는 수첩을 영의에게 건넸고, 영의는 수첩을 받아 들고는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회화 정도야 번역기가 개발되어 있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언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동 번역을 해주는 기기가 없었다.
물론 영의는 알림이의 도움을 받아 다른 세계의 언어까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문자는 서비스에 포함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알림이가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몰라도 조금 미흡했다.
무림 세계에서 혁련무강의 거처에서 본 몇 개의 책 표지에 적힌 글이 번역되는가 하면, 독고휘와 갔던 객잔에서는 몇몇 단어들이 번역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지구의 단어와 호환되는 게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대감을 안고 수첩을 보았으나, 역시나 어느 정도만 기대한 만큼 큰 쓸모는 없었다.
“음, 이건 뭔지 모르겠네.”
지렁이를 형상화한 듯한 꼬부랑거리는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장도 있었고, 의미 없어 보이는 직선들이 그어진 장도 있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때, 그에게 익숙한 문자가 보였다.
“베키.”
영의는 지금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베키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응?”
“이거 갖고 있던 남자, 확실히 너랑 의사소통이 됐지?”
“응.”
이 점에서 약간의 의혹이 생겼다.
“그리고, 정체 모를 힘을 썼고.”
“맞아. 기사들이랑은 다른 건지, 타고난 힘이 엄청난 건진 몰라도.”
그리고 이 말에서, 의혹은 혹시나? 하는 의심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고 했지? 증발하듯이.”
“응. 이제는 그게 마법인지 아닌지 구별 가능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모를 시기니까 그냥 엄청난 마도사인가 보다 했지.”
마침내 의심은 확신으로까지 변했다.
별을 구경하는 듯, 계속 하늘만을 쳐다보던 베키는 이제야 뭔가 생각이 정리된 건지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맞다! 아마 길거리에서 뭔가를 구상하던 마도사 아니었을까?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려면 마도사급은 되어야 했을 테니까! 어깨를 뺀 거야, 아직 잘 모르겠지만 다른 건 마도사였다면 다 가능할 거야.”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말해 주길 바라며 영의를 바라본 베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움찔했다.
“어어, 너 왜 그래……?”
“아니, 혹시 몰라서 묻는데. 너 진짜 이런 문자 모르지?”
[二十四年 完]
“모른다니까? 그런 그림 같은 글자 몰라.”
영의가 손으로 가리킨 수첩 속의 문자는, 지금 사용하는 것과는 형태와 구성이 상당히 달랐지만 확실히 한자였다.
다른 것은 번역이 없다면 잘 모를 정도로 한문을 잘 알진 않았지만 저 24년 완이라는 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영의.
지구의 글자를 보자 그 의문의 남자가 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다 문득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떠올렸다.
‘알림아.’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 인물인 알림이에게 말을 거는 영의.
[말씀하십시오, 사용자.]
‘혹시 나 이전에, 차원을 건너는 사람이 있었어?’
지금까지 무언가 중요해 보이는 것은 잘 대답해 주지 않았던 알림이의 특성상, 이번에도 대답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의 해답은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없으면 없었다고 할 테고, 있었다면 대답을 피하거나 못 알려 준다고 하겠지.’
그러나, 알림이의 대답은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입니다.]
알림이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영의는 그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말았다.
“뭐라고……?”
“응? 뭐가? 모른다고 얘기했잖아. 혹시 귀가 안 좋아? 내가 개발한 소리 증폭기 써볼래?”
영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베키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