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12)
발레리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 순간, 베키는 주머니에 금화를 담던 것을 멈추고 곧바로 달려가 발레리를 안아 들었다.
“바, 발레리!”
그리고 그 틈을 타 빅터가 몸을 일으켜 금화가 든 주머니를 가로채 도망갔지만, 베키는 그런 빅터를 쫓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으윽, 끅. 더럽게, 아프네.”
발레리의 옆구리에 꽂힌 단검은, 그녀가 쓰러지며 상처를 더 깊게 헤집어 놓았다.
그렇게 벌어진 상처에 내부의 출혈까지 더해지자 복부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구르는 피 묻은 단검.
“어, 어떡하지? 이런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옆구리에서 검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급격히 당황하는 베키.
물론 칼에 찔린 사람도 봤고, 그것 때문에 죽은 시체도 뒷골목에서 봤지만 발레리가 그런 일을 당하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통상적으로 뒷골목에서 칼을 맞는 경우라 해봤자 배에 찔리는 정도나 베이고 끝나는 수준이었기에, 꽉 눌러서 지혈하라는 상식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찢어진 갈비뼈 사이와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피는 그녀가 알고 있는 선을 벗어났다.
“뼈, 뼈 때문에 누르지도 못하는데? 바, 발레리! 일단 일어나서 나가자! 치료사한테 가면 될 거야!”
베키는 발레리를 일으켜 세워 업으려 했으나, 발레리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뭐 해! 나 혼자서는 너 못 데리고 간다고! 팔이라도 어떻게 해봐!”
발렌타인 갱의 졸개들이나 헤이로크의 누군가가 사고 등으로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치료사를 찾아가곤 했던 것을 기억해 낸 베키.
칼부림을 하던 발렌타인 갱도 살려 냈으니, 일단 치료사에게로 가기만 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내 필사적으로 발레리를 업은 베키.
그녀는 자신의 등허리가 따뜻하고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커헉! 베, 키.”
“그래! 왜? 아니, 말하지 마! 말하면 더 아파!”
“나, 숨이…… 차. 왜 이러지? 숨쉬기가 힘들어.”
빅터는 막무가내로 찔렀으나 그 칼날은 불행하게도 발레리의 폐를 찢어 놓았고, 그 탓에 발레리의 목숨이 더 위험해졌다.
“뭐? 숨이 왜?!”
베키도 발레리도, 폐가 손상되었을 때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그저 칼에 찔렸을 때 운 좋게 살짝 찔리거나 주변에 치료사가 있다면 사는 거고, 아닌 경우엔 죽는다고만 알았을 뿐.
갑작스럽게 상황이 악화되자, 베키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모두 짜내어 건물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발레리, 조금만 참아!”
“베, 키. 내 비상, 허억. 비상금 위치…… 말해 줄게…….”
발레리의 말에, 베키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들을 배신하고 도망친 빅터에 대한 복수도, 도망에 대한 미래 계획도 아니라 갑작스러운 비상금 이야기를 한다고?
그건, 그건 마치…….
‘유언 같잖아…….’
베키는 발레리의 말에 더욱 다급한 마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마음과 달리 몸은 그리 반응해 주지 않았다.
작은 덩치에, 머리를 얻어맞고 납치까지 당한 데다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않은가.
느리지만 착실하게 발레리를 업고 가던 베키의 등에서, 발레리는 계속 말을 하려고 했다.
“커헉! 큭. 내, 침대로 쓰던 나무 상자들…… 알지?”
“말하지 마! 이제 정문까지 거의 다 왔어! 여기서 나간 다음 골목 끝에서 돌기만 하면 돼!”
어떻게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다다랐을 때, 그녀들이 마주한 건 환하게 빛나는 불꽃이었다.
잭과 그 일당이 쓰러져 있는 곳과 주변이 불타고 있었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 불이 났잖아.”
불이 나도 이상할 건 없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정말 불이 붙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베키.
그리고 그때, 그녀들은 문득 지하실에서 탈출할 때 깨졌던 램프가 떠올랐다.
‘설마, 거기서 옮겨붙은 불이 여기까지 온 거야?’
불이 났으니만큼 더 빠르게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지하실 쪽의 문에서는 아직 연기만 올라오지 불이 타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저기서 난 불이 아니었어?’
베키는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녀들보다 빠르게 이 건물을 나간 이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의문의 남자는 수첩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으니 불을 지를 이유가 없어 보였고, 그녀들 외에 이 건물 안에 살아 있음이 확인된 것은 빅터뿐.
도망치면 될 것을 굳이 불을 지를 이유는 없었고, 불이 붙은 위치를 보아하니 개인적 원한으로 방화를 한 듯싶었다.
“빅터어어!!”
베키는 빅터에 대한 원망을 가득 담아 그의 이름을 외쳤으나, 몸은 성실하게 계속 출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빅터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불은 크게 번지지 않았고, 문 주변도 아직 불이 붙진 않았기에 빠르게 나가면 될 것 같았다.
푸확!
갑작스럽게 그녀들의 뒤에서 불이 커졌고, 그 열기에 순간 휩싸인 베키와 발레리.
“앗뜨! 뜨거워! 발레리, 괜찮아?”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기에 어느 정도는 피했지만 완전하게 피하지는 못했기에, 베키는 불의 열기에 발레리를 업은 손과 팔에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등에 업혀 있었던 발레리를 걱정하는 베키의 질문에 그녀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베키, 나 추워…….”
“금방……. 뭐?!”
발레리에게 금방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려 했으나, 춥다고 하는 말에 다급히 뒤를 돌아보는 베키.
‘춥다고?! 방금 불에 닿았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타 죽을 것 같은 실내였건만, 발레리는 춥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런 증상을 한번 본 적 있었던 베키.
발렌타인 갱의 지갑을 노리다 칼에 찔려 피를 쏟아 내며 죽어 가던 한 소매치기가 마지막 순간에 춥다며 눈물 흘리다 죽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내려온 계단에는 방금 흘러내린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바, 발레리!”
발레리는 호흡뿐만 아니라 출혈도 상당히 심각한 듯했다.
그러나 베키는 발레리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에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질병이면 몰라도, 외상만큼은 확실하게 고쳐 주는 치료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불이 났으니까 여기 주변에 와 있을지도 몰라.’
“조금만 힘내! 이제 여길 나가기만 하면 돼!”
베키가 그렇게 말하며 정문을 열기 위해 어깨로 문을 밀었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손잡이의 옆을 살펴보았으나, 빗장은 걸려 있지 않았다.
‘빗장도 안 잠겨 있잖아, 그런데 왜 문이 안 열리는 거지?’
문만 빠져나가면 금방일 거라 생각했던 베키는 정작 그 문이 열리지 않자 당황했다.
“미안, 발레리. 잠깐만 누워 있어.”
베키는 발레리를 조심스럽게 불이 붙지 않은 곳에 눕히고는 문을 물집이 올라오기 시작한 양손으로 잡고 밀기 시작했다.
“으윽! 이이익!”
쿵.
문이 뻑뻑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이유로 꽉 닫혀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문.
“됐다!”
베키는 그저 힘이 모자라서 열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문을 더욱 밀려고 했다.
“다행이-”
덜컥.
베키는 무언가가 움직이려다 막힌 듯한 불길한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덜컥.
문을 최대한 밀어 보았으나, 아주 살짝 열렸을 뿐 그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바깥을 본 순간, 손잡이와 손잡이 사이에 누군가가 막대기를 끼워 놓은 것을 확인했다.
“젠장, 이래서 불을……!”
잭의 시체에 불을 질러 둔 건 개인적 원한뿐 아니라 증거 인멸의 의도도 있었던 것 같았다.
덜컥덜컥.
제대로 된 빗장도 아니었고, 막대기도 임시방편으로 구해 온 것으로 보였기에 계속 흔들어 주면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화재가 났으니 경비나 마을 주민, 누구든 올 것이었고.
다만 그때까지 화재에서 버틸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발레리가 버텨야만 했다.
아직 뒷문으로 가는 건 가능해 보였으나, 발레리를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였다.
버리고 가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덜컥덜컥.
문을 연신 흔들던 베키는 뒤를 돌아보았고, 발레리는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것이 춥다고 느껴서 하는 행동인지, 죽기 직전의 경련인지는 몰랐으나 지금 바로 치료사가 있어도 살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하기 힘들 거란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는 있어도, 죽음이란 광경을 눈앞에 둔 생물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발레리, 죽지 마! 제발!”
베키는 애타게 소리쳤으나, 발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제발! 비상금 얘기라도 해봐! 아니면 다른 거라도! 발레리!”
그 순간, 베키가 두드리던 문의 건너편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떨그럭.
그런 다음,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에 나무로 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본능적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란 걸 알아챈 베키는, 화상 입은 손의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발레리를 잡고 문을 밀쳤다.
화악!
건물 내부의 뜨거운 공기가 바깥으로 나가는 동시에 겨울철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찬 바람에 베키는 고통스러웠으나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됐어! 이제 살았어!”
누가 자신들을 구해 주었나 싶어 고개를 돌린 베키는 문 앞에 서 있는 지저분한 남자를 발견했다.
방금 전, 수첩 하나를 찾기 위해 잭과 그 일당들을 무심하게 죽이고 나간 남자였다.
“어어?”
베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녀들을 구해 준 것에 당황했으나, 일단 발레리부터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발레리를 잡아끌었다.
“발레리, 가자! 치료사한테만 가면 돼!”
하지만 그때, 남자가 베키의 손을 잡아챘다.
“뭐야? 이거 놔! 난 발레리를 치료하러 가야 한다고!”
베키는 반대쪽 손으로 발레리를 잡으려 했으나, 그 손도 남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마디 하지 않았던 남자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이미 죽은 자에게 치료를 해서 뭘 하려는 거냐.”
“아니, 안 죽었어. 치료사한테 가면 살릴 수 있다고.”
베키는 발레리를 다시 업어 들었으나,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에 순간 움찔했다.
“발레리, 괜찮아. 치료만 받으면 돼. 응? 왜 대답이 없어? 정신을 잃었나?”
애써 태연하게 발레리가 살아 있다는 듯 말을 걸며 걸음을 옮기는 베키.
남자는 그런 모습을 보다가 베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야?! 이게 무슨……. 어?”
베키는 남자에게 화를 내려고 하다가 갑작스럽게 변화하게 된 자신의 몸 상태에 할 말을 잃었다.
화상을 입었던 손과 팔, 다른 부위는 화상 따위 없었다는 듯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줄곧 지끈거리던 머리도 개운해졌고.
“당신, 뭐야?”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적으로 올바른 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이 괜찮아졌으니 발레리도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하고 등에 업은 발레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땅에 내려진 발레리는 평소에 베키가 보던 모습 그대로 깔끔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창백한 안색과 눈을 감은 채 숨을 쉬지 않는다는 점일까.
“발레리? 정신 차려 봐. 발레리!”
베키는 현실을 부정하듯, 발레리는 지금 기절했을 뿐이라는 듯 계속 발레리를 깨우기 위해 흔들고, 눈을 연신 얼굴에 갖다 대며 그녀를 깨우려 했다.
하지만 발레리는 그럼에도 움직임이 없었고, 베키의 손도 점차 느려지더니 이내 바닥에 툭 늘어졌다.
이미 베키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발레리가 더 이상 자신을 보고 웃어 주거나, 길거리의 아이들을 보살펴 주지 못할 거라는 것을.
다만 베키의 마음이 아직 발레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뿐이라고.
“발레리…….”
발레리의 죽음을 보며 머릿속의 중요한 무언가가 희미해지려 할 때, 옆의 남자가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며 말을 걸었다.
“친구였나?”
“아니, 친구보다 중요한 가족.”
옆의 남자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아니, 남자가 방해했기에 빅터의 칼에 찔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레리가 칼에 찔린 것은 자신이 금화에 정신이 팔렸을 때였으니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 이전에,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남자의 난동 덕분이기도 했고.
“그렇군. 발레리라. 나이는?”
“열다섯 살. 나보다 한 살 언니였어.”
남자가 지금까지 인간다운 면모보다는 무덤덤하고 잔혹한 면을 보였으나, 발레리의 마지막 순간만은 기억해 주려는 듯하자 순순히 말해 주는 베키.
“15세, 발레리. 길거리의 떠돌이였으니 성은 없겠군. 기억해 두도록 하지.”
남자는 수첩을 펼쳐 무언가를 써 내려갔고, 이내 그것을 써둔 장을 찢고 수첩 사이에 끼워 둔 종이들을 꺼내어 품에 넣었다.
‘발레리의 마지막 순간을 써 내려가는 걸까?’
베키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무언가 툭 떨어지자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의 옆, 베키의 무릎 위에 던져진 수첩.
“뭐야, 이걸 왜……?”
‘저 수첩 하나를 찾겠다고 그 모든 짓을 했으면서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지?’
베키는 의문에 휩싸여 그 수첩을 집어 들었고, 남자는 베키의 뒤로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을 낸 것과 네 친구의 목숨에 대한 사죄다. 발레리란 이름은 기억해 두도록 하지.”
처음에는 남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불을 냈다는 말에 곧바로 고개를 돌리는 베키.
불이 났던 원인이 빅터가 아니라 저 남자였다고?!
“너 이 개……!”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