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10)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으음, 윽.”
정신이 들자 몸을 일으키려 해보았으나, 뭔가 해보기도 전에 두통이 엄습해 왔다.
“으으. 아파.”
그리고 두통이 몰려오자, 그 두통의 원인이 떠올랐다.
“빅터……!”
가족이라고 생각했고,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지낸 셋이었다.
함께 구걸을 배웠고 함께 좀도둑질을 하며 누가 자신들의 물건을 훔쳐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서로 망을 봐주면서 쪽잠을 자던 사이였다.
그런 깊은 유대가 있었는데, 배신을 하다니.
베키는 빅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발레리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발레리는 어떻게 된 걸까, 나처럼 잡혀 온 건가? 아니면, 발레리한테도 내가 납치당했다고 하고 배신하려는 걸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빅터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다급하다며 다른 것을 못 하게끔 유도한 것이나, 헤링스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을 때 이럴 때가 아니며 곧바로 구하러 가자고 한 것.
자신들 중 누구보다 겁이 많았던 빅터였으나 우애가 깊었기에 공포가 억눌려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애가 공포에 짓눌린 나머지 빅터가 배신을 하게 된 거겠지.
“대체, 뭘 조건으로 걸었길래…….”
이 시골 깡촌 헤이로크에서의 안락한 삶? 아니면, 죽으면 쓰지도 못할 돈?
어쩌면, 본인의 몸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들을 팔아넘겼을 수도 있겠지.
베키가 이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한 순간, 어둠 속에서 힘없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틀림없다. 자신과 10년을 지내 온 친구, 발레리의 목소리였다.
“발레리?!”
베키가 발레리의 이름을 부르자, 자신을 부르는 걸 알아차린 듯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어, 어어?”
“발레리, 나야! 베키!”
“베키?! 살아 있었구나!”
발레리는 베키의 목소리를 듣자 매우 반갑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네가 먼저 잡혀 온 게 맞구나.”
“내가 먼저 잡혀 왔다니? 나는 분명히 네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쪽 개구멍 옆에 있는 초소로 가다가 갑자기 발렌타인 녀석들한테 붙잡혔는데…….”
베키는 발레리의 말을 들으며, 헤링스에게 조언을 구한 건 확실히 정답이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헤링스 영감에게 조언을 듣지 않은 채 빅터의 말만 따라서 움직였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납치당했겠지.’
발레리는 빅터의 배신 사실을 모르는 듯, 다급히 빅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럼 빅터는? 여기 있어? 나랑 같이 습격받았는데. 빅터! 빅터! 베키, 옆에 빅터 있으면 좀 깨워 봐. 나는 지금 묶여 있어서 뭘 못 해.”
빅터를 걱정하는 마음이 목소리에도 묻어 나오는 발레리.
베키는 차마 발레리에게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빅터의 배신을 뒤늦게 아는 것이 충격이 클 것 같았기에 입을 열었다.
“발레리.”
“왜? 빅터 찾았어?”
발레리는 아직 빅터가 자신들과 함께 납치당한 줄로만 아는 것 같았다.
“아니, 우리를 납치한 건 발렌타인이 아니야.”
“뭐? 무슨 소리야? 안 그럼 누가 그런 짓을 한다고?”
“발렌타인이 연관된 건 맞지만 우리를 납치하고, 팔아넘긴 건…… 빅터야.”
베키의 입에서 나온 진실에, 발레리는 충격받은 듯 침묵했다.
“빅터가, 그랬다고? 그럴 리가. 겁 많고 요령 없지만 의리는 확실했는데. 빅터가 그럴 리가!”
믿을 수가 없는 듯, 부정하는 말을 하는 발레리에게 베키는 조금 더 충격적인 진실을 말해 주었다.
“내가 그 빅터에게 얻어맞고 기절해서 여기에 온 거야. 네가 납치당했다고 나를 유인해서 머리를 그대로 후려치더라.”
방앗간으로 갔기에 빅터가 직접 행동했지, 아니었다면 발레리처럼 함께 납치당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그 빅터가…….”
“당연히 말이 되지. 그만큼 겁이 많았으니, 우리를 팔아넘기고 자신은 살아남게 해주겠다면 누군들 마음이 안 흔들리겠어?”
베키는 이제 다 틀렸다는 듯, 포기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때, 어둠만이 가득하던 방에 빛이 들어왔다.
벌컥!
쿠당탕!
“윽, 눈이……!”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빛에 눈을 감아 버린 베키와 발레리의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더 넣어 놔. 노예로 팔아 버리게. 그보다 여긴 왜 이렇게 어두워? 램프 하나 넣어 놔. 어두우면 무슨 짓을 하는지 안 보이니까.”
이내 다시 문이 닫혔으나, 아까와는 달리 작은 불꽃이 일렁이며 타오르고 있는 램프 하나가 문가에 놓여 있었다.
“방금, 노예라고 했지?”
“응, 들었어.”
노예라는 말을 들은 발레리는, 정말로 빅터의 배신을 실감한 듯 분노했다.
“노예라니, 빅터 이 개자식! 우릴 진짜로 팔아넘기려 하잖아!”
“하아, 적어도 죽지는 않겠지만…… 죽는 것보다 비참할지도. 그보다, 방금 여기 던져진 거, 사람이지?”
베키와 발레리는 자신들의 이후 처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다 문득 방금 전 방에 던져진 무언가에 관심을 주었다.
“노예로 판다고 했으니, 사람이지 않을까?”
늘 뒷골목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경을 겪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다.
적어도 죽지 않는다는 건 확인됐고, 직접적으로 감시하는 이가 없으니 탈출 시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몸이 묶여 당장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불빛에 의지해 상태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조금씩 위아래로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일단 살아서 숨 쉬고는 있는 듯했다.
“저 사람, 아직 살아는 있는 것 같아.”
“음, 길동무 하나 추가라. 적어도 말이나 할 수 있는 상태였으면 좋을 텐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몸이 묶인 상태로 방에 집어 던져진 사람은 수염과 머리가 덥수룩한 것으로 보아 나이가 제법 있는 남자로 보였다.
“글쎄, 깨어 있는 상태였어도 발렌타인 녀석들한테 저항할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잡혀 오지도 않았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숨겨 둔 금화 열 개나 시원하게 쓰고 오는 건데.”
베키는 발레리의 비상금이 금화 열 개나 된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자금 사정은 그들 스스로가 잘 아는 만큼 그만한 양의 비상금을 따로 만들 여유가 없었을 텐데?
“금화 열 개? 너 그만한 돈이 있었어?”
“그래, 진짜 비상시에 쓰려고 조금씩 빼서 아껴 둔 건데. 가끔 돈 되는 걸 팔기도 하고.”
발레리가 그만한 비상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동시에 배신감을 조금 느끼기도 했다.
똑같이 악착같이 모았는데 저만큼이나 모을 수 있었다면 그 방법이라도 좀 알려 주면 됐을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 발레리에게 뭐라고 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베키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런 것도 여기서 빠져나가야 쓰는 거지. 이렇게 꽉 묶여서 뭘 어쩌게?”
그들이 뒷골목에서 나름 오래 살아남았다고는 해도, 정규군인 기사처럼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지지도 소문 속의 마법사들처럼 신비한 힘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베키는 그렇게 반쯤 체념한 듯했으나, 발레리는 무언가 해보려는 듯 연신 몸을 꼼지락거렸다.
“너 뭐 해? 밧줄에 까지지나 마. 어설프게 묶어 둘 녀석들이 아니니까.”
이미 깨어났을 때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계속했었으나, 일반인과 다름없는 신체 조건을 가졌기에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발레리는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 연신 탈출을 시도하듯 몸을 움직였다.
“예전에 길거리에서 공연하던 광대들, 기억나?”
“기억나지.”
세상 어디에나 웃음이 있는 것처럼, 곳곳을 떠돌며 공연이나 연주를 해 돈을 버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가는 곳을 가리지 않았기에 헤이로크에도 음유시인의 연주 소리나 떠돌이 극단의 연극, 광대들의 묘기가 사람들을 기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베키도 발레리와 빅터의 손을 잡고 함께 골목 구석에서 공연을 구경한 적 있었다.
물론, 공연을 구경하느라 정신 팔린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좋은 추억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왜? 마지막 순간에 추억팔이나 하자고?”
“아니, 너희는 그때 더 많은 주머니를 터는 생각밖에 안 했겠지만, 나는 저런 묘기로 돈을 벌어 보면 어떨까 싶었거든.”
베키 일당의 살림꾼에 가까웠던 발레리답게, 눈앞의 돈보다 미래의 돈을 염두에 뒀다는 발레리의 말에 베키는 웃음이 나왔다.
“하하, 너답다. 하긴 그러니까 비상금을 그만큼 모았겠지.”
“그때, 몸을 묶어 놓고 상자에 갇히던 사람, 기억나?”
“기억나. 그런 다음 상자를 칼로 찔렀지. 그때가 소매치기할 타이밍이었지.”
현대의 마술처럼, 사람이 상자에 들어간 다음 그 상자를 칼로 찌르거나 톱으로 잘라 내고 안에 있던 사람이 멀쩡하게 나타나는 그런 공연을 했었다.
물론 조금 허술한 면이 있었지만, 길거리 공연으로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 내가 광대들한테 물어봤거든, 상자는 눈속임으로 어떻게 한다고 쳐도 밧줄은 어떻게 풀었냐고.”
“대답해 줄 리가 없었을 텐데?”
그런 장사 비법에 가까운 비밀을 길거리 고아들에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상자가 아니라 밧줄에 대해서 물으니까 의외로 대답해 주더라고. 어깨의 관절을 빼내서 밧줄을 헐렁하게 만든 다음 몸을 빼내면 되는 거라고.”
하지만 알아도 따라 할 엄두를 못 낼 것 같은 그런 행위여서였는지는 몰라도 순순히 대답해 준 듯했다.
“그래서, 지금 하는 게 그거라고? 스스로 관절을 빼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뒷골목에서 뼈도 부러져 보고, 관절이 빠져 본 적도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베키.
그것도, 묶인 상태에서 하려면 더욱 힘들 것임을 알았기에 베키는 발레리를 말리려 했다.
“발레리, 아무리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해? 넌 그 광대들처럼 연습하거나 자주 해본 적도 없잖아.”
“그래도 해봐야지. 아니면 여기서 팔려 나갈 때까지 가만히 멍이나 때릴래? 선택해, 노력이라도 해볼래? 포기하고 잠이나 잘래?”
베키는 발레리의 말을 듣고 잠깐 충격받은 듯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이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팔에 힘을 주기 시작하는 베키.
“그래, 어떻게 하는진 몰라도 발버둥은 쳐봐야지. 이렇게 끝나려고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온 게 아니니까.”
“여기서 탈출해서 빅터의 얼굴을 뭉개 줄 생각이나 하자고.”
부스럭. 부스럭.
베키와 발레리는 어깨의 관절을 빼내기 위해 온 힘을 쓰는 동시에 바깥에는 소리가 잘 안 들리도록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그리고, 네 비상금도 좀 얻어 쓰자.”
“왜? 내가 모아 둔 건데.”
“빅터는 내가 돈을 어디 모아 둔 건지 알거든. 틀림없이 없어졌을 거야. 좀 빌려줘. 성공해서 갚을게.”
베키의 말에 발레리는 베키를 노려보았다.
“너, 그렇게 말해 놓고 빌려 간 돈들 아직도 안 갚고 있는 건 알지?”
“성공하면 갚는다니까? 내가 성공한 것처럼 보여?”
베키의 능청스러움에 한숨을 쉬는 발레리.
“하아, 뭐 어때. 셋이 아니라 둘이면 돈도 금방 다시 모으겠지.”
뚝, 뿌득!
그리고 그때, 사람의 몸에서 들리면 안 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는 둘.
“베키, 성공한 거야?”
“아니, 난 너인 줄 알았는데?”
베키와 발레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다, 이내 마지막 남은 가능성인 쓰러져 있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은 상태로 등 뒤로 묶인 팔 부분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기괴한 각도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을 뿐.
뚜둑, 뚝!
“히익.”
“저, 저게 뭐야.”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담력이 강한 베키도 질색하고, 관절을 빼는 것을 봤었던 발레리도 당황했다.
어깨관절뿐만 아니라, 손목과 팔꿈치마저 본래 움직일 수 있는 각도를 벗어난 각도로 움직였다.
그렇게 기괴한 움직임을 하던 남자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팔을 털었다.
후두둑.
로프가 바닥에 떨어지고, 몸의 자유를 되찾은 남자는 이내 자신의 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없어.”
그렇게 단 한 마디를 내뱉은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베키와 발레리를 무심하게 쳐다보고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