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9)
기억의 첫 시작은 분명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끌려서 어디론가 갔던 것도 같았고, 누군가의 싸움 소리에 눈을 떴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뭔지는 기억한다.
-그 쓸모없는 것 당장 갖다 버려!
버린다는 말의 뜻도 몰랐고, 그 이전에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만은 무의식중에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골목의 패거리들이 키워 주었다.
아마 칼받이로 쓰거나 암시장에 그냥 갖다 팔 생각이었을 것이다.
노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처지가 되었을 수도?
4살 무렵, 헤이로크 빈민가에서 나는 좀도둑질과 구걸을 배웠다.
골목의 유명한 거지, 절름발이 헤링스 영감이 나랑 비슷한 처지의 꼬맹이들 몇을 데려다가 가르쳐 주었다.
아마 왈패 놈들이 시켰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상식인에 가까운 그 영감이 우리한테 구걸하는 법을 가르칠 리가 없을 테니.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굶고 다니지 말라고 가르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냥 살다가는 죽을 테니 상납금이라도 마련할 방법을 알려 준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헤링스 영감의 가르침 덕분에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는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전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인지 키는 계속 작았지만.
그런 다음, 6살이 되었을 때-
“베키, 나와 봐!”
6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나와 보라니까? 빨리!”
“아, 알겠어! 뭔데!”
노트를 신경질적으로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짤막한 키의 소녀.
그 노트는 표지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제대로 덮이지 않아 맨 앞장이 펼쳐져 그 내용이 드러났다.
[베키 님의 연대기]
짜증이 난 상태란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듯,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밖으로 나오는 베키.
“뭐야? 뭔데, 빅터! 또 시답잖은 거겠지만!”
올해로 14세인 그녀는 현재 헤이로크에서 유명한 사고뭉치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베키와 뭉쳐 다니며 함께 사고 치고, 함께 굶고, 또 함께 웃던 친구 빅터였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니야! 발레리가 잡혀갔어!”
어차피 이번에도 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싶었던 베키는 빅터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빅터, 베키, 발레리.
별로 똑똑하지는 못하고 말보다 몸이 앞서며 조금 모자라지만 착하고 우애가 깊은 빅터.
키가 작은 대신 영민한 머리를 타고난 건지 잔머리를 잘 굴리며,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한 베키.
영민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따뜻한 마음씨로 그 둘을 잘 다독이며 뒷골목의 고아들을 보살피던 발레리.
헤이로크 뒷골목에서 가장 유명한 악동이자 사고뭉치 삼인방이었다.
말이 사고뭉치에 악동들이지 소매치기나 도둑질, 강도 등 어지간한 범죄는 다 해본 범죄자에 가까웠으나 그들은 아직 잡혀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발레리가 잡혀갔다니?
“누군데?! 어디에서 잡아간 건데? 쇠줄로 두 시간이면 빼낼 수 있어!”
베키는 발레리가 경비병이나 치안대에 잡혀간 것으로 간주하고 물었으나, 빅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잡아간 건 발렌타인이야.”
“뭐?”
헤이로크 시의 범죄 조직 발렌타인 갱.
시장과 결탁하고 이런저런 패악질을 부리는 동시에, 겉으로는 나름 멀끔한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키도 어릴 적부터 그들에게 상납금을 바치며 적당히 관계를 유지했으나, 오늘 갑자기 그런 관계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니, 발렌타인이 어째서?! 상납금도 제때 줬고 심기 거스를 짓은 한 적이 없잖아!”
악당들이 나쁜 짓 하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겠냐마는, 적어도 무언가 빌미가 될 만한 건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빌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 항상 신경을 써왔던 그들이었다.
“나도 몰라! 그냥 시장 눈에 우리가 거슬린 거거나 싹수가 보이기 전에 영입하거나 제거하려고 한 거겠지!”
빅터는 자신도 모르는데 대체 왜 묻느냐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 진짜. 그래서 어떡할 거야?”
“어떡하기는? 구하러 간다며!”
베키는 순간 빅터가 구하러 가자는 게 아닌, 구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 듯한 말에 이상함을 느꼈으나 이런 상황에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베키에게 빅터와 발레리는, 가족 그 자체였으니까.
“헤링스 영감은? 자고 있어?”
“아니, 아직 안 자. 영감님은 왜?”
빅터는 발레리를 구해야 하는데 왜 갑자기 헤링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냐는 듯, 의문 섞인 눈빛으로 베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었으니까, 뭐라도 물어봐야지.”
그리고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건지, 소리치는 빅터.
“이럴 때가 아니야! 구하러 가야지!”
베키는 다짜고짜 구하러 가자며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빅터에게 화가 치솟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들이박으면 그게 개죽음이지! 난 이렇게 둘 다 허무하게 죽으려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게 아니야!”
베키는 빅터에게 소리쳤고, 이내 사과했다.
“미안, 빅터. 내가 잠깐 흥분했네.”
그러나 빅터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인지, 침묵했다.
“아무튼, 어디로 끌고 간 건지는 알아?”
빅터는 그래도 침묵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래도 가족이란 마음이 있어서인지 입을 열었다.
“애들 말로는 헤이로크 외곽이라고 했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애들을 믿어. 우리가 보여 준 진심의 절반만큼만 우리에게 진심이라고 해도.”
빅터와 베키, 발레리는 소규모의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범죄 조직처럼 보였지만, 크고 작은 일들을 주워듣는 부랑아들을 이용해 정보를 모아서 사고팔거나 또 다른 길거리의 고아들을 도와주는 등의 일을 했다.
그렇게 모인 정보는 대부분 발렌타인 갱의 멤버들에게 팔렸다.
누가 누구랑 바람이 났네, 또는 어떤 조직원이 누군가의 험담을 했다는 등의 사소하고 작은 정보들이었지만 발렌타인 갱은 그걸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렇게 정보를 팔아 얻은 돈으로 길거리의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보살폈고, 그런 고아들은 곧 다시 정보원이 되는 순환이 이어졌다.
물론 자신의 정보가 팔렸다는 것에 분노한 발렌타인 갱이 고아들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때로는 살인까지 하는 일도 벌어지긴 했다.
어쩌면 그런 불이익을 본 발렌타인 갱의 단원 중 한 명이 이번 일을 일으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키와 빅터는 그나마 믿을 만한 어른 중 하나인 헤링스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래, 외곽이란 말이지.”
절름발이 헤링스는 베키와 빅터의 말을 듣고 턱을 짚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외곽이면 적당한 장소가 몇 개 없을 거다. 마을 공동 수확물 보관 창고나 물레방앗간, 아니면 북쪽 벽의 개구멍 옆 버려진 경비 초소 정도겠지.”
헤링스는 지금 발레리가 납치당했다면 어디에 갇혀 있을까에 대해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감! 어디가 제일 그럴듯해?”
“처리 후에 시체를 버리기에는 개구멍 쪽 경비 초소겠지만, 발렌타인 녀석들은 그리 허술하지 않아. 그리고 경비 초소는 그래 보여도 시의 재산이니.”
시의 재산이라는 헤링스의 말에 베키는 발레리가 어디에 있을지 감이 왔다.
“그럼, 물레방앗간이겠네.”
“그렇지. 마을 공동 창고도 일단은 시의 소유이니 일을 벌일 거라면 그 녀석들이 운영하는 방앗간 쪽이 더 낫겠지.”
“이제, 할 말은 다 해준 것 같다. 다들 가라. 나는 이 일과 관계없었던 거니까.”
헤링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절뚝이며 자리를 떠났다.
냉정하게 말하고 자리를 뜨는 그 모습에 뭐라 할 법도 했지만, 베키와 빅터는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헤링스의 처세술이었고, 뒷골목의 생존법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준 것만으로도 헤링스는 그들과의 의리를 다 하고도 남았다.
“영감, 고마워.”
베키와 빅터는 늘 가지고 다니던 나이프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옷자락과 신발을 잘 동여맨 뒤, 손에 몽둥이 하나를 쥐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거리로 나섰다.
뒷골목 부랑아로서는, 그게 최선의 무장이었다. 그들의 싸움 방식은 기습과 도망이었으니까.
“베키, 얼른 가자. 몰래 빼내 온 다음 도망치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 모아 온 돈이면, 다른 도시로 갈 수 있겠지?”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베키였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었기에 푼돈이나마 모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 둔 푼돈이 어느덧 금화 두어 닢에 이르렀다.
빅터는 몰라도 발레리도 그 정도는 모아 두었을 거라 생각하는 베키.
베키의 말에 빅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서 다시 시작하든가 하자. 이 도시에서 발렌타인한테 찍히면 좋게 끝나지 않으니까.”
빅터가 자신의 말을 긍정해 주자, 베키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래, 애들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만들어 둔 조직이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
“……그렇겠지. 애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우리가 그랬듯이.”
도시의 샛길과 골목길, 시간에 따른 경비병들의 순찰 경로까지 알고 있었던 둘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물레방앗간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고, 비어 있는 듯한 물레방앗간.
“뭐지? 왜 아무도 없는 거야?”
베키는 발렌타인 갱이 자신감에 가득 찬 나머지 방심한 건가 싶었다.
아무리 이 도시의 왕처럼 군림한다지만, 우리들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들의 정보로 인해 손해를 봐서 보복하기 위해 발레리를 납치한 거라면 그 정보력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뭔가, 이상한데?”
그러나 빅터는 베키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이 상황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듯이 곧바로 뛰쳐나갔다.
“이상하기는! 이럴 때 바로 구해 내서 빠져나가야지! 가자!”
베키는 갑작스럽게 돌입한 빅터의 돌발 행동 탓에 생각을 더 이상 이어 나가지 못했고, 빅터를 따라 다급히 물레방앗간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초나 경비는 바깥에만 없었던 게 아니라는 듯 적막한 내부.
지금이 겨울이라 아무도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누군가가 잡혀 와서 여기에 있었다면 입구 주변에 끌려오거나 저항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사람이 오간 발자국 정도는 있었지만, 뭔가를 끌고 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헤링스 영감이 틀린 건가? 아무도 없잖아! 하긴, 발렌타인 놈들이 어떤가 생각해 보면 마을 한복판에서도 그럴 놈들인데.”
헤링스가 오래 살아서 제법 감이 날카롭고 지혜가 쌓였다고는 해도, 추측의 범위였기에 틀린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던 그때.
“아니, 틀리지 않았어. 그 영감. 역시 헛산 게 아닌 것 같아. 아주 똑똑해.”
“뭐?”
베키가 빅터의 말에 뒤를 돌아보던 그 순간, 그녀의 머리로 묵직한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퍼억!
머리를 강타한 큰 충격과 함께, 베키는 쓰러지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빅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와, 어떻게 한 번에 맞힌 거지? 원래 계획은 개구멍이었는데. 영감 때문에 계획을 변경해야 했잖아.”
베키는 빅터의 말과 지금 일어난 상황을 보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직감했다.
“빅터, 너 이 망할-”
퍼억!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머리에 한 번 더 가해진 묵직한 충격에 베키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