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25)
서울 시내의 상공.
흰색 마정석 바이크가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며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이크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허공을 질주했고, 이내 저 높은 공중에 멈춰 섰다.
“……속도감이, 조금 없는데?”
분명히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기판에도 같은 속도가 표시되었다.
새로 주문한 바이크의 스펙 자체는 예전에 비해 오히려 올라갔다.
그런데, 이 묘한 불만감은 무엇일까.
“분명히 예전하고 똑같이 달리고 있는데,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들어.”
영의는 바이크와 마찬가지로 새로 산 붉은색 헬멧을 벗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줄무늬로 보이는 도로 사이에 존재하는 형형색색의 건물들.
그리고 그 위에서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달리는 차량들과 일부 마정석 바이크들까지.
자연의 시험 이후, 영의는 자신의 달라진 몸에 대해 적응을 거치고 있었다.
시력과 청력을 비롯한 감각과 지각 능력, 뭐라 형언할 수는 없지만 어떨 때 느낌이 오는 묘한 직감까지.
그렇게 발달한 감각으로 인해 묘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김치의 맛이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든가, 창문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에 깬다든가 하는 사소한 문제였지만…….
지금, 확실히 눈에 띄는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베키한테, 가봐야 하나……?”
예전에 한번 마개조를 당한 경험이 있어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바이크를 수리하려고 맡겼을 때 정비사가 보여 주었던 반응을 보면 그녀가 아니면 힘들 것 같았다.
‘뭐, 잘 살고 있는지도 한번 봐야겠네.’
영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베키에게 가려고 할 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주문이 있습니다.]
알림이가 음성 안내를 주로 하기 시작하면서, 보지 못했던 그것이다.
“알림아?”
[말씀하시지요, 사용자.]
“새 주문이 이 타이밍에 오는 건 무슨 의도일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말해…….”
평소엔 침묵하고 있다가 꼭 뭔가를 하려 할 때 갑자기 그러면 안 된다! 라고 하듯이 말을 걸어오는 알림이의 행동에 살짝 투덜대는 영의.
[죄송하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또 이럴 때만 로봇인 척하지? 어쨌든, 이번엔 뭔데? 천마 영감님 치킨 배달? 아니면, 마도사 영감님한테 피자 배달? 아, 수호자 양반한테 국밥이라도 갖다 줘?”
어차피 이거 아니면 이거겠지 싶은 생각으로 묻는 영의에게 알림이는 평소처럼 대답해 주었다.
[중간 쪽이 정답입니다. 다만-]
다만이라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영의는 헬멧을 다시 쓰고는 바이크의 기수를 돌렸다.
“어후, 그래. 가자.”
이미 익숙하기에 더 설명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듯 알림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출발한 영의.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알림이의 말에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수량이 15개 정도입니다.]
멈칫-
알림이의 말을 잠시 되뇌며 자신이 잘 들은 게 확실한 건가 생각하기 시작하는 영의.
‘15판? 피자를? 뭐 어떻게 먹는 건데? 냉동 보관해서 먹는 건가? 아니, 1.5판 아니지? 15개 맞지?’
[맞습니다. 사이즈는 라지, 15판입니다. 종류는 큰 상관이 없지만, 수령인 본인에게는 취향에 맞는 피자를 배달하는 것을 권고합니다.]
“자, 잠깐. 정리해 보자.”
지금껏 많아 봐야 4인분에서 6인분 정도 배달해 왔던 영의로서는 갑작스럽게 15판이란 대량 주문이 들어오자 난감해졌다.
바이크를 통한 배달이 메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다닐 만한 것은 바이크나 보온 상자 내부에 적재될 만큼이 한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문한 건 일라이저 그 마도사 영감님이고, 1판은 취향대로 갖다 주되 나머지 14판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전부 라지로?’
[정확합니다. 참고로 예상되는 보상은 아리안델 금화 또는 마정석입니다.]
“잠깐, 아리안델?”
영의는 알림이가 예상되는 보상에 대해 알려 주자 갑작스럽게 무언가 떠오르려 했다.
발달된 감각과 신체는 그의 기억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고, 과거에 들은 적 있는 단어가 나오자 그에 몸이 반응한 것이다.
“내가 그걸 어디서 들었더라?”
어디서 들은 기억은 있다. 아리안델이란 단어.
물론 보상 창에서 금화의 이름으로 본 기억은 있었지만, 그것 말고 확실히 누군가가 말을 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아니, 누가 말했었더라?”
아리안델에 대해서 머리를 싸매며 기억해 내려 하자, 알림이는 그걸 오해한 건지 영의에게 질문했다.
[사용자, 무언가 머리에 문제라도 있나요? 과거 72시간 동안 외상 또는 두통에 원인이 될 만한 스트레스는 없었습니다만.]
“아니, 아리안델…… 어디서 들어 봤는데? 누가 말했더라?”
아리안델에 대한 영의의 고민은 알림이가 해결해 주었다.
[사용자의 집에 있는 찻잎이 아리안델산 찻잎입니다. 주문인 베키에게서 우정의 선물이라고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베키가 그랬었지! 고마워, 알림아.”
영의는 손뼉을 짝 하고 치며 알림이에게 궁금증이 해결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알림이로 인해 시작된 걸 알림이가 해결해 주었을 뿐이지만.
‘응? 잠깐. 천마 영감님이랑 검황 영감님은 같은 지역이잖아. 실제로도 내가 거기서 이동했던 적도 있고.’
주문인들에게 배달을 갔을 때에, 전부 다 다른 세계일 리는 없었다.
당장 혁련무강과 독고휘는 서로 아는 사이였으니.
어쩌면 일라이저와 베키도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닐까? 아니, 이름을 들어 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한 명은 마도사였고, 한 명은 마법계의 이단아였으니까.
“그래, 이번에 가는 김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근데, 마도사 영감님이 뭘 좋아했더라?”
[일라이저는 두뇌 활동을 이유로 당분을 많이 필요로 하였습니다. 다만, 노화로 인한 당뇨의 발병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과도한 당분은 자제하기를 권장합니다.]
알림이가 일라이저의 건강에 대한 충고까지 하자, 영의는 문득 다른 어르신들의 건강도 생각이 났다.
“어, 그건 그래야겠다. 나중에 천마 영감님한테 치킨 배달 갈 때도 콜라는 작은 거로 들고 가는 게 낫겠지?”
혁련무강이 들었다면 그건 절대 안 된다고 소리를 쳤겠지만, 이곳엔 본인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낮 시간에 피자를 먹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보통은 배달 주문이기에 가게에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고, 이런 동네 피자 가게에는 잘 안 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장은 가게로 찾아온 손님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반반 되죠?”
이런 말만 안 했으면.
“네?”
여기가 치킨집도 아니고, 피자를 반반 섞어서 해달라는 건 무슨 주문일까?
아니, 물론 있기야 있지. 가능도 하고. 토핑도 절반씩만 올려서 구우면 되고, 피자라는 게 국물 요리도 아니니까 어렵진 않은데…….
메뉴에 없는 걸 해달라고?
아무리 손님이 왕이라지만, 이런 종류의 갑질은 아무래도 조금…….
“저, 손님. 그런 건 메뉴에…….”
아무리 아쉬운 쪽이 가게 측이라지만 이런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거절하려던 그때, 갑작스럽게 이상한 주문을 한 손님이 한 말이 그의 마음을 바꾸었다.
“고구마랑 페퍼로니 반반 섞어서 1판. 그리고 아무거나, 맛있고 잘 나가는 거로 14판 더요. 아, 포장이에요.”
총합 15판의 대량 주문. 심지어 단체 주문에서 으레 하는 싼 메뉴로 고르지도 않았다.
“됩니다. 네. 해드려야죠.”
“아, 다행이네요. 막 브랜드 피자 이런 데는 안 해줄 거 같아서 여기로 온 건데.”
이제 보니 손님이 되게 잘생겼다. 그래, 시원시원하게 생겼으니까 쓰는 것도 시원시원하구나.
“어후, 거기 애들은 메뉴판에 없는 거는 안 받겠지만 저희는 됩니다. 피자 토핑이라는 게 선호도에 따라 잘 팔리는 게 많은 거지, 못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 손님은 왕이다. 대신 많이 사는 사람은 장기판의 차나 마 정도 되겠지.
가게 측의 패턴과 속도를 바꿔 줄 수 있는 그런 특이한 말.
그렇게 피자 가게에서 갑작스러운 주문이 있었지만, 대량 주문에 사장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네, 또 오세요!”
사장은 1.25L의 콜라를 여러 병 서비스로 챙겨 주려고 했지만, 특이하게 손님 쪽이 그걸 거절했다.
그냥 안 받았다면 콜라가 필요 없거나 안 먹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겠지만, 서비스를 병이 아닌 캔으로 받아 갔기에 조금 특이했다.
“아, 당분은 적게 먹는 스타일인가?”
그렇게 나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떠올리고, 사장은 다시 가게에서 혹시나 올지 모르는 손님과 배달 주문을 기다리기 시작하며 TV를 켰다.
-네, 다음 소식입니다. 얼마 전, 은행 강도 사건. 다들 기억하시나요.
TV를 켜자마자 나온 것은 뉴스 화면. 사실 거의 매일 뉴스 채널을 틀어 놓고 있었다.
“음, 아직도 강도 같은 게 있나? 말세야, 말세.”
-그때 경찰 기동대를 훌륭히 지휘하며 본인이 직접 강도들과 교섭을 했던 기동대장이 오늘, 사임했습니다.
“뭐?”
이내, 영상과 함께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3세에 경찰공무원에 응시하여 지금까지 쭉 경찰 업무를 수행하고 후일 경찰 기동대의 대장까지 된 박 씨. 박 씨는 지난 금요일에 일어난 은행 강도 사건에서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가벼운 복장으로 은행에 들어가는 박 경정의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강도들과의 대치 상황에서, 갑자기 방호복을 벗고 비무장으로 은행에 들어갑니다.
-잠시 뒤, 은행에서 나와 기동대원들과 대화를 나누고는 계속 비무장 상태로 대기합니다.
수레를 밀며 안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바로 함께 들이닥치는 기동대원들.
-시간이 지나 인질들을 위해 식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박 씨는 기동대원들과 함께 곧바로 은행을 급습합니다.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해서는 안 될,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모함은 시민들을 구해 내는 성과로 돌아왔습니다. 기동대원들은 강도들을 제압하였고, 가장 뒤에서 나온 박 씨는 은행을 나서자 헬멧을 벗고 땀을 닦아 냅니다.
이내, 영상은 경찰청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경찰청에서는 박 씨에게 특진과 함께 표창 수여를 하겠다 밝혔고, 정부에서도 훈장을 수여하려 했으나 박 씨는 모두 거절하고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찰복을 입은 누군가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대장님이, 현장에서는 진짜 불처럼 뜨겁게 움직이셨거든요. 막 자기가 다 책임질 테니까 각성자들 동원하라고. 문제 되면 자기가 옷 벗겠다고.
-그렇게 불같던 사람이, 상황 다 정리되고 복귀하시고 나니까 책상에서 막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게 어떤 고민일지 몰랐죠. 그냥 징계 걱정(이라고만)…….
그다음, 다른 인물의 인터뷰도 나왔다.
-박(삐-) 경정님. 아, 이젠 그만두셨죠. 네, 사실 저희도 되게 의문인 게 엄청 깔끔하신 분이거든요. 경찰대학교 나온 것도 아니고 순경부터 시작한 분이시라 아랫사람 마음도 잘 아시는데.
-그래서 기동대원들도 그분을 되게 좋아했어요. 그리고 훈장이나 표창 같은 건 안 받고 싶어도, 적어도 진급 정도는 한 다음에 퇴직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걸 다 거절하고 갑자기 사표를 내셨어요.
아무래도, 이름을 표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공직을 그만둬서인 듯했다.
그리고 뉴스의 아래에는 이런 자막이 나왔다.
[은행 강도 사건 영웅, 모든 명예와 상 거절하고 퇴직 결정…… 이유는 왜?]
박 경정은 한순간의 선택을 후회했고, 그에 대한 책임과 사죄로 경찰을 그만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