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20)
독고휘의 정체가 밝혀지자 뇌섬문의 제자 일동이 그 자리에서 큰절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님!”
“검황님!”
“오오! 태사조님이시군요! 절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독고휘의 기억엔 없지만 그의 사손이라는 진가운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며 두 다리를 하늘로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사조님! 뇌섬문 말학, 소인 진가운! 인사 올리겠습니다!”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자신을 낮추다 못해 땅까지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절.
‘저건, 그랜절……?!’
영의는 저게 무엇인지 알았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오! 과연 사부님! 저도 똑같이 해보겠습니다!”
“저걸?!”
“우형아……!”
그리고 거기서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독고휘가 일이 커지는 것을 염려해 제지했다.
“그만. 거기까지.”
“하지만 사조님께서 돌아오셨는데 어찌-.”
진가운이 그래도 예를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하려고 할 때 독고휘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본좌가 싫다고 하였다. 뇌섬문의 제자란 녀석들이 길바닥 한복판에서 절이나 하다니,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게냐?”
“아, 알겠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진가운.
독고휘는 뇌섬문의 제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방금 전 무릎 꿇고 절을 한다고 생긴 흙먼지 자국이 있는 녀석, 얻어맞아서 멍을 달고 있는 녀석, 이상하게 이 와중에도 웃고 있는 우형이란 녀석.
모두가 각자 조금씩 다른 행색이었지만 단 하나, 정확히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선망과 기대감이 묻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 예전에도 어린 제자들이 저런 눈빛으로 날 보곤…….’
그리고, 그 광경을 보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이었다.
-사부님,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한 남성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다만, 남성의 눈만큼은 웃지 않고 그저 공허하게 먹구름만을 보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 뭐가 우습다는 거냐!
-모두가, 모두가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말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허망하게 스러지는 것이 운명이란 말입니까?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독고휘는 이내 기억을 애써 무시하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집으로 가자.”
“예?”
“집이라 하면 어디겠느냐? 뇌섬문이지. 본문으로 가자.”
독고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진가운은 포권하며 소리쳤다.
“예! 대문을 활짝 열어 놓으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영의가 반쯤 먹다 남은 우육탕면을 가리켰다.
“영감님, 이건 안 먹고 그냥 가시게요?”
“그래, 지금 이 난리를 쳐놓고 여기서 한가롭게 우육탕면이나 먹을 여유가 있을 리가 없잖느냐.”
지금, 독고휘가 돌아왔다는 것이 대대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어도 뇌섬문 제자들의 행동과 방금 전 진가운의 행동은 행인들이 볼 만큼 봤다.
-의문의 고수가 뇌섬문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뇌섬문 제자들을 무릎 꿇리고 정면으로 쳐들어갔다더라!
뭐든간에 부풀려지고 와전되는게 기본인 무림에서, 이렇게 변형된 소문들이 나돌것이 틀림없었으니.
당연히 마지막 목격 장소인 이곳으로 누가 됐건 엄청나게 몰려올 것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기에 독고휘는 자리를 뜨기로 했다.
“뭐, 그 말도 맞는 것 같네요.”
“그리고 먹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본좌가 돌아왔단 소식이면 잔치를 열고도 남을 것 같으니.”
영의가 독고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독고휘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사조님. 뭐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냐?”
진가운은 조심스럽게 영의와 독고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혹시 옆에 있는 이와는 무슨 관계인지……?”
“저요? 영감님 제자인데.”
영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진가운은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제자라고?! 그런데 왜 호칭이 저런 거지?
“제자라고? 꼭 임시라고 하더니?”
영의가 매번 깐깐하게 임시라고 하다가 갑자기 그냥 제자라고 하자 약간 빈정이 상한 독고휘가 말꼬리를 잡았다.
“임시 제자나 그냥 제자나 별다를 것 없지 않나요?”
영의의 말에 독고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크게 다르다.”
독고휘가 삐졌다는 듯이 말하자, 영의는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냥 임시 제자인 거로 합시다.”
그리고 독고휘도, 영의가 농담이나 장난에 가깝게 한 말인 것을 알았기에 웃으면서 답했다.
“녀석.”
그 대화는 그들 사이에선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대화였지만, 그 광경을 지켜본 뇌섬문 제자들에겐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무림인이 봐도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검황과 그 제자라는 틀을 벗겨내고 보더라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저런 허물없는 대화라니.
그러나 그 모든 틀이 있고, 심지어 뇌섬문 소속이기에 독고휘에 대한 환상마저 품고있는 뇌섬문 제자들은 다른 감상을 품었다.
-천하제일인과 저렇게 편하…… 아니, 버르장머리 없이 대화하다니! 심지어 제자인데!
그리고 생각에서 그친 게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직접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스승인 진가운은 독고휘가 제지하지 않는 거로 보아 직접 결정한 일임을 알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 제자들은 언제나 마음속에 천하제일인의 사문이며 최강의 문파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던 이들이었고,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던 시절의 독고휘를 모르는 젊은 신세대였다.
그런 그들은 차마 마음속의 우상이자 문파의 자랑이 저렇게 망가진(?) 모습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 감히! 검황께서 어떤 분이신 줄 알고!”
그러나, 그들이 미처 뛰어나가기도 전에 진가운이 그들을 제지했다.
“나서지 마라. 사조님께서 허물없이 지내는 분이다. 그리고, 사조님의 제자면 내겐 사숙이 되시는 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부님!”
“하지만이고 뭐고 없다. 사조님께서 그냥 두고 계시니. 사숙조님께 극진한 예를 갖추라고는 강요하지 않겠다. 다만, 무례하지 말아라.”
“알겠, 습니다.”
“그래. 사조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진가운이 그렇게 혈기왕성한 제자들을 진정시켰고, 이내 그들은 뇌섬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뇌섬문으로 향하며, 독고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감님, 뭘 그렇게 생각해요?”
“저 가운이란 녀석,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더구나. 본좌의 기억엔 저런 녀석이 없는데 뭔가 느낌이 걸리는군.”
아마 진가운이 자신을 본 적이 있는 사손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영감님이 지금 외모일 때 본 적 있는 거 아니에요? 단박에 보고 알아봤으니까.”
진가운은 독고휘를 처음 봤을 때 곧바로 알아보았다.
틀림없이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던 인물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반응.
“그런가, 그때쯤이면 기억에 없을 법도 한 것 같구나.”
생각해 보니까 저 나이대면 정말 어린아이일 때 수련을 하며 자신을 봤을 것이다.
당연히 독고휘야 그런 어린애들을 하루에 수십 명은 봤고, 어릴때의 인상이 나이를 먹어도 유지되기는 한다지만 지나가듯 본 아이를 기억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이 자라면서 아들의 눈에 띄어 제자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
이윽고 그들은 높은 담장과 그 담장에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큰 전각과 집들이 세워져 있는 곳에 다다랐다.
이미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대문의 위쪽 현판에는 뇌섬문이란 세 글자가 당당히 박혀 있었다.
“후우, 참으로 간만에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구나.”
독고휘가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영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영감님 집도 있고 자식들도 있는데 왜 혼자 산에서 살고 있었던 거지? 수련을 위해서 간 것도 아닐 텐데.’
“그보다, 집은 왜 나오신 거예요? 밥 맛없다고 가출한 건 아닐 테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만, 이왕 제자이니 얘기해 주마.”
“임시요.”
“……그래, 임시.”
독고휘는 영의를 한번 흘겨보고는 아까의 복수라는 듯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 영의를 보고선 작게 웃었다.
“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나의 그림자에 가려져 부담스러워하는 자식들과 제자들이 신경 쓰였고 또 허구한 날 도전이니 청탁이니 하며 찾아오는 성가신 녀석들도 있었다.”
“흠,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긴 하네요.”
“처와 첩들도 세상을 뜨고, 자식들도 귀밑머리가 조금씩 희게 변하는데 아직까지 집안의 최고 어른은 본좌더구나. 뭐든 내 눈치나 보고, 또 소운이 녀석은 가주직 물려주고 뒷방에서 노는데 내 아들은 아직 소문주였으니까.”
독고휘의 말에, 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무 오래 집권해서 집안 꼴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먼저 나온 거라고요?”
“정확하지. 그리고, 죽기 전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뭐를요?”
독고휘는 영의의 물음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심산유곡 속, 수상한 동굴 안에 남겨진 비급과 검. 그리고 그 주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 그 기연을 발견한 자가 강호에 풍운을 몰고 오는 이야기를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제자들과 진가운은 당황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문파를 나가셨다고? 아니, 앞부분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은 되긴 하는데…….
그리고 우형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새기기로 했다.
‘좋아, 비급, 편지, 심산유곡. 나중에 해봐야겠군!’
영의는 독고휘의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하! 영감님, 의외로 소년스러운 면도 있네요.”
“본좌의 마음만은 언제나 젊을 적 그대로지! 물론 몸도.”
독고휘는 미소 지으며 자신을 가리키며 잘난 체했다.
“뭐, 그럼 그건 이미 성취한 거네요.”
“무엇을 말이냐?”
“심산유곡에서 비급과 검과 편지. 뒤의 두 개는 몰라도 앞의 하나는 확실하잖아요?”
영의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전 독고휘가 했던 것처럼 자신을 가리켰고, 독고휘는 그 행동에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음? 그렇군! 하하! 과연 본좌의 임시 제자로다!”
“하하하!”
그렇게 둘이 서로 사이좋게 웃으면서 뇌섬문의 안마당을 조금 가로질러 건물 뒤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고, 그 맨 앞에 몇 명의 중년인들이 정갈하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중년인이 크게 소리쳤다.
“뇌섬문의 2대 문주! 광검 독고운! 뇌섬문 일동과 인사 올리나이다!”
독고휘의 아들로 추정되는 독고운.
그가 포권하며 인사를 올리자, 모든 인원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고개 숙였다.
일말의 어긋남도 없이 한 번에 진행된 포권은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타-악!
“인사 올리나이다! 검황이시여!”
그때 독고휘와 영의의 뒤에서 따라오던 제자들도 일제히 포권을 했고, 지금 이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영의와 독고휘뿐이었다.
독고휘도 그 예에 맞춰, 근엄하게 외쳤다.
“그래, 본좌가 돌아왔느니라. 본좌의 임시 제자와 함께!”
그리고 그 말에 독고운은 화들짝 놀라 독고휘를 쳐다보았다.
“아버님께서, 제자를……?”
독고운이 알기로, 독고휘는 다시는 제자를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