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17)
독고휘의 제자가 되는 것? 솔직히, 나쁘진 않다.
누구나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이고, 주변인들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뇌기를 다루는 무공을 쓰기에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기에도 충분하다.
‘뭐, 탕수육은 무조건 찍어 먹어야 하고 가끔 어린애 같은 모습도 보여 주는 주책맞은 영감님이기도 하지만.’
유감스러웠던 모습을 한번 떠올리고 나니, 다른 모습도 그리 멋있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매번인가? 나이 먹고 동생들이랑 싸우는 게 어색하지 않은 그 모습을 보면…….’
그래도 이름값과 연륜이 있으니, 배울 건 확실히 있을 것이다.
‘매일같이 싸움을 일삼는 무림 세계인데, 적어도 적과 싸우는 방법만큼은 확실하게 알려 주겠지.’
영의는 여태까지 받아 왔던 보상들이 있으면 좋고, 없더라도 조금 아쉽고 끝날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 모든 것들이 간절해졌고 더 많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눈앞의 노인…… 아니, 중년인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요, 제자.”
영의는 비장하게 그렇게 말했고, 독고휘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저, 정말이냐? 제자가 되겠다고?”
독고휘가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서 미안하지만, 영의는 지킬 선이 있었다.
“아니, 임시요. 임시 제자까지만.”
하지만 임시라도 별 관계가 없었던지, 독고휘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영의의 어깨를 두드렸다.
탁!
탁!
“그래, 임시면 어떠냐! 제자가 되는 게 중요한 거지! 구배지례를…… 아니지. 그건 나중에 받도록 하마.”
임시라고는 하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는데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독고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혹여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영의가 제자를 그만둔다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독고휘도 은연중에 영의가 강호의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고 아주 머나먼 곳에서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저 정도 무재면 팔이나 다리가 한 네 개씩 있어도 제자로 받을 마음이 가득할 텐데.
“자, 자! 그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으니 식사나 하러 가자꾸나!”
독고휘는 영의의 등을 밀며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 영감님, 돈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영의와 돈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돈이 있는 듯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던 독고휘가 어쩐 일로?
“돈이라면 소운이 녀석한테 빌려 왔다.”
쩔럭, 쩔럭.
독고휘의 손에 들린, 상당히 묵직해보이는 주머니가 금속음을 내렴 흔들렸다.
저 정도 돈이면 누가 봐도 빌렸다기보다는 힘으로 반쯤 강제에 가깝게 가져온 것 같아 보였지만, 놀랍게도 이번엔 빌려 온 게 맞았다.
“자, 가자. 우육탕면 먹어 봤느냐?”
“어, 아뇨.”
“그럼 얼른 가야지. 본좌가 뇌섬문을 창시했을 때 근처에 문을 연 반점이 있는데, 거기 숙수의 우육탕면이 정말 엄청나다.”
독고휘는 그렇게 영의를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갔고,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기를 숨기지 않기 시작했다.
‘뭐 어떻겠나, 이제 다 지난일인 것을. 그리고 가족이라. 흠, 한번 시험을 해봐야겠군.’
어차피 들킨 마당에 뭐 어떨까 싶은 생각도 있었고, 이미 복장이나 검에 대한 지적을 듣고 나니 알 사람은 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뇌섬문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운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 *
조명이 꺼진 한 방, 누군가가 방금이라도 앉아 있었던 것같이 온기가 남아 있는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 위에는 일시 정지를 하거나 영상을 끄는 것을 잊은 건지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태블릿이 있었다.
<면담 기록>이란 글자가 떠 있다가 이내 사라지고, 자막이 생성되었다.
-본 면담 기록은 용도를 밝히지 않으며, 단순 기록용으로만 작성되었다.
그리고 검은 화면에서, 노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들, 도덕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공통된 질문을 던졌을 때, 모든 인물들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에 네 개의 분할된 화면이 떠오르며, 그곳에는 두 남성과 두 여성의 반응이 녹화되어 있었다.
“네?”
한 젊은 남성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는 듯한 모습.
“뭐?”
덩치 큰 남성이 질문의 주제에 당혹스러워하는 모습.
“응?”
작은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
“도덕……요?”
그리고, 젊은 여성이 노인의 목소리에 역으로 물어보았다.
그들 모두의 반응이 지나가고, 화면은 일시 정지된 듯 멈춰 있고 노인의 목소리만이 다시 들려왔다.
“그래, 도덕. 도덕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정확한 의미는 없어도 되네. 그냥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모든 화면에서 동일한 내용을 물어본 듯, 노인의 목소리는 없어진 채 대답하는 화면만이 재생되었다.
“도덕이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만인의 암묵적 약속? 하지만 규제가 되지 않으니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젊은 남성은 이론에 가까운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견도 내놓았다.
“영감, 나는 그런 거 못 배웠다. 어릴 적에 돈이 없어서 말이지.”
덩치 큰 남성은 도덕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듯한 느낌을 주는 말을 했다.
“나 그거 알아! 만화나 영화 같은 거 되게 좋아하면서 막 거기에 몰두하는 사람들! 맞지?”
소녀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글쎄요, 제가 학창 시절에 도덕 점수는 만점이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이과로 가서…….”
그리고 젊은 여성은 질문에서의 도덕을 관념이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냥 도덕이란 것에 대한 감상을 말해 주면 된다고 설명하였다.
노인이 원한 대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는지, 재차 질문을 해 두 번째 대답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심적 여유와 반비례하는 분포곡선을 그리는 거라고 봅니다. 극상과 극하 사이에서는 평균적 값을 보이지만 예외가 있는 그런 거요.”
젊은 남성은 아까의 대답을 보충하기 위해 비유와 손짓까지 하며 대답을 했다.
“쉽게 말하게.”
노인의 말에 남성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털었다.
“먹고살 만한 놈만 하고, 그 와중에 최상층과 최하층은 신경 안 쓴단 겁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평균적으로는 그렇단 거죠.”
요약하고 단순화한 대답을 끝으로, 젊은 남성의 영상은 종료되었다.
“도덕…… 난 모르겠다. 죽음 앞에서는 그런 게 의미가 없으니까. 다만, 있으면 좋기는 하겠다는 거지.”
덩치 큰 남성은 확실히 도덕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적극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음, 그런가. 알겠네. 자네라면 그럴 법도 하겠지.”
그리고 노인은 그 남성을 이해하는 듯한 대답을 해주었고,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그건, 도덕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노인이 소녀의 대답에 대한 정정을 해주었지만, 소녀는 해맑게 웃기만 했다.
“어, 아니야? 그럼 난 모르겠는데?”
소녀는 도덕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모르겠단 대답을 했다.
“그렇군.”
그리고 이 영상에서는 다른 자막이 생겨났다.
-여전히 일종의 감정 결여 및 공감대 결여가 있는 것으로 보임.
“도덕이야, 뭐. 간단하죠. 사회통제를 조금 더 쉽게 만드는 규범. 안 지키면 나쁜 놈이라고 대놓고 욕하고 지키게 하는 거죠. 물론 실제로 법도 조금 걸어 두고.”
질문을 바꾸자, 여성은 의외로 그럴듯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호오?”
그리고 그 대답에 노인도 의외라는 듯, 약간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고.
“일종의…… 법의 가이드라인? 아니면 체험판? 도덕적으로 살다가 엇나가고 그게 멀어지면 불법이 되는 거니까.”
여성은 뭐라 말하고는 싶지만, 명확히 생각나거나 정리되는 게 없는지 말을 번복하거나 멈춰 가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법의 울타리 안의 작은 울타리다?”
노인이 적당한 비유로 예시를 들자,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죠.”
“의외로 정확하게 짚는군.”
노인이 뭔가 인정하는 듯하자, 여성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구성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란 거잖아요. 나라에서 해주기엔 너무 작은 일이니. 아, 여기서 뭘 더 말하진 못하겠네요. 이런 쪽으론 배운 게 적어서.”
“아닐세,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때 여성은 뭔가를 더 말하려 하는 듯했지만, 영상은 종료되었다.
-가장 의외의 답변을 내놓음. 예측을 다시 할 필요가 있어 보임.
그리고 영상은 끝났지만, 그들 모두에게 질문을 했던 방에서는 추가적인 대화가 오갔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그보다, 이런 건 왜 묻지?”
“할아버지, 왜 갑자기 어려운 걸 물어봐?”
“이런 질문을 하신 의도가……?”
모두가 이런 질문을 받은 것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노인은 소탈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허허, 그냥 요즘 젊은 친구들의 도덕관은 어떤가 싶어서. 요즘 읽는 책이 있어서 말일세.”
덩치 큰 남성과 소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납득하였고, 젊은 여성은 잠깐 의구심이 있는 듯 보였으나 노인이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주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지만 젊은 남성은 노인이 설명을 하고 책을 보여 줘도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으며, 끝까지 노인이 했던 말과 모든 행동들을 떠올려 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한편, 영상이 흘러나오던 태블릿에서 영상의 재생이 끝나자, 그다음 영상이 자동적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한 도심지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영상.
도시는 혼란에 휩싸인 건지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괴수 무리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그리고 그 복잡한 도시 속에서도 탁 트여 있어 눈에 잘 띄는 각성자 아카데미와 거기 붙은 운동장에 갑작스러운 빛이 보였다.
빛이 보이고 난 직후, 영상은 각성자 아카데미 쪽으로 확대되며 그곳의 정황을 자세히 보여 주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찍은 영상으로도 확연히 구별될 만큼 덩치 큰 사내와, 온몸에서 섬광을 뿜어내는 누군가와의 충돌.
그 누군가는 영상 속에서도 형체가 명확하지 않고 조금씩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근거리 영상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군. 원거리에서 찍은 것이라 그런가……?”
남성은 태블릿을 들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태블릿을 다시 의자 위로 던져두었다.
“그래, 이쯤 되면 뭐든 간에 방해꾼이 하나 정도 생길 줄 알았지.”
남성은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허, 벌써 이 늙은이를 부르실 일이 생긴 겁니까?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한 노인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방금 전, 태블릿에서 나온 목소리와 같았다.
“그래, 아직 한국에 있나?”
-그렇습니다만.
“그럼 조사해 줄 게 있다. 지난번에 계획에 끼어든 변수에 대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