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16)
주말에 갑작스러운 상사의 호출 또는 누군가의 부름은 마음에 안 들 것이다.
물론, 그 부름도 어떤 것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데이트 중엔 더더욱 싫어지겠지.
하지만 평소에 안 부르던 사람이 급하게 부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갑작스러운 길드장의 긴급 호출로 인해 자리를 비운 화연.
영의는 그렇게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적당히 대중교통으로 돌아가자.’
“음, 뭐부터 깔아야 하지? 여기 와이파이 지역일 때 해놔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새로 산 휴대폰에 필요한 앱들을 생각하고 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사용자, 들리시나요?]
“일단- 음?”
그를 부르는 목소리의 정체는 알림이였다.
[사용자, 요청 사항이 있습니다.]
‘요청 사항? 나한테?’
지금까지 대부분 주문을 맡기거나 영의의 말에 알림이가 대답해 주는 대화 방식을 가졌던 둘.
하지만 알림이가 선뜻 영의에게 무언가를 요청한 적은 없었다.
[그렇습니다. 현재 사정상 사용자가 보상을 받게 도울 수는 없지만, 이번에 사용자가 그곳으로 가준다면 차후에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영의는 지금까지 기계처럼 배달 후 보상 수령이라는 매번 비슷한 방식을 반복했던 알림이가 선뜻 도움을 요청하는 게 의외였다.
‘일단 뭔지 이야기부터 좀 들어 볼게.’
[요청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사용자?]
‘조건이나 좀 들어 보자고. 터무니없는 거에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없잖아?’
뭔지도 모르고 알겠다고 얘기했더니 화산 분화구에 사는 은거 기인한테 매운 떡볶이를 갖다 주라는 그런 괴악한 주문일 수도 있었다.
[간단합니다. 개체 독고휘에게 가주시면 됩니다.]
알림이가 갑자기 부탁해 온 것치고는 생각 외로 너무 간단한 주문.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괴인한테 가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자마자 검강을 날리면서 날아오는 인물한테 가는 것도 아니었다.
성질이 괴팍한 사람이 지키는 곳도 아니었고 본인이 죽기 직전인 경우도 아닐 테니.
아니, 주변인에 비해 약했을 뿐 성질이 괴팍하긴 했던 것 같다.
‘그 영감님한테 다녀오는 건 너무 간단한데……? 이거 뭐 이상한 거 아니지?’
[아닙니다. 오히려 간단하기에 보상이 없는 것입니다.]
알림이의 설명에 영의는 납득이 갔다.
‘그래, 진짜 별거 아니라서 보상이 없을 수도 있지.’
조금 솔깃해지긴 했다.
더 강해질 실마리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에 있었고,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독고휘였으니까.
그런 독고휘를 찾아갈 명분이 생긴 건 좋았는데, 배달이 아닌 사적으로 찾아가는 느낌이 들어 조금 어색했다.
‘갑자기 찾아가도 괜찮으려나? 아니, 나만 보면 점심시간 맞이하는 학생들처럼 눈을 번뜩이는데 빈손으로 가도 되는 건가?’
영의는 매번 자신이 찾아갈 때마다 자신을 보고 두 번째로 자신의 보온 박스를 보던 영감님들의 뜨거운 눈빛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빠르게 보온 박스를 보고 그 다음에 날 본게 아니었을까? 혹시 모르니까 보온 박스를 한번 더 본거고?’
물론 배달업을 하면서 그런 눈빛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지만 그 영감님들은 뭔가,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알긴 알겠어. 당장은 안 가도 되는 거지?’
[빠를수록 좋습니다. 다만, 긴급하진 않습니다.]
알림이의 말에 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단한 간식거리라도 가져가야겠네.’
영의는 독고휘를 찾아간다는 생각에 몰두하느라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것도 모른 채, 밤거리를 걸어갔다.
* * *
무대륙 최고의 문파는 어디인가?
최고의 문파라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구파일방을 뽑을 것이고, 사파의 인물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력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최고의 문파라는 기준 자체가 애매하다.
역사가 깊은 소림이나 수많은 머릿수를 자랑하는 개방이나 그들 못지않게 강대한 세력과 힘을 갖춘 몇몇 세가들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바꿔서 최강의 문파는 어디인가? 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일부 사파인을 제외한 십중팔구는 뇌섬문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리 많은 제자들이 있지도 않고, 역사가 깊지도 않지만.
단 한 명, 현 천하제일인 검황 독고휘 한 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곳은 최강이라 칭해진다.
그런 뇌섬문의 주변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대도시는 아닐지라도 적당한 크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마을의 밤거리를 터덜터덜 걷는 한 중년인이 있었다.
“후우, 지치는군.”
이마와 목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적당히 훔치고는 손으로 털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년인.
그의 등에 있는 봇짐과 옆구리에 찬 철검을 보아하니 떠돌이 낭인이거나 작은 표물을 옮기는 표사처럼 보였다.
허나 가까이서 보면 봇짐을 싼 보따리와 그의 옷, 심지어 검까지도 적당히 장식이 잘되어 있고 고급진 재질이었다.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저런 차림을 할 리가 없으니 어느 정도 식견이 있다면 저 남자를 보고는 제법 강한 무림인이라 생각할 것이다.
중년인은 마을을 벗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산의 중턱쯤에서 봇짐과 검을 내려 두고는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중년인은 누군가가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는 중년인의 등을 툭 치고는, 말을 꺼냈다.
“응? 여기서 뭐 해요?”
“아, 아니. 지나던 길이다! 난 거지가 아니란……. 응?”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중년인.
순간적으로 눈에 살기를 띠며 검에 손을 가져가려 했으나, 지금 그는 정체를 숨겨야 했기에 솔직히 놀라는 반응을 보이기로 했다.
중년인은 자신의 등을 건드린 상대를 빠르게 돌아보며 검을 더듬거리며 찾는 시늉을 했으나,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긴장을 풀었다.
그의 등을 건드린 상대는 다름 아닌 영의.
“아니, 영의가 아니더냐!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아니, 그보다. 날 바로 알아본 것인가?”
물론 예전의 늙은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훨씬 다른 모습이었다.
“네, 뭐.”
영의의 대답에 독고휘는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다.
저 녀석이, 어떻게 나한테 바로 찾아온 거지?
그가 기거하던 동굴에 서신을 남겨 두고 오긴 했다.
당연히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만난 장소라고는 동굴밖에 없는 영의가 찾아올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 남겨 둔 서신에는 개인적 볼일로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무림맹으로 찾아가라고 적어 놨다.
무림맹으로 간다면 갈성천이나 혜윤 정도는 비무대회 관련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기로 안 가고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대체 어떻게 날 찾아온 것이냐? 서신에는 내가 여기로 온다고 적지 않았는데. 소운이 녀석이 말해 준 것이냐?”
다음번에 팽소운을 만나면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기로 생각하던 그때, 영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바로 영감님한테 찾아왔는데요.”
차마 시야 한구석에 보이는 작은 지도가 위치를 가르쳐 줬다고는 할 수 없었으므로 적당히 둘러대는 영의.
“아니, 뭐 제가 처음에도 영감님을 우연히 찾은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절 속이기엔 너무 특징적이신데?”
영의가 알림이의 도움을 받아 독고휘를 찾긴 했지만 정작 영의가 보기에는 독고휘는 뭐랄까, 변장이 엉성했다.
“제가 기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숨긴 건 알겠어요. 근데 영감님이 입던 옷이랑 칼은 그대로 갖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얼굴도 너무 대충 바꿨고.”
독고휘는 일부러 외모를 조금만 손대고 내기의 수준도 조절했다.
혹여나 다른 사람이 보면 적당히 젊어 보이게 얼굴을 만진 초절정고수 정도의 느낌으로.
반로환동을 했다고는 해도 그 정확한 모습이야 각 세가와 문파의 대표만 보았고, 그마저도 짧게 보아서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얼굴로 다니되 조금만 나이대를 어리게 하고 다니자.
그럼 그냥 정체를 숨기고 사는 고수 정도로 보이겠지.
-라는, 독고휘의 일부는 치밀하지만 일부는 엉성하면서 동시에 개인적 욕망이 반영된 변장이었다.
그래도 독고휘와 가까운 사람 몇을 빼고는 아무도 모를 위장이었다.
하필 그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가 영의여서 그렇지.
“크흠, 맞는 말이긴 하구나.”
독고휘는 헛기침을 하며 영의가 왔다는 사실에 혹시나 음식도 가져온 게 아닐까 싶었다.
“혹시 뭐 가져-.”
영의는 지금 손에 백화점의 로고가 적힌 쇼핑백과 그것보다 조금 더 작은 통신사의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혼자 뭐 하세요? 잠 안 와서 달밤에 산책하기에는 동네에서 너무 떨어져 있는데?”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에 묘한 기대감을 안고 물어보려 했으나, 영의가 더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알 것 없다. 그보다 소운이 녀석을 봤느냐?”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팽소운에게 조금의 단서라도 들었어야 이곳으로 왔을 텐데?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로 바로 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순간, 영의는 생각을 뛰어넘는 대답을 했다.
“그 영감님요? 못 봤는데요. 그보다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같이 다니는 거 아니셨나?”
영의는 갑자기 팽소운의 행방을 자신에게 찾는 독고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그 영감님을 찾지? 맨날 같이 다니는 거 아니었나?’
내비게이션 기능과 지도, 그리고 그 모든 걸 설명해 주는 알림이라는 존재 덕분에 찾아온 것이지만…….
그걸 알 리가 없어 당황하던 독고휘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아! 저 녀석은 뇌기 그대로를 이용하는 녀석이었지! 심지어 그 뇌기를 키우는 근간이 된 건 나의 뇌기! 그 뇌기를 찾는 건 누구보다 쉬울 것을!’
심지어 영의가 이동하는 속도를 생각해 보면 자신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가르치긴 했지만 영의가 자길 굳이 찾을 거란 생각은 안 했기에 보편적인 방법으로만 위장해서 숨어 다녔던 독고휘는 두 손을 들었다.
“후우…… 그래, 본좌가 왜 여기서 이러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마. 임시라고는 해도 제자니까.”
영의는 갑자기 독고휘가 자세한 사정 설명을 하려고 하는 걸 보고 멈추게 하려 했지만, 다른 말이 거슬렸다.
“아니, 제자 한단 소리는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임시 아니냐.”
물론 임시로라도 제자를 하란 말도 오고 간 것 같았지만, 제자를 하겠다고 말한 적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영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것도 안…… 아니지, 하죠 뭐. 그 임시 제자란 거.”
“어?! 진짜로?!”
독고휘는 영의가 하겠다고 하자, 생각보다 더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 그냥 계속 안 한다고 할 걸 그랬나?’
“한다고 했다! 방금 본좌가 들었다!”
“어, 안 하면 안 됩니까?”
“어허!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은 안 된다! 방금 한다고 했잖느냐!”
독고휘는 한 번 더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를 것만 같은 격한 반응을 보여 주며 영의를 제자로 만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