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14)
마음은 급하지만 상황은 그만큼 빠르게 흘러가지 않고, 자신의 마음과 현실 간의 시간 차이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음, 고객님 정보를 보니까 일반 요금제로 쓰고 계셨고, 그리고 휴대폰에 있는 기본적인 연락처나 사진 같은 건 거의 다 자동으로 업로드되니까 안심하시고요.”
대리점 점장은 충분한 속도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화연에겐 세상 느릿한 강의 같은 느낌이었다.
“으음, 네.”
그나마 다행인 건 영의가 다른 걸 묻지 않고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어 시간이 늘어날 것 같진 않다는 점이었다.
화연은 지금 저 점장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자잘한 설명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설명의 대상이 본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휴대폰을 바꾸는 건 영의였고, 설명을 또 건너뛰게 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설명을 듣고 있던 그때, 화연의 귀에 팍 꽂히는 한 단어가 있었다.
“혹시 이번에 변경하시는 김에 요금제도 커플 요금제는 어떠신가요?”
‘커플 요금제? 그게 아직도 있나? 아니, 커플……이라고 보는 건가?’
화연은 무심코 거기에 대답할 뻔했으나 냉정을 되찾고 대답했다.
“커, 커플…… 아니, 일반 요금으로요.”
“아, 네. 그럼 혹시 데이터 한도는-.”
“무제한. 최고로.”
그러나 그때 당사자를 앞에 두고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영의가 끼어들었다.
“내 휴대폰 사는데 네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아?”
“아, 그게-.”
“처음에는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하니까 가만히 있었는데 이건 좀 아니지?”
“난, 그냥…….”
화연은 좋은 의도로 한 건데 영의가 그것에 대해 화난 것 같아 보이자 위축되었다.
“점장님, 저랑 얘기하시죠. 폰은 잃어버렸어도 지갑은 안 잃어버려서.”
“어어, 네.”
이내 화연을 두고 점장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영의.
잠시 뒤, 영의는 작은 종이 가방에 휴대폰과 사은품 상자들을 넣고 대리점을 나왔다.
“저기, 선배.”
“다음은 어디야?”
“조금 전에는- 네?”
화연은 영의에게 사과하려 했으나, 영의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네가 하고 싶었던 게 있을 거 아냐. 일단 설명 듣는 게 먼저는 아닌 것 같아 보이고.”
영의는 그 말을 하면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방금 전에는 저한테 화난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화난 건 아니야. 다만 나도 어느 정도 여력은 된다는 걸 보여 주려고 한 거지.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영의의 얼굴이 쑥스러움에 조금 붉게 물들었다.
“크흠, 아니야. 다음은 어디로 가려고 했어? 자. 난 아직도 잘못한 게 있는 사람이잖아? 끌고 가야지.”
영의는 그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잡아서 끌어 달라고 하는 모양새.
화연은 그런 영의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자, 그럼 가요. 제대로 끌고 가줄 테니까.”
영의와 화연은 아까와 같은 모양새로 길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지금은 모양새만 같았지 둘 사이의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다.
그렇게 둘은 데이트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진행했다.
형태는 비슷하지만, 과정이 약간…… 이상한. 그런 데이트.
식당에 도착해서는-
“네, 손님. 어디로 안내를-.”
“조용한 곳요.”
아까의 패턴이 반복되었다.
“저희 가게에서 룸은 4인 이상만-.”
화연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직원은 갑자기 손을 내밀자 의문스러워졌으나 손가락 사이에 끼인 누런 지폐를 보자 의문이 사라졌다.
“더 필요해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오실게요.”
그렇게 둘은 조용하고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대화를 나눌- 뻔했으나, 화연이 입을 열지 않았기에 영의도 침묵했다.
식사를 마친 후, 화연은 또다시 영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응? 잠깐, 여기는 익숙한데.’
길을 외우는 감각이 제법 뛰어난 편인 영의는 주변의 지리가 눈에 익었다.
“여기는…….”
지난번, 지연과 집안 식구들에게 줄 선물들을 사러 온 백화점이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옷은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불가능했기에 화연은 고심하며 영의의 옷을 고르고 있었다.
‘얘는 나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끌고 온 걸까,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데리고 온 걸까?’
이 상황의 원인이 된 문자가 영의 자신이 직접 입력해서 보낸 것이 아니었기에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지금 화연은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나온 것이고, 영의는 부모님이 어떤가와 자신이 사라졌을 때의 대략적 상황을 묻기 위해서 온 것.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 상황이 나름 마음에 든다는 기분도 있었다.
‘역시, 이런 일상도 좋네. 요즘 뭐 평범하게 마음 놓고 있었던 적이 없던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화연이 옷을 고르는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누구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영의가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한 노인이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옛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신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노인이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영의는 의아함에 그렇게 물었고, 노인은 휴대폰을 꺼내 어떤 여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대뜸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혹시, 이런 여자 못 봤나? 내가 잠깐 넥타이를 보러 간 사이에 잃어버리고 말아서…….”
노인은 영의가 모르는 외국어로 얘기했지만 통역기를 가지고 있는지 곧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는 목소리에 영의는 미소 지었다.
“잠깐만요.”
그냥 사람 찾는 노인인가 싶어 사진을 들여다본 영의. 그는 사진 속 여자를 확인하고 잠깐 멈칫했다.
‘잠깐, 이 여자는…….’
지난번, 이 백화점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여자가 아니던가.
‘눈앞의 노인이랑은 무슨 관계인 거지? 혹시 뭔가 불온한 관계?’
영의는 잠깐 이상한 방향으로 노인을 의심할 뻔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래, 자주 가는 백화점이 여기면 아버님……? 아, 할아버님인가? 아무튼 가족을 데리고 올 수도 있지.’
“혹시, 연락은 해보셨어요?”
그래도 노인이 휴대폰은 가지고 있으니 해본 말이었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았다.
“안 받으니까 찾고 있네.”
“그럼 혹시 약속한 장소라든가, 그런 건 없으시고요?”
“안타깝게도 없네.”
영의는 노인의 말을 듣고 일이 조금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그때, 예전에 그 여자와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혹시 식당가 쪽의 디저트 가게나 그런 쪽은 가보셨나요?”
“디저트 가게?”
“네, 거기서부터 차분히 찾아보면 있을지도……. 정 안 되면 고객 센터에 말씀해서 방송을 하는 게…….”
“그럴 순 없지.”
“네?”
정 안 될 경우 최후의 해결 방안으로는 좋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의 거절에 당혹스러워진 영의.
‘제일 좋은 방법이 방송인데, 정말 찾고 싶긴 한 건가?’
하지만 이어진 노인의 말에, 영의는 노인의 행동을 어느정도 납득했다.
“그렇게 방송을 하면 몹시…… 음, 난처해지지 않겠나. 최대한 직접 찾아봄세. 그리고, 조언에 감사하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영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에스컬레이터로 사라졌다.
“나 참, 특이한 어르신이네. 음, 나같아도 갑자기 누가 나 찾는다고 방송하면 되게 쪽팔리고 부끄러울지도.”
요즘 시대에 사람을 직접 찾겠다고 두 발로 걸어 다니는데 그 와중에 찾는 사람을 배려까지 하다니.
‘아니지, 상대방을 배려하며 자기가 뛰는 저런 게 진짜 신사다운 건가? 겉모습도 행동도, 둘 다 신사다운 어르신인데?’
노인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신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저렇게 멋있게 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을 하려던 찰나, 화연이 그를 불렀다.
“선배, 가서 좀 입어 보고 와요.”
“알았어.”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보고 아…… 너무 멋지다 싶으면 신사인 건 확실하겠어. 나이를 먹어야 나오는 그런 멋이 있나?’
하지만 영의가 어울렸던 나이 먹은 무림의 고수나 마탑의 마도사의 경우엔 그런 쪽의 멋은 없었던 것 같았다.
영의는 그런 감상과 고민을 마음속에 품어 두고 화연의 요청에 피팅 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남성복 매장을 거쳐 위로 올라가려던 한 여성이 있었다.
‘하아, 오늘도 못 찾으면 꽝인데.’
그 여성은 백화점에 쇼핑이나 상품 구경이 아닌,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는 의외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찾는 사람을 처음 만났던 스포츠용품 쪽으로 가던 그때, 여성은 무심코 한쪽 매장을 쳐다보았다.
‘음, 저기 커플이 있네. 남자 옷을 여자가 골라 주는……. 응?’
나중에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하려던 찰나, 남자 쪽이 뭔가 익숙했다.
‘그때 그 남자잖아?’
지난번에 작업을 걸려고 했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던 그 남자.
“뭐야, 여친이 있었네? 그것도 상당히……. 아니, 내가 더 예뻐. 음!”
에르메스는 순간적으로 다른 여자를 인정할 뻔했으나 자신이 더 낫다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여자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그런 행동을 하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외모라도 차이 나면 먹혔겠지만……. 아니지, 차이 같은 건 안 나!’
이내 그녀는 휴대폰을 급하게 꺼내 그 커플의 사진을 찍어 둔 후,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아, 커피나 마셔야겠다…….”
찾던 남자는 찾았지만, 원하던 상태가 아니었기에 실망한 그녀는 지난번에 갔던 가게에서 스트레스나 풀기로 했다.
‘아, 오늘은 살찌는 거 신경 쓰지 말고 막 먹어야겠어. 잘 보일 상대도 의미가 없어진 것 같고.’
그리고 그 가게에 도착하자, 그녀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대면하고 말았다.
“음? 오오, 이것 참. 바로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현지인과 동년배에게 물어보는 게 정답이었나 보군.”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지만, 노인은 자신의 판단이 현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어떻게? 내가 여기 올 걸 알았나? 아무도 몰랐을 텐데?
아니, 그 언니가 장소는 대충 알아도…… 여기 이 가게에 이 자리까진 몰랐을 텐데?!
하필 지난번 그 남자와 함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노괴…… 아니, 교부.
“오랜만, 이네요. 교부님.”
에르메스는 마음속 혼란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오랜만이지. 그리고 교부라는 말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자네도 그 작은 꼬마 아가씨처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나?”
노인은 정중하고 친절하게 웃으며 얘기했지만 에르메스에게는 그 모든 게 자신을 집어삼키기 위해 위장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자, 그럼 여기 앉게. 아니지.”
자리에서 직접 일어나서 에스코트하듯이 의자를 빼주는 노인.
에르메스는 두려움에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일단 노인의 의도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여기 자주 온다지?”
“네, 네에.”
노인은 프린세스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한 인사말이었지만, 에르메스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난 네가 여기 몇 번씩이나 와서 같은 곳, 같은 시간에 버티고 있다가 사라지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아주 의심스럽지.
“그럼 추천할 만한 메뉴가 있나?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새로 생기는 것들은 영 적응이 안 되어서 말이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요즘 녀석들은 영 마음에 안 들어.
에르메스는 공포감에 그만 울음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참고 넘겼다.
“히끅.”
“이런, 딸꾹질인가? 음료를 좀 많이 마셔야겠어.”
-아, 시원하게 들이켜고 깔끔하게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렇게 에르메스만의 공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