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13)
화연의 눈물은 생각보다 오래가진 않았다.
울던 장소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인 것도 한몫했지만,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의가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고, 마지막 순간이 위험했지만 죽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때, 이제 좀 진정이 됐어?”
영의의 물음에 화연은 아직 붉은 기가 살짝 남아 있는 눈가를 문질렀다.
“네. 그보다 제 위치를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연락을 보고 곧바로 다급히 뛰어나온 건 좋았지만 곧바로 답장을 보내진 못했다.
당장 영의를 보기에는 준비가 조금, 미흡했기 때문.
옷도, 메이크업도 충분히 괜찮았지만 그녀는 그것들이 모자라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급히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영의가 나타난 것이었다.
어차피 마주하게 된 거,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손대기보다는 그냥 의문부터 해결하기로 한 화연.
“그게…… 사실 나도 별생각 없이 온 거야. 너한테 연락하려고는 했는데 내가 폰이 없어서.”
영의는 솔직하게 말했고, 화연은 그 말에 놀랐다.
“네?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한 거예요?”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영의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는 화연.
거기에는 틀림없이 영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기록에도 남아 있었다.
“으음, 그게 말이지. 컴퓨터로 한 거야.”
조금 부실한 변명이었지만, 그래도 아귀에는 맞게 말하는 영의.
“네? 선배 컴퓨터 있었어요? 그보다 PC 버전도 쓸 줄 알았고?”
하지만 화연은 영의가 컴퓨터로 메신저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
“없으면, 조금 불편하니까. 그보다 이렇게 바로 마주칠 줄은 몰랐어. 그냥 사무실로 바로 가려고 했었는데.”
약속 시간이고 장소고 뭐고 없이 일단 바로 무작정 찾아왔던 영의.
오늘이 주말인 걸 감안하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었다.
다만 화연이 오늘 길드 본부로 올 예정이었기에 결과가 좋게 풀린 것이었지만.
“네, 저도 몰랐네요. 그보다 선배. 잠깐 저 좀 따라와 줄래요? 다른 건 묻지 말고.”
영의는 화연의 말을 들으며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좋아, 일단 변명은 침착하고 일관되게…….’
그렇게 변명을 생각하던 도중, 화연이 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다른 건 묻지 말라고 했지만, 영의는 다짜고짜 그를 이끌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디로 가는 거야?”
물론 할 이야기가 많으니 길거리보다는 어딘가 편하거나 조용한 곳을 찾는 게 나아 보였다.
‘하긴, 길거리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긴 하겠지.’
영의는 적당한 장소로 주변의 카페나 식당 같은 곳을 둘러보려 했지만, 화연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질문은 됐고, 그냥 따라와요.”
의외로 단호한 대답에 영의는 화연을 멈춰 세우고 설명을 요구하려 했지만, 화연이 영의가 준 힘보다 강한 힘으로 잡아끌었다.
“잠깐, 잠깐만- 천천히 좀 가자.”
물론 거기서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영의는 화연이 원하는 대로 맞춰 주기로 했다.
일단, 그녀에게 빚이 있는 죄인의 신세였으니까.
그렇게 화연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어디서나 볼 법한 통신사 대리점.
‘반값!’과 ‘공짜!’란 글자가 크게 써져 있고 자세한 내용은 설명해 주지 않는 광고들이 유리 벽에 가득하다.
“응? 폰 가게? 여긴 대체 왜 온-.”
화연은 영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문이 열리며 종이 작게 울린다.
여느 때처럼 잠깐 들여다보거나 휴대폰을 바꿔 볼까 싶은 생각만 하다가 갈 사람이겠거니 싶어서 가게의 직원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있는 건 한 젊은 남녀.
여자가 앞에 있고 남자가 끌려온 것 같은 모양새를 보아하니 휴대폰을 사달라고 하는 거거나 구경해 보고 가자며 끌고 온 거겠지.
“어서 오세요!”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별로 이상할 건 없다. 늘 있는 손님들 중 하나니까.
“네, 어떤 폰을…….”
직원은 늘 하던 것처럼 휴대폰을 추천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손님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제일 비싼 거로요.”
여기가 음식점도 아니고 갑자기 제일 비싼 걸 달라고 하다니.
그리고 의외로 구매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임채원 29세.
그의 통신사 대리점 직원 생활 2년 차에 강적을 만났다.
싼 거로 해달라거나 값을 깎아 달란 사람은 많이 봤지만 들어오자마자 제일 비싼 걸 부르는 사람은 처음 만난 그.
“아, 하하…… 그렇게 말하셔도 옵션에 따라 가격이 달라져서요. 혹시 생각하신 모델이 있으시면-.”
일단 미소를 유지한 채 타협의 선을 찾아보기로 했다.
‘고객이 싫어하지 않을 선에서 의견을 물리는 게 좋다!’
하지만 그의 고객은 여기에 돈을 낭비하러 왔다고 주장하고 싶은지, 여전히 방금 전의 주문을 고집했다.
“제일 튼튼하고 비싼 거요.”
조건이 하나 늘긴 했는데 별로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진상이라는 것도 단순히 성질부리거나 갑질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다른 쪽으로 사람 힘들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제일 튼튼하고 비싼 전화기? 그럴 거면 군용 무전기라도 하나 마련하든가. 대체 왜 여기서 이러시는 겁니까?’
물론 그런 뜻이 아니란 건 안다.
하지만 다짜고짜 들어와서 바로 요구하기 시작하면 파는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워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때, 평소엔 잘 안 나오지만 고민이 길어지는 고객이나 진상을 부리는 고객이 있으면 칼같이 출동하는 점장님이 안쪽 사무실에서 나오셨다.
“채원 씨? 문제라도 있어요?”
채원은 점장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구원자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 그게-.”
“아, 뭔진 알 것 같네요.”
하지만 점장님은 뭔가 심상찮음을 느끼셨는지, 설명을 하려던 그를 곧바로 밀어내고 고객 응대에 나서셨다.
“뭘 찾으십니까? 제가 본사까진 못 가도 이 동네 대리점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 드리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진열대 옆으로 다가간 점장.
“아, 이제 말이 좀 통하는 것 같네요. 제일 비싼 거로요. 튼튼함은 덤으로.”
점장님은 프로답게 그 주문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곧바로 카탈로그를 꺼내 드시고는 설명을 시작하셨다.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설명을 조금 하자면-.”
“잠-.”
하지만 설명이란 부분에서 고객 중 여자 쪽의 눈빛이 변하자, 점장님은 곧바로 말을 바꾸셨다.
“그 이전에, 어느 분이 구입하실 건가요?”
점장님의 물음에 여자 쪽이 남자를 가리켰다.
“이쪽이요. 부숴 먹은 건지 잃어버린 건진 몰라도 폰이 없어져서.”
이때 조용히 있던 남자 쪽이 작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굳이 따지면 부숴 먹은 쪽이긴 한- 미안. 그냥 가만히 있을게.”
아까도 충분히 그런 분위기를 보였지만, 주도권은 여자 쪽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크흠, 사실 뭐 요즘 휴대폰들 내구성이나 성능은 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러니까 디자인이나 다른 주변 제품들로 승부를 하는 거죠.”
점장님은 잘 보여야 하는 쪽이 어디인지 금방 파악한 듯, 남자를 조금 의식하면서도 여자에게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 고객님 원래 쓰시던 휴대폰 기종은 어떤 거였나요?”
“글쎄요, 뭐였지?”
남자 쪽은 자신이 쓰던 기종도 기억 못 하는 건지, 약간 맹해 보였다.
“그것도 기억 못 해요? 그럼 내가 정할-.”
“잠깐만, 잠깐. 생각 좀 해볼게.”
그때, 점장이 직원에게 손짓했다.
“채원 씨? 차 좀 타와요. 아, 고객님들은 커피랑 녹차, 둘 중 어떤 거로-.”
“전 괜찮아요.”
여자 쪽은 아까도 그랬듯,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럼 전 차로 부탁할게요.”
남자는 의외로 녹차가 취향인 듯 차를 골랐고, 남자의 결정에 여자도 자신의 대답을 번복했다.
“잠깐만, 저도 같은 거로요.”
주도권이 여자한테 있긴 해도, 서로 존중해 주는 부분이 있긴 한가 보다.
아니면 마음을 급하게 바꾼 거거나.
차를 타서 돌아와 보니, 점장님은 벌써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네, 여기랑 여기랑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할부는-.”
“일시불.”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언제든 가져가서 긁으라는 듯이 카드를 책상 위에 놔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결제도 일시불로 하는 걸로 보아 성격이 매우 급하거나 일이 바쁜 게 틀림없었다.
“요금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 줬던 태도와는 다르게, 여자 손님은 갑자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뭐지? 정기적인 지출에는 약한 타입인가?
딸랑-
그때, 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기에 채원의 관심은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이번 손님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적당한 나이대의 남성이다.
아마 틀림없이 부모님의 휴대폰 교체나 문제 해결을 위해 온 거겠지.
“저기, 저희 아버지 휴대폰이 오래돼서 바꾸려고 하는데요.”
“네, 요즘 어르신들 스마트폰 잘 쓰시고 하니까 좋은 선택이시네요.”
예상했던 대로, 부모님의 휴대폰 교체였다.
“아니, 아직 쓸 만하다니깐 그러네. 이것 봐!”
그렇게 말하며 어르신이 꺼내 든 것은 목걸이에 걸린 구형 폴더 폰이었다.
‘저거, 설마 앞 번호가 016이나 017은 아니겠지?’
그나마 타협해 봐도 011이 최선인 것 같아 보일 정도로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휴대폰.
“아니, 아버지. 지금까지 쭉 쓰신 건 알겠는데, 이제 충전기도 망가졌잖아요.”
“이것 봐라! 아직 불도 잘 들어온다!”
그렇게 소리치며 어르신이 휴대폰의 화면을 열자, 거기엔 초록빛의 액정만이 있었다.
‘저거, 나 어릴 때나 봤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생각한 것보다 더 옛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아들의 도움과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직면, 그리고 적당한 가격대의 매물들을 보여 드리자 어르신은 금방 만족하셨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설명해 드리자 바로 태도가 바뀌시기도 했고.
그렇게 응대를 끝내고 점장님 쪽을 돌아보자, 아까 봤던 커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점장님, 아까 온 두 사람 중에 여자 쪽 말인데…….”
솔직히, 화연을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다.
외모도 눈에 띄었고, 상당한 유명인이니까.
하지만 점장에게 방금 전 왔던 고객들의 정체는 딱히 상관없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요, 채원 씨.”
“네?”
“우리가 맛집이나 뭐 미용실 같은 거 아니잖아요. 어디 전자 상가에서 연예인 누가 컴퓨터 사간 집! 이라고 붙여 봤자 누가 신경 쓰겠어요?”
점장의 말에 채원은 살짝 당황스러워졌다.
“아, 네. 그렇……죠.”
하지만 사회생활을 배운 그였기에, 일단 윗사람의 말이니 고개를 끄덕였다.
“채원 씨는 못 봤겠지만 예전에 국회의원도 보좌관이랑 한번 왔다 갔고, 연예인들도 몇 번 봤어요. 물론 톱스타는 아니고 예능 쪽이었지만.”
점장은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보여 주었다.
“자, 이게 그때 받은 사인들.”
얼핏 봐서 누구인진 잘 모르겠지만, 연예인들이 해준 것 같아 보이는 사인들이 몇 장 보였다.
“물론 단기적인 광고 정도는 되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득보다는 방해가 되는 경우를 봤기 때문에 안 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점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평소처럼 사무실로 돌아갔다.
‘점장님, 전 그냥 방금 같이 온 사람이 애인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었는데요…….’
하지만 점장의 말도 나름의 일리가 있었고, 저 정도의 유명인이라면 기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어 채원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퇴근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