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12)
집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역시나 휴대폰은 없었던 영의의 자취방.
“생각해 보니, 입학식 전날엔 부모님 집에서 잤었지.”
그리고 자신이 휴대폰을 두고 갈 리도 없었을 것 같았다.
“하아, 새로 사야 하나?”
그나마 안심인 점은 지갑을 까먹고 안 가져간 탓에 카드만큼은 자취방에 있었다는 거다.
영의는 수건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나갈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입구 쪽이 조금 어질러진 것을 보니 사라진 동안 부모님이 다녀가신 듯했다.
“쓰읍, 가능하면 지금 가는 게 낫지 않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 곧바로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지만, 현장에 있는 동생의 조언이 있었기에 참았다.
“그래, 그냥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선물이라도 들고 찾아갈까?”
주말 동안 여행 다녀왔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들어가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보단 그냥 입학식 날에 홀연히 여행을 갔다 왔다고 하는 게 더 괜찮을 것 같은데.
휴대폰은- 음, 하수구에 떨어트려서 잃어버렸다고 하고.
영의는 부모님이 자신의 영상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반쯤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휙, 삐익(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알림아, 넌 어떻게 생각해?”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알림이는 영의에게 약간 애매모호한 답변을 주었다.
“그럼 찬성한단 거지?”
[찬성은 아닙니다. 다만 사용자의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애매하고도 묘하게 중립에 가까운 답변을 돌려주는 알림이.
영의는 알림이의 그 태도에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 그냥 수연이가 하라는 대로 해야겠다.”
이상하게 자신이나 영웅과는 달리 머리가 좋았던 수연.
‘아니, 머리가 좋은 대신 그만큼 몸이 안 좋았던 것 같기도?’
어쩌면 마음의 정리를 하고 오라고 시간을 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 화연이한테 가서 얘기나 좀 하고 오자.”
자세한 내용을 듣진 못했지만, 수연이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자신이 사라지고 가족들과 함께 움직였던 것 같았다.
아마 화연에게서 이야기를 좀 듣고 나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분위기인지도 알 수 있을 테고.
그리고, 지킬 약속도 남아 있었고.
“아직은 주말이지. 아직은.”
영의는 다급히 머리를 말리고는 옷을 챙겨 입고 뇌영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넌 집에 있을래? 아니면 밖에서 놀래?”
뇌영은 영의의 물음에 날개를 펼치고는 작게 울었다.
“꾸륵, 휙(음, 밖이요)!”
“그래, 잘 놀다 오고.”
영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아올라 도시의 상공을 가로지르는 뇌영.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자신에게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은 걸 깨달은 영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알림아, 화연이한테서 온 문자나 그런 거 없어?”
[없습니다. 사용자가 다시 한번 연락해 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알림이는 합리적인 방법을 추천했다.
상대에게서 연락이 안 오면 자신이 연락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냐, 그럼 그냥 길드 건물로 가보지 뭐.”
하지만 영의는 익숙해져 있었고, 그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에 무심코 늘 보던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종종 가던 신화 길드 빌딩으로 향하는 영의의 귓가에 알림이의 작은 조언이 날아들었다.
[사용자는 과감함이 필요 없을 때에도 과감한 게 문제라고 판단합니다.]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움직여서 뭐라도 해보는 게 낫거든. 뭐, 그것 때문에 한번 죽을 뻔했지만.”
그 과감함 때문에 권왕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그 과감함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거나 뭔가를 얻은 적도 많았다.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있는 길일 때엔 꾸준히 가는 게 좋은 거야. 둘 중 하나밖에 없으면 고려를 해봐야겠지만.”
그렇게 이번에도 고민 없이 행동부터 선택한 영의.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의외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 어?”
신화 길드 빌딩 주변에 도착해 하늘이 아닌 땅으로 이동하기로 생각하고 바닥에 내려온 순간, 때마침 어디론가 다급히 달려가던 화연과 마주쳤다.
“음,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갑다고?”
영의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건넸으나, 눈앞에서 갑자기 영의의 실물을 마주하게 된 화연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정확히는 할 말은 많았지만 감정이 그보다 앞섰다.
“흑, 흐윽.”
당황, 분노, 걱정, 그리움, 그리고 안도.
이외에도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눈물로 표출되었다.
“어어?!”
영의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조금 못 보긴 했는데 왜 얼굴 봤다고 울지?
내 패션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내, 내가 뭐 잘못했나?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어떤 여자한테 작업 걸린 게 문제였나?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던 영의는 일단 화연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아 주었다.
“일단 울 거 다 울고 얘기하자. 응?”
눈물이라는 건 한번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원인을 제거하거나 시간이 지나 진정되어야 멈춘다.
영의는 어릴 적 많이 울어도 보았고, 우는 동생을 달래기도 하며 그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기에 화연의 눈물을 받아 주었다.
‘원인은, 정확히는 몰라도 나겠지. 그렇다고 내가 어디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영의와 화연은 길거리에서 끌어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눈물의 원인임을 자각하고 있어 그 미안함에 가만히 마음껏 울도록 놔두는 영의와 그런 영의의 마음을 알기에 더욱 눈물이 나오는 화연.
둘 다 말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쌓인 감정이 해소되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쁜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저 한 커플로 비칠 뿐이었지만.
* * *
우아한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정갈하게 차려입었고, 식사 와중에도 나름의 정돈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으나…….
달그락, 달각.
누군가가 식기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크고 요란하진 않았지만, 듣는 사람의 심기를 충분히 거슬리게 할 정도의 음량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식사에 집중했다.
달각.
그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사춘기도 오지 않았을 것처럼 작은 몸집에 외모도 상당한 수준이었으니 뭐라고 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던 것.
크게 소리 내는 것도 아니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였으니 시끄럽다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가 먹는 걸 방해하기에도 뭔가, 속 좁아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소녀의 눈앞에는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소녀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녀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며 만족스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까지 더해지자, 더더욱 말을 꺼내기가 꺼려졌다.
그렇게 손님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허허, 맛있나 봅니다.”
우물우물.
소녀는 입에 든 음식물을 먹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노인이 말을 걸었기에 그래도 빠르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아, 천천히 먹어도 됩니다.”
끄덕끄덕.
소녀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씹는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아무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눈치를 볼 줄 알았으니 말이다.
꿀꺽.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는 냅킨으로 입을 스윽 닦는 소녀.
“음, 맛있어. 할아버지. 그보다 나한텐 무슨 볼일이야?”
소녀는 파렌하이트와 권왕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프린세스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있는 노인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는 그녀의 상급자였고.
“그저, 단순한 확인 차원에서 온 겁니다. 그런데 한 분이 안 보이는군요?”
노인은 이곳에 오기 전, 파렌하이트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팀원들 중 두 여성이 이곳에서 숙박한다는 사실을 듣고 호텔까지 왔지만, 이곳에서 연락에 응답한 것은 작은 공주님뿐.
“응? 언니는 놀러 갔는데? 요즘 맨날 아침에 가서 밤에 돌아와.”
“어디로 말입니까? 으음, 그러고 보니 그녀의 고향이 이 나라였지요.”
프린세스의 대답에 노인은 수염이 멋들어지게 자란 턱을 매만지며 고민을 시작했다.
‘필요한 전언만 하게 할까? 아니면, 내가 찾아가야 하나?’
이 나라에서의 신분도 확실하고, 작전 후 움직임도 없었으니 걸릴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곧바로 밖으로 나다닌 것이 용감하다고 생각됐다.
“공주님, 그러면 혹시 돌아왔을 때 전언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파렌하이트를 대할 때와는 달리, 프린세스에게는 계속 웃음을 지어 보이며 존대까지 했다.
정말로 손녀를 아끼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노인.
“으음, 미안. 할아버지. 언니는 안 돌아올 거야.”
프린세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남은 음식을 입에 넣었고, 노인은 지금까지 보여 주던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뭐라고?”
“욱.”
노인의 기세가 급변하자 깜짝 놀란 프린세스.
그리고 그 바람에 그녀의 목에 음식이 걸렸다.
탁탁!
목에 음식이 걸렸다는 걸 표현해 주자 노인은 기세를 거두었고, 프린세스는 안정을 되찾고 간신히 음식을 삼킬 수 있었다.
“그게, 언니가 말했거든. 오늘이 마지막 외출일 거라고. 못 찾으면 그냥 다른 지방으로 내려간대…….”
프린세스는 그렇게 말하며 노인의 눈치를 보았고, 노인은 자신이 생각한 쪽의 이유가 아니자 안심했다.
매일 어디론가 사라져서 늦게 돌아온 게 수상했는데, 설마?
“흐음, 전언도 그리 급한 건 아니지만 말을 해두긴 해야 하는데.”
노인이 뭔가 용건이 있는 듯하자 프린세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짐작 가는 장소가 있기는 해.”
프린세스의 말에 노인은 관심을 보였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을 해보려던 찰나, 마침 쓸 만한 정보를 알고 있다니.
“어딥니까?”
“그게, 언니가 돌아올 때마다 똑같은 간식을 사왔어.”
“똑같은 간식?”
노인은 그 말에서 그녀가 매번 같은 장소를 갔다가 왔다고 추측했다.
‘아니면 그렇게 보이기위해 위장을 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평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허술하지 않았을텐데? 아니, 증인이 허술하니 어느정도는 관계가 없었으려나.’
“응. 내용물은 달라도 가게는 똑같았어. 근데 그 간식 가게가 언니랑 같이 갔던 백화점에 있던 곳이야.”
그나마 위치를 특정할만한 단서가 나오자, 노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그 백화점이 어딘지 압니까? 가능하면 그 가게 위치도?”
“어, 그게…… 나는 어딘지 몰라. 그때 백화점 안에서도 길을 잃었어. 대, 대신 건물은 대충 알아!”
위치를 모른다는 말에 노인의 표정이 굳자, 그걸 본 프린세스는 당황하며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작전 본부로 쓴다고 했던 건물 주변에 있어. 내가 걸어서 갔으니까. 그 주변에 있는 큰 백화점을 찾아본다면 그 가게도 금방 찾지 않을까?”
“흐음, 나중에 확인을 받아보도록 하죠. 길치라고는 해도 확연히 눈에 띄는 건물의 외형정도는 기억할 것 아닙니까?”
노인은 그녀의 말에 의지해 곧바로 지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배신, 또는 잠적할 의혹이 드는 인물을 직접 찾아가야 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