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10)
서울. 신화 길드 빌딩.
이제 슬슬 퇴근할 때가 가까운 저녁 시간, 사람이 나올 일만 남은 빌딩에 누군가가 급히 들어갔다.
띵-
입구에 출입증을 대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서오십시오, 정훈님.]
온 힘을 다해 전력질주로 달려온 그는 건물에 들어오자 속도를 늦춰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하아, 진짜.”
발걸음에서도 조급함이 드러났고, 얼굴은 이런저런 상념이 가득한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
“네, 그래요.”
몇몇 직원들과 길드원들이 정훈을 보고는 인사하려 했고, 정훈은 빠르게 그 인사들을 받아 주었다.
엘리베이터에도 다급히 올라타며 타자마자 닫힘 버튼과 층수를 누르는 등, 매우 급박해 보였다.
그리고 그 행동을 지켜본 몇몇 길드원들은 의문을 표시했다.
“부길드장님, 왜 저러시지?”
“뭔가 되게 급한 것 같은데? 아, 멈췄다. 저긴…….”
한 무리의 길드원들이 정훈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던 그때, 뒤에서 한 직원이 다가왔다.
“이제 지부장님이세요.”
“네? 저희 부길드장님 좌천된 거예요?”
서울 지부장도 낮은 위치는 아니지만, 부길드장이란 자리에 비하면 손색이 있으니 보통은 좌천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 길드원은, 정훈의 옛 직위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원래 서울 지부장이셨어요. 신화연 부길드장님이 서울 지부장 한다고 떠넘- 아니, 바꾼 거에 가깝지만.”
길드 빌딩 자체가 직장인 직원과는 달리, 길드원들은 어지간해선 잘 안 오기에 모르는 듯했다.
“뭐, 그리고 그런 걸 굳이 얘기할 이유도 없지만. 사고 쳐서 바뀐 것도 아니고 단순 변심으로 자리 바꾸는 걸 알아봐야 뭐 하겠어요?”
직원의 말에 길드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길드장 하기 싫다고 떠넘긴 이야기는 전파하기엔 조금 그렇지?
“그래도 이제 다시 바꾸는 걸 보니까, 개인 사정은 다 해결된 것 같지만.”
“개인 사정이라고요?”
“뭐, 서류에 써져 있던 사유로는 그렇게 돼있었는데. 아마 대충 써 넣은 거겠죠?”
직원은 그 말을 끝으로 퇴근길에 올랐다.
그 시각, 꼭대기의 길드장실에는 두 명의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처럼 묵직하고 차분했지만 특유의 위압감을 숨길 수 없었던 길드장 영석과 그에 맞서 차가운 눈으로 마주 보는 부길드장 화연.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저 광경을 보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 정훈이 있었다.
“제발,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왜 이러고 계신지부터 설명 좀 해주실래요?”
상대적 약자에 속하는 정훈이 진정의 말을 꺼내자, 둘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좋아.”
화연은 홱 하고 몸을 돌리고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설명은, 아저씨한테 들어.”
그렇게 말하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화연.
영석은 그런 화연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번 주부터 공.식.적.으로 부길드장 자리로 복귀하기로 한 화연이가 복귀를 안 하겠단다.”
그 말에 정훈은 곧바로 화연을 쳐다봤다.
“예? 아니, 갑자기 또 왜요?!”
서울 지부장으로 있다가 갑자기 부길드장이 되었을 때는 나름 좋았다.
월급도 올라가고, 승진이었으니까.
물론 그만큼 업무도 많아져서 옛날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서울 지부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변경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연락이 와서 급히 와보니…….
“아니, 도대체 왭니까? 갑자기 부길드장 업무 하기 싫다는 건 아닐 테고! 단순 변심으로 인한 환불 같은 건 요즘 어디에서도 안 해준다고요!”
“사정이 있어. 개인적이라서 말은 못 하지만.”
화연이 개인적인 사정이란 말을 꺼내자 영석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자세히 좀 얘기해 달라는 거다.”
영석은 과거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고위 각성자다운 위압감을 뿜어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으면 그냥 가족이-라고 말하는 부분까지만 듣고도 허락을 해주겠지만 그저 개인 사정이라고만 하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영의가 실종된 지 대략 3일째가 되어 간다.
내일 오전이 된다면 정확히 사라진 지도 72시간이 되는 상황이 되어 정식으로 실종 신고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단순히 능력을 각성하기 전인 배달부 시절이면 이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실종되었더라도 정체를 바로 밝힐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온 국민의 시선이 아카데미에서 활약했던 의문의 사내에 집중되어 있을 때에는 조금 위험했다.
“그게, 상당히 복잡한 설명이 될 텐데…….”
화연은 혹시나 몰라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고 하였으나 영석은 개의치 않았다.
“상관없어. 길고 상세할수록 좋지.”
‘어쩔 수 없나. 이렇게 된 거, 적당히 거짓말해서 도움을 받는 게 나을지도…….’
화연이 영의의 정체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각색을 하려 했을 때, 그녀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웅-
“…….”
첫 번째엔 침묵했다.
그냥 알림 중에 하나겠지 싶어서 넘겼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우웅-
두 번째에도 울렸지만, 눈길을 잠깐 주려다가 말았다.
아무래도 길드장의 앞이고, 선배에 대해서 어떻게 꾸며 내야 할까 고민을 하며 말을 꺼내려 했으나 다시 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우웅-
세 번째로 울리자, 화연은 진동마저 무음으로 바꾸려 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휴대폰 좀 끌게요.”
하지만 영석은 무음모드로 바꾸려는 화연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니, 그냥 그것부터 해결하고 하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며? 중간중간 맥 끊어지는건 안좋아.”
“네, 확실히 그건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정훈마저 동의하자, 화연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누가 이렇게 급한 연락을 하는 거야?’
혹시나 영의를 찾았다는 연락일까 싶어서 내심 기대감을 안고 수신한 메시지들을 열어 보자, 기대 이상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선배: 나 돌아왔어]
[선배: 걱정 많이 했어?]
[선배: 그리고 미안해. 주말에 시간 내준다고 했는데 주말이 거의 다 지났네.]
그렇게 내용들을 훑어볼 때, 새로운 내용이 또 추가되었다.
[선배: 혹시 지금 시간 되면 만날까? 아직 주말이잖아. 약속은 지킬게.]
화연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영석과 정훈을 바라보았다.
“길드장님, 부길드장이 웃고 있는데요.”
“음,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러지? 재밌는 사진이라도 받았나?”
그리고 화연을 바라보던 둘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저, 할게요.”
“어?”
“네?”
“부길드장 할거라고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며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화연이 갑자기 저렇게 순순히 따르자 당황하는 둘.
“정말?”
화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네, 대신 내일까지만 정훈이가 맡아 달라고 해주세요! 내일 연차도 해주고!”
그리고 협상이나 타협과는 거리가 먼, 거의 통보 내지는 요구에 가깝게 자신의 조건을 내걸었으나 영석은 당황해서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어? 어, 그 정도면…….”
당황했어도 조건을 들어 보니 자신의 재량 내에서 쉽게 처리할 안건인 걸 깨닫자 금방 수용했다.
그리고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자신의 처지가 정해지자 당황하는 정훈.
“네? 아니, 그럼 저는요?”
영석과는 달리 하루이긴 해도 부길드장 역할이 연장된 정훈은 조금 억울했다.
서로 간의 타협이나 의견 제시는 어디 가고, 다짜고짜 하루만 더 하라고?
‘아니, 뭐 못할 건 아니긴 한데! 뭔가 떠넘겨진 느낌이야! 아니, 부길드장 직위도 원래 떠넘겨진게 맞긴 하지만 아무튼!’
하지만 화연은 지금 주말이 1초씩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시간을 지체할만한 변수 같은 게 보이자 과격해졌다.
“시끄러워! 나중에 고기 살게! 그럼 해결됐으니까, 저 가봅니다!”
길드장실의 문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고 나가는 화연.
터억.
그래도 나름 고급진 문이라 그리 큰 소리를 내지 않았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정훈.
“무슨 고기인지나 말해 주지, 나 참. 밥 한 끼로 사람을 하루 부려 먹네.”
그리고 정훈이 반쯤 불평을 표하듯 말한 걸 또 들은 건지, 복도에서 화연이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소고기 사줄게-!”
화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는 정훈.
“드, 들은 건가?”
정훈이 화연의 목소리에 당황하자 영석은 크게 웃었다.
“으하하, 소고기면 이틀은 해줘야지!”
“아니, 길드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화연 선배가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데 덥석 받아들이시면 어떡합니까?”
정훈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대상인 영석에게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정작 그 불만 대상인 화연은 가버리고 없으니, 반쯤 한탄에 가까운 사소한 반항에 가까운 것.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본인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고. 서로 기분 좋게 하면 좋잖아! 너는 고기 얻어먹고. 화연이는…… 음, 아마 애인이겠지?”
영석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메모지에 방금 있었던 일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보자, 화연. 지부장 월요일까지 연장. 연차까지 추가. 그리고 정훈. 화연한테 고기 얻어먹을 예정. 나도 가야겠네.”
영석의 능글맞은 말은 듣지도 못한 듯이, 정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 애인이요? 못 들었는데?!”
화연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한 정훈.
“뭘 그래? 사람이 저렇게 냉랭하게 있다가 갑자기 기분 좋아질 땐 세 개 중에 하나지. 애인이거나, 자기 관심 분야에 변동이 생겼거나, 아니면 갑작스러운 행운이거나. 어쩌면 두 개 이상일지도.”
조금은 이상한 논리에 정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그보다, 화연 선배가 애인을 만들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연예인들이 은근하게 대시해도 까는 사람인데.”
실제로 외모와 그 능력으로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유명한 화연이었기에 종종 방송에도 나갔고, 그 과정에서 연예인들을 만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때 받았던 몇몇 대시를 전부 완강하게 거절했고.
“음, 솔직히 연애란 건 당사자의 일이잖나? 우리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지. 그리고 애인이 아닐 수도 있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배가 온 걸 수도 있고?”
영석은 그렇게 말하며 정훈에게 손짓했다.
“뭐 하나? 어서 가봐야지. 아직은 부길드장이라고?”
“하아, 네. 가야죠. 대신 저도 내일 연, 아니 반차-.”
정훈은 적어도 내일은 늦잠이라도 자고 출근하고 싶었지만 영석은 단호했다.
“안 돼.”
“쩝. 그럼 소고기나 기대해야겠네요.”
정훈이 아쉬움을 가득 안고 길드장실을 나가려 하자, 뒤에서 영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두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해도 돼.”
“……감사합니다.”
달칵.
길드장실의 문이 닫히자, 영석은 작게 뒷말을 이었다.
“그만큼 퇴근도 두 시간 정도 늦겠지만.”
그리고 그때, 영석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음? 이 시간에 누가?”
그리고 영석은 그 전화로 인해, 주말 근무를 더 하게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