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8)
분명히 모든 수련…… 아니, 수업은 들었다.
폭포에서 물을 맞는 것도, 평원에서 쓰러질 때까지 달리는 것도 했다.
절벽에 매달리고, 땅에도 파묻히며 자연과 교감했는데…….
대체 왜?
“어, 으음. 뭐랄까, 미안해. 인간.”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지금, 영의는 숲속의 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교관 겸 숲의 원로인 만렙 토끼 타이가가 있었고, 그의 옆에는 동기가 된 시라가 손 위에 새 한 마리를 얹어 놓고 있었다.
“토끼…… 아니, 영감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딱 보면 아는 거지?
시험을 시작하기 전, 수업을 위해 받은 기한은 일주일.
그중에 6일을 썼는데…… 자연은 갈피도 안 잡혔다.
모든 수업을 제대로 받아 내고 버틴 영의였지만, 자연은 응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매번 탈락하고 중간에 멈췄던 시라는…….
-음, 날아다니는 녀석들이 은근 죽이 잘 맞지?
“와아!”
삐릿-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새 친구를 하나 만들었다.
새로운 친구인 것도 맞지만, 진짜 새였다.
자연과의 소통을 거치고 나면 동물이나 식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며, 나중에 시험을 거쳐 평생의 파트너가 된다는 게 타이가의 설명이었는데…….
“아니, 난 왜 아직 안 된 거지?”
타이가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랐고, 뭐가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지긴 했다.
그런데, 성공은 쟤가 했고 나는 뭐가 남은 거지?
물론 내가 손해를 보거나 할 건 없다.
여기서 치료를 받은 것만으로도 여기 온 목적은 충분히 완수했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도 않는다.
거의 억지에 가까웠던 그의 체류와 요구를 내기에 가깝게 응해 준 건 이유를 모르겠지만 상당한 행운이었다.
머리로는 손해 볼 것도 없고 오히려 내가 좀 악당 같은 쪽인 상황인데…….
“후우…….”
영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랄까, 가게에서 물건을 샀는데 사은품이 있대서 갔더니 사은품 재고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랄까.
영의가 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그의 앞으로 시라가 다가왔다.
“미, 미안하다니까?!”
“미안? 뭐가?”
영의는 그저 갑자기 느닷없이 받은 사과에 의아해져서 물은 것이지만, 시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으음…… 그게, 뭐가 있지…….”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하나의 결론을 낸 듯 입을 여는 시라.
“어, 음. 수업받을 때 방해한 거?”
“방해 같은 건 받은 적이 없는데.”
영의는 지금 시라가 그에게 뭔가 죄책감? 아니, 어쩌면 빚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 안 되면 그게 내 팔자에 없었던 거겠지.”
영의는 시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어? 어. 응.”
‘그래, 마법도 내 팔자엔 없었고. 각성자의 재능도 뭐…… 조금은 있었지. 근데 다른 게 있으니까…….’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잃었을 때 닥친 상황도 아니고 걸린 조건이라고는 알림이의 것 하나가 전부였다.
‘그냥 무림에 있는 어르신들한테 배달 좀 더 자주 가면 되는 거지.’
갈 때마다 초식을 하나씩 배워 오고 있었으니 조금만 더 가보면 쓸 만한 기술도 더 얻을 수 있으리라.
영의는 시라를 지나쳐서 수업을 들을 때 자주 가던 폭포 앞으로 갔다.
콰과과과과-
위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숲속이었지만, 폭포 주변은 트여 있었기에 달빛이 비쳐 주위가 밝았다.
“후우…….”
영의는 세차게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마음속에 있는 황야의 바람이다?
“아, 타이가…… 아니지. 어차피 갈 때 다 됐으니 토끼 영감이라 부르죠.”
7일 중에 6일째 밤이었음에도 뭐 하나 되는 게 없었으니, 영의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를 지도해 주던 타이가도 반은 농담 삼아, 반은 약간의 악의를 담아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군. 벌써 포기한 거 같아 보인다?
“그렇죠. 갈피도 잡히는 게 없고…… 시라가 하는 걸 보니 지금까지 해온 건 뭐가 되나 싶고.”
시라는 비약적인 신체 능력의 발전을 보여 주었다.
정확히는 체력의 발전이었지만.
-음…… 숲의 과일을 먹어 봤겠지?
타이가는 갑작스럽게 과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에서 깨어난 이후, 영의는 뇌영이 잡아 오는 몇몇 동물들과 숲속을 거닐다 보면 독은 없는 듯 먹은 흔적이 보이던 과일들을 먹어 왔다.
“먹어 봤죠. 엄청 맛있진 않아도, 먹을 만은 하던데.”
현대에서 맛과 상품성을 위해 개량과 연구를 거친 과일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숲의 과일들은 제법 맛있었다.
-그렇지, 젊은 놈들은 모르겠지만 그 과일들 중에서 정말 달고 맛있는 게 있다?
뭐지? 이별 선물로 과일이라도 하나 챙겨 주려고 하는 건가?
영의는 근성이 최고라는 말을 외치면서 혹독한 훈련을 시키던 토끼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자연과의 소통이라는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뭐, 그렇죠. 자연과 하나 되니, 소통이니 하는 게 뭘 말하는 건지.”
-자연과의 소통은 언젠간 되는 법이다? 물론 보통은 죽을 때지만?
영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냥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죽기 직전에 가야 깨닫는 거였어?!’
극한 상황에서 무의식중에 깨달으란 게 아니었단 건가.
-뭐, 내가 성격이 이래서 격려니 뭐니 하진 못한다? 하지만, 한마디만 하겠다?
타이가는 옆으로 돌아서 숲속으로 사라지며 한마디를 남겼다.
-거센 비바람을 거쳐야 비로소 과일이 달아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과일나무는 수호자 녀석한테 물어봐라?
“한마디는, 아니지 않나?”
영의는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였으나, 머릿속만큼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 죽기 직전…….’
그 자리에서 사람은 죽을 때 과연 어떻게 될까……를 고찰하기 시작했다.
‘죽을 때라……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사람이 죽을 때는 어떨까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영의.
마지막 순간에는, 어땠더라?
지난번에 아카데미에서 싸웠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적이 있었고, 죽기 직전의 순간에는 너무 고통이 심했고 상황이 급박해 그런 걸 생각조차 못 했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알림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의식을 금방 잃어 시간도 짧았고.
“흐음…….”
영의는 폭포 소리도 아랑곳 않고 죽음에 대해 집중과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소리는 거꾸로 말하면 그 전까진 자연이 아니란 소리인데?
죽는 과정의 일부 중에 자연이 된다는 건가?
아니, 그렇다면 죽어서 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건 맞는데.
시체가 되는 것과 죽기 직전의 상황, 그 두 개 사이에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
잘 한번 생각해 보면 아마 영혼이 빠져나간다거나, 죽을 때 순간적으로…….
“뭐 하고 있어?”
죽을 때 순간적으로 뭘 하는 걸까……. 응?
고민 중에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영의.
이 숲속에서 그에게 말을 걸 상대라고는 타이가 아니면 시라뿐이었다.
“뭐야, 시라잖아.”
시라는 어깨 위에 그녀의 새 친구를 얹고 영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인간 네가 울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와봤는데, 아니네. 뭐 네가 그럴 성격이 아닌 건 알지만.”
영의는 소통 이후 부쩍 바뀐 시라의 말버릇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시라는 시라고, 자신은 자신대로 위치가 다르니까.
“마침 잘됐네. 널 찾아가려고도 했는데.”
“뭐, 뭐가? 왜?”
시라는 당황하여 한 발짝 물러섰다.
“묻고 싶은 게 조금 있어서 그래.”
“나한테 뭘 묻고 싶은데?”
시라는 시선을 똑바로 두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영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영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타이가의 수행 동안, 죽을 뻔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아, 그때 뭐 이상한 걸 본 적이 있다거나?”
그녀의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당장 사람이 죽을 뻔했을 그 당시의 심정이 어땠냐고 묻는 것도 무례한 일이었지만, 영의는 조바심과 새로운 발견의 흥분 탓에 그걸 자각하지 못했다.
“야 이 인간아-!”
시라는 분노와 짜증을 가득 담은 주먹을 날렸다.
* * *
남해의 해상.
새벽에 낚시를 나서는 낚싯배들은 제법 많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조명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조명도 없이 엔진음만을 울리며 나아가는 배가 한 척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공해로군.”
배의 선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갑판에 있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전해 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낚시에 쓰는 작은 배이니만큼, 갑판이니 선실이니 구분 짓는 게 민망할 정도지만 그래도 그는 배에 애정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공해입니다.”
선장은 낚시꾼 차림의 한 남자와, 바닥에서 큰 모포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덩치 큰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음, 그렇다고 하네? 슬슬 일어나지? 몸도 다 나았을 텐데.”
중년의 얼굴에 적당히 살집 있는 몸을 가진 낚시꾼 차림의 남자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써서 주말에 새벽 낚시를 나온 회사원처럼 보였다.
“시끄럽다. 영감이 보내지만 않았어도 넌 여기서 물고기 밥이 됐을 텐데.”
그리고 모포를 뒤집어쓴 덩치 큰 사내는 낚시꾼 차림의 남자에게 위협적인 어조로 말을 했지만, 남자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유감이네, 나도 그걸 알아서 이러는 거라.”
두 남자는 친밀감이나 유대감은 하나도 없는 태도와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고, 그 분위기에 선장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는 척했다.
“크흠, 다른 배가 있을 만도 한데…….”
그러던 그때, 정말로 그의 시야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의문의 배 한 척이 보였다.
‘뭐지? 오늘 여기로 나올 배는 없었을 텐데…….’
가끔 배를 전세 내고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늘 새벽에는 아무도 못 나오도록 그가 조치를 취해 두었다.
‘자! 내일 아침에 다같이 모여서 축구나 한판 하러 가자고! 어차피 영업도 잘 안되는데! 심심하지라도 말아야지!’
그리고 그의 제안에 모든 선주들의 대답을 들었건만, 저기에 있는 배는 뭐지? 중국 어선인가?
그렇게 의문에 빠져 있을 때 저쪽 배에서도 이 배를 발견한 건지, 속도를 높여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저기, 선생님. 혹시 저쪽 배에 대해 뭐 아시는 거 있으십니까?”
선장은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뒤가 구린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배를 가진 사람은 많고, 무엇보다 승객이 너무 특징적인 외모를 지녔기에 누군지도 짐작이 갔는데.
각성자, 그것도 엄청난 힘을 지닌 범죄자를 상대로 민간인인 그가 뒷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새벽에, 눈에 띄지 않고 공해까지 나온다면 십중팔구는…….
‘밀항이지.’
“네, 딱 맞춰 왔군요.”
낚시꾼 차림의 남자는 아까 덩치 큰 사내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선장에게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정체불명의 배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다가 급격히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부드럽게 양쪽 배를 밀착시켰다.
‘뭐지?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항구에 정박할때도 파도로 인해 배가 부딪힐 수 있기에, 배의 테두리부분에 타이어를 덧대며 충격을 방지한다.
그리고 이런 바다 한복판에서 저렇게 거리를 잘 재면서 배를 붙이다니.
선장은 상당한 프로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호기심으로라도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면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남해 인근의 바다에서, 권왕은 한국을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