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6)
무대륙, 대산의 깊은 곳.
독고휘가 기거하는 동굴의 앞에서 팽소운과 독고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님. 진짜 가시려우?”
“그래…… 그래도, 집이니까. 한 번은 가야겠지.”
독고휘는 동굴 안에 있던 몇몇 짐들은 놔두고, 중요한 몇 가지만 챙기고 있었다.
“꼴 보기 싫다고 집을 나온 인간이 다시 들어간다니.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수?”
“너처럼 뒷일은 나 몰라라 하고 집안을 팽개치고 나오진 않았다. 이미 은퇴한 뒷방 늙은이였는데도 자꾸 나한테 기대를 보내니 나온 거지.”
팽소운처럼 아직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위치에서 집을 나와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미 가주니 뭐니 다 물려주고 평화롭고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나온 것이었다.
물론, 유유자적도 썩 평화롭지는 못했지만.
‘뭐 가르쳐 주는 게 없을까 기웃거리던 어린 제자 놈들과, 하나라도 얻어내 보겠다고 허구한 날 뭘 대접하려던 며느리들, 아직도 아버지 눈치 보느라 자기 마음대로 일 못 하던 자식 놈들…….’
지금 생각해 보면 싸던 짐도 풀고 다시 은거해야 할까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이미 한번 세상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고, 비무대회가 열릴 때 영의를 자신의 제자라고 공표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의는 싫다고 했지만…… 그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공표하면 낙장불입인 것이다.
“허어…… 집안에 아주 큰 폭풍이 몰아치겠구만.”
팽소운은 독고휘가 과연 자신의 집이자 문파인 뇌섬문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폭풍이라니? 음, 조금은 있을 것도 같지만.”
“아니, 형님. 생각을 해보시우. 집 나갔던 개파조사가 갑자기 절대지경이 되어서 돌아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수? 나머진 차치하고서라도.”
팽소운은 절대고수가 되어서 강호에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문젯거리인데, 자기 본문으로 돌아가면 더더욱 난리가 날 거라고 이야기했다.
“절대지경? 내가?”
하지만 독고휘는 다른 것도 아니라 절대지경이란 말에 의문을 표했다.
“아니우?”
“내가 현경을 넘어서긴 했지만…… 절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럼, 형님의 경지가 뭐란 말이우?”
팽소운의 말에 독고휘는 짐을 싸다가 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깨달음을 얻어 반로환동을 했지만, 새로운 경지에 오른 것 같지는 않다.”
“그게 무슨 소리…….”
분명히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또 반로환동까지 했지만 경지가 오른 게 아니라고?
“옛 무당의 조사 장삼봉이나 달마대사는 절대지경이라는 자연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지. 그 경지에 대해서 아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모든 힘을 쓰는 걸 본 이가 없으니.”
“그건 나도 알고 있수. 그래서 현경의 위 어딘가라고 생각만 할 뿐이지.”
그래서 현경의 바로 위가 자연경이 아닐까라고 생각은 했다.
물론, 거기 가보질 못했으니 어떤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나는 깨달음을 얻으며 자연경에 대한 아주 약간의 편린을 보았다.”
“뭐, 뭐……?”
아주 약간이나마 편린을 봤다니, 그럼 그것만 따라가면 곧 자연경에 이른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그걸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하아…… 지금의 나는 불가능해.”
독고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어째서? 단초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편린이나마 봤다면 그걸 따라가면 되지 않수?”
당장 초절정을 넘어 화경, 현경에까지 이르러 봤던 팽소운이기에 알고 있었다.
아무런 실마리 없이 깨달음을 얻는 것과 그나마 조금이라도 다음 경지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걸.
보통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상승무공을 원하는 것이다.
상승무공은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그다음을 위한 길이나 방향성이 어느 정도 있으니까.
그 무공에만 집중해서 잘 따라가면 초절정까진 어렵지 않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재능과 오성이 받쳐 줘야겠지만.
독고휘는 팽소운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이, 자신의 정신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무슨……?”
느닷없이 인간이 정신만으로 자살이 되겠냐고 묻는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팽소운.
“그게 다음 경지로 가는 실마리였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 내고, 이내 자신의 정신마저 비우는……. 그래, 명상으로 죽음까지 가야만 하는 거겠지.”
팽소운은 독고휘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자연경으로 가는 방법이…… 명상을 하면서 모든 걸 비우고, 목숨까지 비워 내는 거라고? 잘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 아닌가?
“그래, 못 믿겠지. 하지만 모든 걸 비워 내며 깨달음을 얻을 때 잠깐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비워 내 나 자신을 자연과 하나로 만들면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 있겠다고.”
“그거…… 확실하긴 한 거, 맞수?”
“나도 모르지.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한다. 몸의 내공과 마음만을 비웠음에도 성취가 있었으니.”
팽소운은 독고휘가 방금 한 말에 뭔가 단서를 잡았다.
“잠깐, 비운다고? 그게 비법이우?”
“그래, 그렇긴 한데…… 조금 모자란 것 같구나. 너는 영감을 더 얻어야겠다. 그건 의식 중에 되는 게 아니다.”
팽소운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가부좌를 틀려 했으나, 독고휘의 말에 멈추었다.
“아니, 뭔가 느낌이 왔는데!”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 약간의 성취는 있을지 몰라도, 깨달음까진 못 얻을 거야.”
“나 참, 이렇게 복잡해서야……. 화경까진 어렵지 않았는데.”
팽소운은 투덜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독고휘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 근데 만약 자연과 하나가 된다면 그땐 어떨 것 같수?”
“글쎄…… 일단, 내공의 제한이 없어지겠지. 자연지기와 몸이 다를 바가 없으니 자연지기를 그대로 끌어 쓸 테고. 수명도 큰 의미가 없지 않아질까 싶군.”
“그러니까, 불로하며 내공도 무한해진다?”
“아마도. 그리고 몸의 상처도 치명적이지 않으면 금방 나을 것이다. 자연의 무한한 기를 때려 부으면 상처도 지혈되고 회복하겠지.”
“그것참, 불합리하네…….”
팽소운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 자연경의 무인이 있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건가?
“그런 만큼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니까. 자, 너도 집에 가는 김에 같이 가자.”
“으음…… 알겠수. 나도 반응이 궁금하니까.”
검황 독고휘와 권왕 팽소운. 귀향을 위해 하산 결정.
천하제일 비무대회까지 남은 시간, 한 달 반.
그리고 그곳과는 다른 차원, 울창한 숲속에서는…….
콰과과과과-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
물의 특성상 내려올 때도 각자 흩어져 방울지는 게 있는가 하면, 차마 흩어지지 못하고 중앙에서 줄기를 이룬 물도 있었다.
방울진 것은 맞아도 별 아픔이 없지만 줄기는 충분히 사람을 휘청거리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물줄기의 아래.
드드드드득-
물을 몸으로 맞아 내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애송이! 근성으로 버텨라! 그리고 물의 흐름에 순응하는 거다?
“그건, 크윽. 알겠는데…… 이게 자연을 이해하는 거랑 무슨 관계가……. 크윽!”
물을 맞고 있던 것은 영의.
자연의 시험이니 뭐니 하면서 일단은 교육을 받기로 했다.
뭐 배운 게 있어야 시험을 치는 거니까.
그런데…….
‘이런 옛날 수련 방식 같은 걸 그대로 시킬 줄은 몰랐지!’
물론 그도 폭포 수련을 해본 적은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네 옆을 봐라! 아무런 불평 없이 묵묵하게 버티고 있잖아! 근성의 문제다?
“우윽…… 으으윽…….”
영의의 옆, 물줄기의 중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양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이를 악물고 서 있는 엘프…… 아니, 숲 요정 여인이 있었다.
“얘는 말을 그냥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할 수 있……. 꺄악?!”
영의의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뭐라고 따지려 들던 숲 요정 시라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풍덩!
-하아…… 근성은 영원해도, 단명하는 육체가 문제로구나. 체중이 물을 못 버텼다?
이내 그들을 지도란 명목 아래 구경하던 토끼가 물로 뛰어들어 시라를 꺼냈다.
앙증맞은 토끼의 앞발에 옷깃을 잡혀 물 밖으로 끌려 나오는 시라.
-그래도 걱정 마라, 이 타이가 님의 지도를 받는다면 절대 떨어지지 않으니까?
“쿠흡.”
토끼의 이름이 타이가라니. 이름과 겉모습에서 오는 부조화에 영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케흑, 컥…… 죄송합니다…….”
시라는 지도에 제대로 못 따라간 것에 사과하려는 듯, 죄송하다는 말을 꺼냈다.
-거꾸로 말하면, 붙을 때까지 가르친다는 거다?
“죄, 죄송합니다아아…….”
그리고 이번에는, 살려 달라는 건지 잘못을 비는 듯한 어조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드드드드득.
‘하아, 그냥 늑대한테 갈걸.’
시라와 마주치고 시험에 대한 내기에 응했던 그날, 조금 더 길게 생각해 볼 걸 하고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후욱. 그럼, 누구를 택하겠나?
“음? 네?”
-후욱. 시험을 보기 전에 가르침은 받아야지. 우리 중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겠나?
멧돼지는 그렇게 말하며 옆을 스윽 둘러보았다.
바닥에 앉아 있는 늑대와 바닥에 처박혀 있는 호랑이, 그리고 그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토끼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멧돼지.
“그러니까…… 이 네 마ㄹ…… 아니, 네 분들이 절 가르친다고요?”
영의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수호자 쪽을 보았다.
“시험은 정당해야 한단다. 7번의 낮과 밤 동안 가르침을 받고, 시험을 치르렴.”
“……아니, 그보다 저 말투는 왜 저런 거지?”
영의는 인내심이 극에 달한 건지,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의문을 내뱉고 말았다.
-저 녀석을 키울 때 혹시 모른다고 말을 가르친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 말버릇이 저랬다?
“으음, 그러면 뭐…….”
그것만 보고 배웠다니 뭐라 할 말이 없어진 영의.
그래, 숲속에서만 사는데 말이라도 할 줄 아는 게 오히려 다행인 거지.
저 동물들도 사람 머릿속으로 말 거는데 뭐.
‘그랬었구나…….’
그리고 의외의 사실에 놀라는 시라.
수호자님이 자애롭거나 한 게 아니라 말버릇이 저랬던 거였구나…….
-후욱. 그러면 빨리 골라 보거라. 시험에 원로들이 나서는 건 전통이었으니.
-아니 글쎄 난 귀찮다고?
영의는 슬쩍 견적을 내보았다.
늑대는 아까 말하는 걸 보니 제법 정중하고 각이 잡혀 있었고…….
멧돼진 말할 때마다 앞에 후욱거리는 게 신경 쓰이긴 해도 상식인인 것 같다.
호랑이는, 음…… 뭐라 못 하겠다.
그리고 토끼…… 가장 오래된 원로라고 했지?
“전 토끼……라고 해도 되나? 토끼님으로 하겠습니다.”
-뭐? 나? 귀찮은데? 수호자 시켜?
-후욱. 전통을 지켜야 하니 협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수호자를 시키면…… 아마 제대로 가르칠지부터가 의문입니다만.
늑대가 조심스럽게 문제점에 대해 언급했다.
과연 수호자한테 교육을 맡기면…… 제대로 가르치기나 할까?
-아씨, 그렇네? 근데 그럼 네가 하면 되잖아?
-크흠, 저는 이미 가르칠 아이들이 많아서…….
“네? 진짜요? 이번에 기대하고 왔는데…….”
늑대 원로가 가르치는 건 인기가 좋은지, 시라는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아, 진짜……. 야, 인간. 내가 가르치는 건 효과는 확실하지만 빡세다?
토끼 원로는 자신의 머리에도 겨우 닿는 앞발로 머리를 박박 긁더니, 영의를 바라보았다.
“오, 더 좋은데? 머리 쓰는 거만 아니면 뭐든 자신 있지.”
-아, 그래. 거기 시라였나 실이었나 너?
“네, 네?”
갑자기 시라를 가리키는 토끼 원로.
-너도 들어와라?
“네?! 저도요? 왜…… 저를?”
-그냥. 일단 행동하고 보는 그 결단력이 마음에 든다?
“네??”
그렇게 수강생 두 명으로 시작한 토끼 원로의 수업은, 시라에게 상당한 악몽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