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5)
울창한 숲속 공터.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천장은 존재했지만, 그 바닥부분은 뿌리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쉬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상당히 좋은 여건에 많은 동물들이 오간 듯 풀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흙바닥만이 보이는 이 작은 숲속의 쉼터에 여러 동물들이 모여 있었다.
작고 귀여운 코와 귀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토끼에서부터 경차만 한 멧돼지, 대형 소파만 한 호랑이와 늑대까지.
먹잇감과 사냥꾼 관계인 그들이 어째서 한자리에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눈앞의 한 사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로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후욱, 다들 오랜만에 모이는군그래?
콧김을 내뿜으며 말하는 멧돼지.
-그렇군. 근데 이 늙은이들은 왜 부른 거지?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어르신들.”
네 동물들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는 남자.
-크릉…… 수호자 직위는 넘겨준 지 오래인데?
-손주…… 아니, 까마득한 자손들 풀 뜯어 먹는 재롱 보면서 즐길 나이에 다시 부르나?
네 동물들은 자신들을 부를 이유가 없는데 부름을 받았다는 듯, 마치 말년 병장같은 귀찮음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잃은 영의.
‘동물들이 말을 하네? 게다가 토끼와 호랑이가 공존을 하고. 그것도 육성이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는데? 초능력 뭐 그런 건가?’
영의가 넋을 잃고 이 광경을 보고 있을 때, 남자와 네 동물들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시험의 때가 와서 그렇습니다.”
-후욱. 아, 벌써 그럴 때인가? 그럼 부를 만하군.
-크릉…… 하긴, 옛날엔 우리 넷이 나눠서 한 걸 혼자 하려면 힘들 법도 하지.
귀찮다는 태도를 보이던 동물들은 남자…… 즉, 수호자가 한 말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제법 중요한 듯했지만…… 단 한 동물은 여전히 귀찮다는 태도를 보였다.
-난 귀찮은데?
놀랍게도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넷 중 가장 덩치가 작은 토끼.
한 명만이 그렇게 불성실하면 타박을 받거나 눈치라도 보일 텐데, 놀랍게도 나머지 세 동물들과 수호자는 침묵을 유지했다.
-크릉…… 아무리 원로라도 그렇지, 신성한 시험의 때에 이 무슨!
그중 가장 성질이 급했던 호랑이가 토끼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무언가가 크게 충돌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영의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장면을 기대했다.
틀림없이 심상찮은 힘을 지닌 동물들일 테고, 적어도 호랑이의 돌진을 막고 있거나 피했을 거라 생각하며 토끼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크르윽…… 역시, 원로인가…….
-애송아, 난 네가 어미젖을 떼기도 전부터 이곳의 원로였단다?
놀랍게도 돌진하던 호랑이가 그대로 수직으로 내려앉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고, 그 머리 위에 토끼가 가볍게 앉아 있었다.
체급 차나 자연의 순리를 대놓고 거부하는 장면을 보며 감탄까지 할 뻔했던 그때, 수호자가 말을 이어 나갔다.
“눈앞의 이 인간에 대해선…… 알고 계시겠죠.”
-후욱. 그럼, 얼마 전에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 아닌가.
멧돼지는 그래도 뭔가 알고 있는 바가 있는지 금방 대답했다.
-새로이 들어온 신입의 부모라고 하더군. 뭐, 어지간해선 안 믿지만…… 그만큼 믿고 따르니 일단 놔두고는 있었지?
토끼는 호랑이의 머리 위에서 제법 상세한 정보를 읊어 주었다.
그리고 뇌영이 없었다면 가만히 놔두진 않았을 거란 경고도 함께 하면서.
-신입의 부탁으로 죽어 가던 걸 살려 놓고 밖으로 쫓아내려 했지만, 계속 여기에 들러붙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소통도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요.
호랑이는 아직도 토끼에게 제압당해 있어 말을 할 형편이 안 되었고, 수호자와 함께 다니는 일이 잦은 늑대가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후욱. 인간이 시험을? 불가능할 텐데?
-오, 재밌네. 한번 해보라고 해. 절대 못할 것 같긴 하다만?
멧돼지와 토끼의 말을 듣고, 영의는 무언가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다고 직감했다.
늑대 쪽이 자연과의 소통을 언급했고, 그다음에 그걸 시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시험을 통과하면 자연과 소통이 가능해지거나…… 아니면 자연과의 소통을 하는 게 시험의 조건인 건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질 않던 단서가 조금, 보인 것만 같았다.
“인간,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다시 설명해 주마. 네가 줄기차게 가르쳐 달라고 하고, 널 치유했던 것은 자연의 힘의 일부란다.”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말투였지만, 그래도 중요한 내용인 듯하니 귀담아들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치유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의 힘을 빌리면 그것을 더욱 키울 수 있단다. 인간, 이것을 원하는 게 맞니?”
약간 적대적인 목소리와 눈빛을 했지만 어른들이 아이에게 조곤조곤 말하는 말투로 하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단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웃음을 참기는 했는데…….
그보다, 이걸 왜 갑자기 말해 주는 거지? 내가 포기하고 집에 갈 때까지 무시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늑대의 울음소리로 위치를 알린 것도 그렇고, 자신을 쫓아내지 않고 옆에 둔 것도 조금 의심스러웠다.
불친절하고 배척하려던 태도를 보이던 수호자가…… 갑자기 친절해진다?
하지만 그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숲의 원로들을 불러오고, 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뭔가 눈치챈 토끼가 입을 열었다.
-아하, 대충 알겠군. 시험을 조건으로 걸고 실패하면 자격이 없다고 내쫓고, 성공하면 그것대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과연 원로라는 직함은 허투루 단 게 아닌지, 토끼가 눈치 빠르게 수호자의 의도를 알았다.
“……맞습니다.”
영의도 그 말을 모두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 뭐.”
‘어차피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느니 이렇게 도박이라도 걸어 보는 게…….’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숲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수호자님!”
-응?
-또 있었나?
-저, 이쯤 하면 이제 내려오실 때도……. 아니, 아닙니다.
느닷없이 난입한 누군가를 돌아보는 숲의 원로들.
수호자와 영의도 고개를 돌려 난입자를 쳐다보았다.
급하게 달려온 듯 망토의 앞섶이 벌어져 있고, 몸 여기저기에 나뭇잎과 흙이 흔적이 보였다.
피부에 상처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길이가 긴 바지와 상의를 입었고, 여기에 활동성과 보호를 겸한 관절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몸에도 가볍지만 튼튼해 보이는 경갑을 입고 있었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파우치들이 여럿 있는 것이 마치 여행자 같았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겉모습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탓인지, 아니면 달릴 때 방해가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망토의 후드를 젖히고 있었기에 얼굴이 드러나 보였다.
백색에 가깝게 탈색된 머리카락과 수려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뾰족하고 긴 귀.
마치 반지 하나 녹이겠다고 세상 저편 화산까지 찾아가는 영화에서 본…….
“엘프?”
영의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고, 그 말에 눈앞의 엘프로 의심되는 이는 크게 소리쳤다.
“아니야!”
엘프라고 불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지, 눈앞의 음…… 여자애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세계면 명칭도 다르겠지……. 응?
엘프란 말에 반응한 걸 보면 일단 그런 단어가 있긴 하다는 거 아닌가?
아니라고 소리친 반응에 잠깐 고민에 빠진 영의와는 달리, 의문스러움을 곧바로 드러내는 동물들.
-후욱. 아니었나?
-아니야?
“아니라고요! 전 엘프가 아니라 숲 요정족, 필리의 딸 시라입니다!”
자신들은 엘프가 아니라 숲 요정이라고 소리 지르며 주장하는 엘프…… 아니, 숲 요정 여자 시라.
-내 기억상엔 숲의 아이들은 엘프라고 불렸는데?
-후욱.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어지간해선 잘 못 보고 마주쳐도 굳이 그렇게 부를 이유가 없으니.
토끼와 멧돼지가 서로 의견을 나누어 봤지만, 둘 다 별로 그쪽의 식견은 없는 듯했다.
-너는 자주 보지 않나?
그러다 문득 생각났는지 늑대에게 물어보는 토끼.
-아, 뭐…… 저도 자주 보는 애들만 봐서. 이름으로 부릅니다만.
-우리 중에 대외 활동은 제일 많은 주제에, 별 쓸모는 없네, 쯧?
토끼는 특유의 말버릇인지는 몰라도, 말끝마다 의문형으로 문장을 끝냈다.
그리고 각자 떠드느라 바쁜 동물 원로들을 뒤로한 채, 숲의 수호자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시험의 때는 멀었을 텐데, 왜 여기로 온 건지 물어도 되겠니? 나는 그게 궁금하단다.”
수호자의 말에, 시라는 당황했다.
“어, 어어…… 그게…….”
침입자로 보이는 인간을 발견해서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라고 해야 하는데…… 침입자치고는 너무 태연하게 있는데?
“할 말이 없다면, 돌아가서 시험의 때를 기다려라.”
수호자가 그렇게 말하고 시라를 돌려보내려 할 때, 그녀는 다급히 소리쳤다.
“인간이! 인간이 있으니까 그렇죠! 명백히 침입자라고요! 쫓아내야…….”
시라가 목소리를 높여 다급히 소리쳐 봤지만, 수호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후욱. 그러고 보니 맞네. 보통은 쫓아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좋은 의도따위 없는 인간들이었지.
-흐음. 그렇게 쫓아내다보니 수호자 쟤도 인간을 싫어하게 되어서 저 녀석도 쫓아내고도 남았을텐데?
토끼가 짤막한 앞발로 영의를 가리키며 말했으나, 수호자와 붙어다니던 늑대가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며 작게 말했다.
-크흠, 그게…… 쫓아내도 하늘을 날아서 돌아오는지라…….
사실, 영의가 저렇게 귀찮게 구는데도 수호자가 가만히 놔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늑대의 말마따나 서로가 서로를 못 쫓아갔기 때문이다.
영의는 특유의 재빠른 기동성과 공중으로 도주하는 방식으로 수호자를 따돌렸고, 수호자는 숲에 대한 익숙함과 특유의 감각으로 영의의 추적을 뿌리쳤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못 잡으니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오늘, 수호자가 반쯤 항복을 하고 마지막 수를 던진 것이다.
“맞다! 그리고 인간이면서 하늘도 난다고요! 그것도 엄청 빠르게!”
시라는 아직도 소리치고 있었고, 이에 수호자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이러고 있는 거란다. 인간이 시험을 통과하든 못하든, 이곳을 떠나게 될 거란다.”
수호자의 말에 시라는 의문을 표했다.
“인간이 어떻게요? 저희들도 몇 번씩 다시 배워가며 시도하는데……?”
그리고 영의는 그 말을 들으며 뭔가 잘못되어 감을 직감했다.
‘아, 잠깐만. 설마 내가 위험한 거에 도박을 걸었나?’
영의는 뒷목을 싸하게 스쳐 지나가는 불길함을 감지했다.
‘이, 일단 생각 좀 해보고 하겠다고 할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었고,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