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1)
날이 맑았던 어느 날, 남자는 기분이 좋은 상태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가 향하는 곳은 여러 명의 남녀가 웃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곳.
‘잠깐, 여긴……!’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려 했지만,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몸을 움직이려 해도 누군가 조종하듯 이미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자, 모두들 주목!”
그들 앞에 다가가서 서류가 든 파일철을 툭 하고 치며 주의를 끄는 남자.
‘아…… 안 돼…….’
남자는 이내 눈을 감고 모든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소리가 명확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 다 된 것 같군. 혹시 질문이나 불안한 점이나 기타 요청 사항?”
-걱정 마십쇼, 대장님. 저흰 언제나 살았으니까…….
-이번에도 별문제 없이 진행되겠지. 그보다, 다녀와서 뭐 할지나…….
‘으윽…… 안 돼…….’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젓던 도중, 눈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대장, 아니 대장님……. 아, 아니에요.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말해 봐. 넌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대장님…… 그게……. 삐리리리릭.
무언가 말하려던 여자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헉…….”
-삐리리리릭.
악몽을 꾼 건지, 아니면 방금 전 꿈은 악몽 중의 하나였던 건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는 한 남자.
그리고 남자의 침대 옆에 있는 전화기에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원망하는 눈과 흥미로운 눈을 동시에 한 채 전화기를 쳐다보다 이내 수화기를 들어 받는 남자.
“흐음?”
-Ah, Mr. Hou. we're so sorry but(아, 호 씨.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남자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인지, 수화기에서 영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남자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아, 괜찮습니다. 한국말로 해도.”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막 깨어나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는 게 어렵지 않은 그였다.
그래서 빠르게 친절한 사업가의 모습을 연기하기 시작하는 남자.
-……감사합니다, 호 고객님. 사실 저희 호텔 측에서는 고객님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연락을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만…… 고객님의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이요?”
-네. 고객님의 이름과 방문 목적, 그리고 객실 정보까지 알고 계셨는데……. 혹시, 지인이십니까?
남자는 그 말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맞습니다. 객실로 보내 주셔도 됩니다.”
남자는 다급히 방을 살피며 어딘가 문제 될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금 어질러진 옷 가방, 구겨진 시트와 침대, 켜져 있지만 소리는 꺼진 TV…….
-아, 지금 손님께서는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셨습니다. 메시지만 전하라고 하셔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친절한 직원분.”
-네,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남자는 수화기를 내려 두고는 빠르게 씻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이곳은 서울 부근의 한 5성급 호텔.
앞으로는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였고, 뒤로는 교외의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 의외로 평이 좋은 호텔이었다.
그리고 5성급에 걸맞게, 상당한 가격을 자랑하지만 그만큼의 서비스가 제공된다.
그 서비스의 대표 격이 보통 요리.
그런 요리가 엄청난 가격에 제공되는 호텔의 식당에는 투숙객들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식사만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다.
식당 안, 한 노인이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흐음…….”
그리고 그 노인의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 노인을 한 번씩은 돌아보았다.
노인의 차림새도, 생김새도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식당에 조용히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에서 신비한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같은 곳에서 나올 법한 명석하고 날카롭지만 나이를 먹어 이젠 세상을 관찰하기만 하는 늙은 탐정의 모습과도 같은 느낌.
노인이 커피를 반쯤 마셨을까, 그의 뒤로 정장을 입은 젊은 남성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앉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던 남자의 말을 끊는 노인.
“그게, 설명을 드릴…….”
“앉게.”
남자는 뭔가 다급히 설명을 하려 했지만, 노인의 두 번째 말에 입을 다물고 노인의 앞에 앉았다.
“…….”
뭐라도 말하려 했던 방금 전과는 달리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
달각-
그리고 노인은 가만히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탁.
커피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노인은 입을 열었다.
“그래…… 철수, 할 수도 있지. 음. 근데…… 손해가 크지 않나? 응? 손.해.가.”
노인의 말 하나하나에 남자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장비 빠지고, 용병 빠지고, 현지 인력 빠지고. 또, 우리에 대한 신뢰는 어쩌고?”
노인은 신랄하게 남자를 까 내렸고, 남자는 조용히 입을 닫은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할 말은…… 없나?”
그리고 노인의 말끝에 붙은 한마디.
보통은 상대방에게 전부 사실만을 조목조목 따졌을 때 확인 사살을 하는 용도의 말이지만, 이 경우엔 조금 달랐다.
“변수가, 있었습니다……. 예상과 상정 범위 안에 없었던…… 변수가.”
“음, 그건 나도 봤지.”
남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보셨……습니까?”
“그래……. 하지만, 여긴 장소가 안 좋은 것 같군. 자리를 옮기세.”
“네.”
노인은 커피 잔에 남은 커피를 모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한 거리.
노인과 남자는 문을 열고 있는 한 식당에 들어섰다.
“이곳이면, 대화를 해도 문제가 없겠지.”
“여긴…….”
외관부터 허름하다.
물론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허름해도 깔끔한 곳은 깔끔하고, 또 오래된 곳은 그만큼 장사를 오래 했단 거니까.
하지만, 분위기의 문제가 있다.
[어제, XX동에서 일어난 은행 강도 사건. 다들 기억하시나요. 어제 오전 9시 30분경, 은행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 대신 뉴스로 대체하는 배경음악.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지금 시간이 아침 일찍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술을 시켜 먹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상당히 소란스럽다는 거다.
“사장님! 여기 국밥 둘!”
“국밥 뭘로!”
“우리 맨날 먹는 거!”
“알겠어요! 기다려 봐!”
“더 기다리면 밥도 많이 주나? 하하!”
“그럼 조금만 기다려! 밥도 조금 주게!”
“빨리 나오면 좋지!”
손님은 종업원 같은 것을 거칠 생각 없이 크게 소리쳐서 주문을 하고, 가게 측은 또 그걸 제지 안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문을 받는다.
이곳은 직장인과 일부 동네 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지역 국밥집.
남자는 당황하여 노인을 쳐다보았으나, 노인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긴…….”
“자리에 앉게. 식사는 아직이지?”
“……네. 아직입니다.”
“그럼 여기서 해결하지.”
지금까지 번역기로 대화를 하던 노인은, 자신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보게, 주인장! 여기 국밥 둘! 잘 말아서!”
“네에!”
익숙한 듯 매끄러운 한국어 발음.
하지만 남자는 딱히 신기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눈앞의 노인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 모습만을 보였기에.
[……네, 기동대장의 빠른 상황 판단과 과감한 결정으로 은행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정작 영웅인 기동대장은 사퇴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래…… 지금 호출명이 뭐였지? 빌리는 아니고. 흐음, 아! 파렌하이트였군.”
노인은 앞의 남자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신분은 제이미 호입니다. 호텔에서는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럼 제이미로 부르도록 하지.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것 같나?”
“실패의 책임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닙니까?”
노인의 역할과 힘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노인에 대한 두려움도 컸던 파렌하이트.
하지만 노인은 파렌하이트의 우려와 걱정과는 달리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뭐…… 딱히 그럴 생각은 없네.”
“네……?! 대체 무슨……! 전 분명 잘못된 선택을…….”
지난번의 계획에서, 철수하고 보니 멍청한 판단이었다는 걸 깨달았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카데미에서 지연이 일어날 때 다른 쪽을 강제적으로 밀어붙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았고, 철수 완료 직전에 권왕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 10분…… 아니, 5분만 더 판단을 미뤘었다면…… 작전은 성공했을 텐데…….
아니…… 그저 변수에 너무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음…… 솔직히, 거기서 철수한 건 나쁜 판단이었지.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론 좋은 판단이 맞았네.”
노인의 말에 당황하는 파렌하이트.
결과적으론 좋은 판단이라고?
“……네?”
“권왕…… 그 친구, 몸 상태가 어떤지는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도주로만 확보하고 숨는다고…….”
파렌하이트는 정체가 노출된 권왕의 탈출 루트를 짜주고 그 계획을 빠르게 실행시킨 뒤, 한국에 사업차 온 제이미 호의 모습을 연기하며 호텔로 갔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다음 소식입니다. 은행 강도 사건과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난 아카데미 습격 사건의 용의자로 다수의 각성자들이 입건되었으며, 천만다행으로 아카데미에서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럼 내 알려 주지.”
노인이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밥 두 그릇이 그들 앞에 놓였다.
“자, 국밥 두 그릇! 나머지는 셀프로 챙겨 드세요~.”
진중한 대화를 하려 한 순간, 앞에 갑자기 먹을 게 생기고 냄새가 풍기자 허기가 지기 시작한 파렌하이트.
하지만 눈앞에 상사가 있고 그 상사가 뭔가 말하려 하는데 지금 밥을 먹을 수는…….
후루루룹-!
“……?”
“뭐 하나? 안 먹고. 다 먹고 이야기하세.”
노인은 이미 국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고 있었다.
“으음, 국물 맛이 조금 모자라군. 김치를 가져와야겠어. 자네, 김치 먹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밑반찬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어, 으음…… 괜찮습니다.”
“에잉…… 맛을 모르는군.”
파렌하이트를 살짝 실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셀프 코너로 향하는 노인.
그리고 그들이 있는 식당의 TV에서는 뉴스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SNS에서는 아카데미 앞 의문의 남자에 대한 영상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요. 이 영상을 보시면 은색의 헬멧을 쓴 남자가 거대한 남자에게 맞서서 싸우고 있는 장면이 보입니다.]
아나운서가 말을 하는 중간에 스튜디오의 풍경 대신 영상이 재생되었고 거기에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와 그와 비교하면 너무 작아 보이는 다른 남자가 맞서 싸우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영상의 중반부까지 남자는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영상의 최후반부에서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며 영상은 끝이 납니다. 제보자는 이 부분을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화면이 하얗게 보일 정도의 섬광이 일고, 영상이 끝나며 아나운서의 얼굴이 나왔다.
[네, 다음 소식은 은행 강도 중 한 명과 아카데미 주변에서 난동을 피우던 용의자 모두 FBI의 수배를 받는 국제적 범죄자라는 건데요. 특히 아카데미의 용의자는 28개국에서 수배 중인 인물로…….]
그리고 뉴스의 아래, 작은 글씨의 문구가 하나 있었다.
-정부, 의문의 은색 헬멧 영웅에게 감사패 전달 의지 표명…… 그러나 반응 없어…… 영웅은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