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23)
오전 10시 50분.
권왕과 영의가 격돌하여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 순간과 은행 강도의 진압 후 파렌하이트가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를 지시한 그 사이의 시간이다.
그 순간들 사이에 영의는 상당히 고난을 겪고 있었다.
눈앞에서는 차도 벽도 박살 내고 다가오는 살아 숨 쉬는 전차가 있고, 옆에서는 괴수 무리들이 아카데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자신을 드론으로 찍어 대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둘 다 불편했다.
“……하아. 진짜 그냥 뛰어 들어가서 소리나 지르고 나올걸.”
괜히 영웅 놀음이나 해 보겠다며 달려온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쓸데없이 힘 좀 생겼다고 까분 것에 대한 후회가 섞인 한숨을 내쉰 영의.
[Alrim은 사용자의 행동에 대해 칭찬합니다.]
‘……칭찬?’
느닷없이 알림이가 자신을 칭찬하자 의문이 든 영의.
당장 죽을 위기였지만 알림이의 돌발 행동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도주를 택하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용감하고 대단한 일이며, 자부심을 가지시라고 알립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해 주는 말이겠지?’
영의는 다른 건 몰라도 상황 분석과 혹시 모를 미래에 대한 예측에 대해서는 확실했던 알림이를 믿었다.
‘음, 지금까지 알림이의 말을 들어서 잘못된 적은 없었으니까……. 있나?’
생각해 보면 베키와의 첫 만남부터가 뭔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적어도 손해는 안 봤지 않은가.
‘아니…… 손해나 이득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첫인상이 나쁘긴 해도, 좋은 친구잖아?’
물론 친구라기에는 덩치도 작고, 뭔가 부족한 동생 같은 느낌이 나긴 하지만 친구를 원하는 베키의 진심은 잘 느껴졌었다.
“그래서, 난 여기서 살아 나가겠지?”
[Alrim이 그것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고 알립니다.]
‘……뭐?’
[그래도 굳이 알리자면, 불가능 쪽이 조금 더 크다고 알립니다.]
‘야, 너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 사람 불안하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빗대어 보면 알림이는 대부분의 일에서는 확실한 모습을 보여 줬으니, 영의는 저 말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Alrim이 대화보다는 전투에 집중하는 것을 추천한다고 알립니다. 그리고, 사망하신다면 큰 유감을 표할 것입니다.]
‘얘 이거 또 사무적으로 돌아갔네! 요즘은 말투 괜찮아졌더니!’
[칭찬에 대해서는 감사하다고 알립니다. 그리고, Alrim은 만능 해결사가 아닙니다. 전투에 대해서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알림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화 내역을 치우고, 현재 영의의 몸 상태를 크게 띄워 주었다.
[현재 상태: 86%]
그 화면을 잠깐 바라보던 영의는 이내 고개를 한 번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하, 나도 현대인 다 됐네. 눈앞에 해결책과 문제가 동시에 있는데 기계한테 도움이나 구하고 말이야.”
그러고는 눈앞의 거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어디 출신이야? 얼굴 보면 묘하게 아시아계인데.”
싸우는 도중에 적과 통성명을 한다는 정신 나간 짓은 영화나 창작물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지만, 영의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건 기밀이다.”
‘되겠네.’
처음 만났을 때 강자니 뭐니 하던 말과, 지금까지 충분히 영의를 제압할 실력이 있음에도 봐주는 듯한 행동.
‘……천생 무인이네. 이 인간도.’
무언가를 하기 위해 단련을 하는 게 아니라, 단련 그 자체만을 위해 사는 족속인 듯했다.
‘뭐, 세상살이는 단련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다른 일도 해야겠지만…… 범죄 쪽으로 갔나.’
동생과 가족들이 있는 강당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덤벼든 권왕, 그리고 몰려드는 괴수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냉정해졌다.
“자, 그럼 한번 해보자고! 내가 맞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당신이 뻗는 게 먼저일지!”
영의는 일부러 도발하듯 크게 소리치며 역으로 권왕에게 덤벼들었다.
‘이젠 어쩔 방법이 없나…….’
영의는 지금 상황에 뭔가 더 할 게 없어져서 초조해졌다.
권왕을 내버려 두고 괴수들을 잡으러 가는 건 불가능하고, 권왕을 단기간에 쓰러트리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외부에서 도움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물론 그들 둘의 싸움이 무슨 인적 드문 야산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고, 도심지에서 벌어졌으니 누구든 간에 그 광경을 보고 신고를 하긴 했으리라.
‘그런 것치고는 이상하게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이 오질 않고 있는데…….’
하지만 평소였다면 각성자 간 충돌 상황에 금방 출동해야 할 경찰 인력들은 지금 모두 은행 쪽에 있었다.
‘뭐, 어쨌든 시간문제겠지.’
조금만 버티면 누구든 지원을 하러 와 줄 것이다.
다만…… 시간문제인 건 영의도 마찬가지였지만.
강당에서 나오는 사람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일단은 문을 닫고 버티고 있는 듯했지만, 준비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내부에 있는 인원 중 각성자가 다수였지만, 그중 대부분은 장난칠 때나 능력을 써먹던 아이들.
물론 괴수 정도야 널널하게 잡겠지만, 그 수가 보통이 아니었으니 불난 곳에 물 한 잔 뿌리는 정도밖에 안 되리라.
“……하아. 다음부터는 적당히 나서든지, 아니면 좀 더 강해져야겠어…….”
[현재 상태: 94%]
영의는 현재 뇌기의 충전 상태를 보고는, 곧바로 천뢰검을 준비했다.
‘도심지라 번개가 피뢰침 쪽으로 갈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내가 유도로 어떻게 조정하면 돼!’
쾅!
쿠궁!
그렇게 뭔가를 준비하는 낌새가 보이자, 권왕은 더 빠르게 영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왜 또 빨라지는 건데!”
“더, 더 꺼내 봐라! 아직 전력을 다한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권왕은 영의에게서 뭔가 새로운 게 더 나올 것 같자 즐거워진 듯,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으하하! 오늘 운이 좋군! 싸워 보지 못한 강자와 다시 만나고! 심지어 몸으로 싸우는 속성 계열이라니!”
그리고 영의는 천뢰검을 쓰기 위한 뇌기를 급하게 다리로 옮겨 속도를 더 높였다.
‘……뭔가 변수가 필요한데…… 뭔가가…….’
그때,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와 권왕의 등으로 내리꽂혔다.
터-엉!
땡그랑!
“……응?”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영의는 날아온 물건을 보았고, 그것은 공사 현장에서 쓰일 법한 콘크리트 지지대용 철근이었다.
“어떤 놈이……!”
권왕은 치열한 게임을 하다가 전원이 끊긴 PC방의 손님처럼, 급격한 분노에 휩싸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뒤와, 철근이 날아왔던 곳으로 추정되는 그 어디에도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
권왕은 잠깐 당황했고, 영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천뢰검을 사용하기 위해 뇌기를 하늘로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략 2km 떨어진 한 빌딩의 공사 현장.
아직 공사가 한창인 그곳에서는, 공사장과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아니, 이봐요! 공사 자재를 그렇게 막 갖다 쓰면…….”
공사 현장의 책임자로 보이는 형광 조끼의 남자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흰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명함을 건네는 동시에 형광 조끼의 남자 앞을 가로막는 양복을 입은 남자.
“단군…… 길드……?”
형광 조끼의 남자가 받아 든 명함을 보며 작게 중얼거릴 때, 앞에서 양복을 입은 나이 든 남자가 말했다.
“강진아, 다음 거 간다.”
“아, 네.”
강진, 서 비서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그는 자신의 상사이자 길드장인 황준의 옆으로 다가가 정신을 집중해 아카데미 쪽을 노려보았다.
“……거리는 동일. 위치는 사후 조정의 형태로. 그리고 상대는…… 멀쩡합니다. 더 큰 걸로 가시죠.”
서 비서는 저 먼 거리의 권왕이 잘 보이는 듯, 자세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흐음, 팍! 하고 꽂히면 두께 40cm짜리 콘크리트 벽도 뚫는데…… 그것보다 튼튼한 몸이라? 분명히 제대로 맞긴 한 건가?”
기술에 자신이 있는 듯, 상대가 멀쩡하다는 사실이 의문스러운 황준.
“네, 방심할 때 등 쪽에 제대로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멀쩡한 거면…… 조상이 거북이거나, 아니면 어제 헬스할 때 등을 조졌거나. 둘 중 하나겠죠.”
서 비서는 농담이 목적인 듯, 하나같이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냥 그만큼 강한 상대라고 하면 안 되나?”
하지만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황준.
“아, 하나가 더 있군요. 매일 약수터에서 나무에 등을 치거나. 셋 중 하나겠네요.”
“난 가끔 자네가 그렇게 웃기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웃긴 것 같아…….”
황준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는지, 참지 못하고 그 말에 태클을 걸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으면 너무 황량하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게이트 내부에 웃을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말한 황준이 허공에 손짓을 하자, 이에 반응하듯 바닥에 널려 있던 철근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꽈드드드득!
그러고는 서로 꼬이며 더 크고 굵은 하나의 철 막대로 변해 가는 철근들.
“자, 이것도 버티나 한번 보자고. 이래도 안 되면…… 저 큰 H빔 갖다 써야지.”
황준은 아래쪽에 몇 개인가 깔려 있는 굵고 큰 H자 대형 철골을 염두에 두었고, 서 비서는 그 말에 반응했다.
“……이거, 다 길드장님 월급에서 까겠습니다.”
“뭐?! 왜?”
개인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지금 정체 모를 거수자를 잡기 위해 쓰는 건데!
“이건 국가 요청이 아니니까요. 설마 공금으로 때우시게요?”
“…….”
하나같이 틀린 말을 안 하는 그의 비서를 잠깐 노려보던 그때, 꼬이던 철근이 큰 하나의 형태로 합쳐졌다.
“좋아, 됐군. 변동 사항은?”
“……이쪽을 응시하는 것 같군요. 눈이 좋은가 봅니다. 블루베리를 많이 먹었나?”
여전히 말끝마다 하나씩 농담을 섞는 서 비서.
“아니면 몽골 출신이거나. 알아도 못 막을 테니, 쏜다!”
이번엔 맞장구를 쳐 준 황준은 합쳐진 철근을 빠르게 쏘아 보냈다.
퍼-엉!
음속을 돌파해, 소닉붐을 내며 날아가는 큰 철근.
“……약간 오른쪽입니다. 대략 2밀.”
까딱.
서 비서의 말에, 황준은 손가락을 작게 까딱였고 이내 고속으로 날아가던 철근이 아-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지금은?”
“그대로 쭉. 쭉…… 쭉- 명중.”
쿠궁-
충돌 소리와 함께 아카데미에서 작게나마 연기가 솟아올랐고, 그것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보일 정도였다.
서 비서는 날아간 철근을 계속 관측했고, 이내 목표물에 도달하자 나지막하게 명중이란 말을 내뱉었다.
“좋아, 이제 어느 정도 효력이 있었겠지. 상태는?”
황준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며 서 비서에게 물었다.
“……표적, 회피……했습니다?”
“뭐? 어떻게?!”
그 어떤 먼 거리라도 바로 앞처럼 보는 시력을 가진 강화 계열 각성자인 서 비서와 별것 아닌 염동 능력의 각성자였으나 수많은 경험과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포를 쏘듯 물체를 쏘아 내며 전투에 응용했던 황준.
둘은 좋으나 싫으나 서로가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고, 그런 만큼 명중률도 어지간해선 백발백중이었다.
쏘면 탄도 조절이 불가능한 탄환과는 달리 염동력으로 쏘아 보낸 것은 피해도 다시 돌려서 꽂으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안 보일 만큼 멀리 있어도, 서 비서의 지시에 따르면 대충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명중 판정까지 냈음에도 목표물이 맞질 않은 상황.
“……길드장님, 아무래도 원거리 포격은 힘들 것 같습니다.”
서 비서는 후퇴와 괴수들에 대한 대책을 우선시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으나, 황준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여기 있는 자재들, 다 지불해. 옛날처럼 간다.”
직접 가서 싸우려는 듯, 눈에 투지가 타오르는 황준.
“……네, 알겠습니다. 전부 월급에서 까지요. 그리고 괴수들 있는 거도 아셔야 합니다. 괜히 1:1 해보겠다고 달려들지 마시고. 몸에 안 박히고 피하기도 하는 거 보셨죠?”
“……크흠. 그럼, 저 괴수들에 대한 대책은?”
황준은 괜히 무안해져서 괴수들로 화제를 옮겼다.
“지금 애들을 부를 만큼 불렀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동이 문제입니다. 여차하면…… 현장에서 저놈을 잡기보다는 괴수 상대만 해야 할 수도…….”
현재 정부에서도 상황을 인지하여 긴급 사안으로 각성자들의 협력과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장 달려올 형편이 될 이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저 정도 물량이면…….
“……빡세겠네. 저 정도면. 이럴 때는 꼭 형평성이니 뭐니 하면서 길드 A급들 골고루 지방에 분산한 게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렇게 테러가 일어날 거면 수도에 일어나는 게 보통이다.
외국 영화를 봐도 테러범들이 외국 수도나 대형 도시에 테러를 하지, 알래스카 평원 저 어딘가 설산 하나를 날릴 폭탄을 설치하고 터트려도 뭐…… 테러로 보이겠나?
하지만 인구 풀이 너무 몰리면 뭐 형평성이 어쩌느니 하면서 법으로 거주지와 길드 지부를 강제로 지방으로 나눠서 이전시켰으니…….
“뭐, 정부가 한 소리 듣겠구만. 덕분에 나도 이사는 안 가도 되겠어? 하하!”
황준은 애써 웃으며 자재들을 염동력으로 챙겨 아카데미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필 저런 놈이 아카데미 앞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니, 지연아…….’
딸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을 채울 때에도 황준은 얼굴에 미소를 유지했으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들자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잠깐, 그보다 저기서 저놈이랑 대치하는 건 누구지? 저런 놈이랑 싸우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