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22)
오전 10시 40분.
조금 전 각성자들이 아카데미 쪽으로 가자마자, 기동대는 곧바로 독단적으로 은행 내부에 진입하기로 했다.
물론 상부에서의 지시도 없었고, 현장에서 그 어떤 돌발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본디 인질극이란 인질범에게 응해 주면 더 해결이 힘들어진다는 게 정론이라며 부하들에게 강하게 주장했다.
박 경정은 강도들의 목적이 시간 끌기이고, 지시에 따르는 이들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강도들이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하고 곧바로 돌입했다.
상부의 지시가 없었으니 특공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그와 일부 지원한 기동대만이 대기하는 가운데 그 혼자 은행으로 들어갔다.
“뭐야! 왜 들어오는 거냐!”
박 경정은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저항의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며 은행을 훑어보았다.
‘인질들은 전원 케이블 타이로 손만 묶여 있군. 하지만 등 뒤로 묶여서 스스로 풀 방법은 없어 보인다. 복면이라…… 카메라는 없어 보이는군. 그렇다면 CCTV로 상황을 보는 건가? 그리고 강도는 총 여섯…… 무장은 소구경 화기…….’
어느 정도의 정보를 직접 얻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진정해라, 적당히 타협이나 하자고 부른 거다. 곧 점심때이고, 인질들에게 줄 목적의 식사나 음료 정도라면 내 권한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박 경정은 권총 하나만을 잘 숨긴 채 보호구 없이 은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장이나 보호구 하나 없이 당당히 걸어오는 모습을 본 강도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잠깐 머뭇거렸고, 모두의 시선이 한 명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모두 같은 복면과 각자 비슷한 복장을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리더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 리더를 찾아낸 박 경정.
‘……저놈이 대장이군.’
“자, 나도 무리한 걸 요구할 생각은 없다. 인질을 모두 풀어 주라거나, 무장해제를 하라는 요구까지는 안 할 거야. 그저 인질의 대우 개선과 적당한 분위기 완화를 요구하는 거다.”
박 경정은 창문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봐라! 주변을 포위한 각성자들도 물러나게 했다. 너희에게 요구하는 건 인질들에게 식사와 음료를 주고,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거다.”
그의 제안에, 강도 중 한 명이 창문 밖을 슬쩍 내다보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확실하군, 각성자들이 약간 물러나 있어. 하지만 경찰들은?”
“……그 친구들은 어쩔 수 없다. 각성자 요청은 내가 한 부분이라 내가 책임질 수 있지만, 특공대는 내 권한이 아니야.”
박 경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한다. 대신, 어떤 수작도 못 부리게 잘 밀봉된 음식과 음료를 가져올 것. 그리고 운반 형식은 잘 보이도록 넓은 판 위에 올려 작은 수레로 옮긴다.”
사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박 경감은 또 하나의 정보를 얻었다.
‘……번역기 소리. 외국인이군. 해외의 프로를 고용했나. 그래서 경비업체 쪽이 눈치를 못 챈 거로군.’
이제 충분히 알아낼 정보는 알아낸 박 경정.
“……좋다. 그렇다면 이제 나가 봐도 되겠나? 상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나도 협의를 해 봐야 한다.”
박 경정은 잠깐 나간 뒤, 대원들과 작전을 세우고 2차 협의를 하러 들어오는 척하며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때 대장으로 보이는 외국인이 박 경정을 제지했다.
“잠깐.”
“……왜 그러지?”
박 경정은 애써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진정해라, 이런 상황에서 불안이나 동요는 역으로 의심을 산다. 인질들도 내 불안한 모습을 보면 어떤 행동을 할지도 모르고…….’
“……당신, 협상가인가?”
“아니, 바깥의 현장 지휘관이다.”
박 경정의 대답에, 대장은 약간 놀라는 듯했다.
“호오…… 지휘관이 직접 와도 되는 건가? 그것도, 보호 장구 없이. 하다못해 방탄조끼라도 하나 입고 오지 그랬나?”
“이렇게 와야 내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줄 것 같으니까. 이것저것 껴입고 오면 대화를 하자는 자세가 아니지 않나?”
박 경정의 대답에, 대장은 살짝 웃었다.
“그래, 참 좋은 경찰이군……. 가능하면 안 쏘도록 하지. 그럼 얼른 가서 식사나 갖다 달라고.”
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 은행의 창구 위에 올라탄 뒤 거기에 걸터앉았다.
“……빠르게 조치하도록 하지.”
박 경정은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속도로 뒷걸음질 하며 은행의 문을 나섰다.
“……사격하지 마! 대장님이다!”
그리고 은행 쪽을 겨누고 있다가 박 경정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는 걸 확인하자 총구를 치우고는 급히 다가오는 기동대원들.
“대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연락해서 물건 옮길 때 쓰는 끌차랑 인질들과 범인들이 먹을 무해한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라 그래.”
박 경정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이마를 손으로 닦아 내며 일단 겉으로나마 협상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다. 범인은 여섯, 그중에 대장이 하나 있고 외국인이다. 아마 외국에서 많이 굴러먹던 강도를 부른 거겠지.”
박 경정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이야기해 주며, 그 정보를 기반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됐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네, 뭐…… 지금 좀 급해서……. 그래도 확인은 했습니다. 적당히 응해 주면서 시간을 끄세요.
파렌하이트에게 방금의 내용을 보고하는 강도들의 대장.
“언제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철수하란 신호를 내릴 때입니다. 그리고, 정말 각성자들이 거기에 남아 있나요?
방금 전까지 보여 준 철두철미하고 완벽했던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현장에 있는 인원에게 의존하듯 물어보는 파렌하이트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 든 불안감을 떨쳐낸 대장.
‘……아니, 현장에 나가 있는 사람만이 확인해 줄 수 있는 것도 있지.’
“……확인, 안 하신 겁니까?”
-아아, 급한 일이 조금 있어서……. 그쪽에 있던 드론을 회수했거든요. 은행 외부에 사각지대가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한 확인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파렌하이트의 말에 대장은 과거에 몇 번인가 있었던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버려지는 건 아니겠지?’
“……있습니다. 아직까지. 물론 협상을 한다고 조금 뒤로 물린 것 같지만…….”
-으음…… 네, 알겠습니다. 경정님이 의외로 적극적이시군요. 먼저 협상을 하자며 시간을 끌어 주다니.
“…….”
-그럼 프로답게,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좀 바빠서…….
연락이 끊어지고, 대장은 시계와 바깥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파렌하이트는 그렇게 연락을 끊고는 곧바로 아카데미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는 모든 계획을 세울 때 3단계의 법칙을 세운다.
1단계, 분석과 확인.
사전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큰 변수에 대해 조사하고, 그 변수에 대한 대책도 알아보며 자신이 가진 패가 그것에 대응 가능한지를 본다.
2단계, 계획.
손에 패를 최대한 마련했다면, 계획에서 발생할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밑 작업을 한다.
이번 은행 강도 사건에서 초기에 강경 대응으로 강도들이 진압당해 시선 분산이 멈추지 않도록 경찰 내부 인물의 발목을 잡은 것.
그리고 아카데미 쪽도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타격을 해 어설프게나마 막을 시도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3단계, 실행과 임기응변.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일은 없다.
복잡하고 완벽한 계획일수록, 완벽하게 흘러가지 않는 법.
그래서 파렌하이트는 늘 백업 플랜과 백업의 백업, 혹시 모를 비상 계획을 다 만들어 둔다.
그리고, 그런 만큼 작전의 완벽한 진행에 집작하기도 하지만.
좋은 쪽의 변수도 제법 있다.
이번에 은행에서 경보 없이 진압을 한 것이나, 아카데미 측에서 의외로 각성자들이 한 번에 다 빠진 것들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나쁜 쪽의 변수도 있다.
그 나쁜 쪽의 변수를 사전에 처리하거나 즉석에서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계획 담당자이자 오퍼레이터 역할인 그가 담당하는 것.
‘……하지만, 이런 변수는 계획에 없었는데.’
그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아니,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변수가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지금 그의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 신나는구나! 얼마 만의 격전인가!
-으아아아아!
드론이 근접거리까지 가서 촬영하고 있는 장면이 모니터에 나온다. 약하게나마 음성까지 잡아내고 있는 드론.
지금 그 영상에서는 전투에 몰두한 나머지 신이 나 가면까지 벗어 던지고 주먹질을 하는 권왕과 그걸 피하며 싸우고 있는 의문의 헬멧 쓴 남자가 있었다.
똑똑똑똑…….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불안한 눈을 하는 파렌하이트.
그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었기에 화를 내는 게 오히려 남들보다 빨랐다.
미리 분노를 발산해 둬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도 이 불안감은 다스려지지가 않았다.
‘뭐지? 왜 저런 인간이 갑자기? 그것도 하늘에서 내려왔다. 아니, 그건 저기 있는 마정석 바이크겠지.’
영의를 최대한 자세히 보면서 분석을 해 보려는 파렌하이트.
덕분에 다른 지역에 뿌려 둔 드론도 회수했고, 권왕과 다른 팀원들의 탈출을 위해 시선 분산용 강도 팀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다음 계획의 시작 시간이니, 곧 철수 지시도 전달해야 하는 상황.
‘다음번에는…… 아니, 한 달만 기다려라. 널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다.’
그의 계획을 망친 거대한 변수인 저 은색 헬멧을, 파렌하이트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동시에 분석하고 있던 찰나, 갑작스럽게 든 의문이 있었다.
‘……잠깐, 근데 어디서 저런 인간이 나온 거지? 이 나라 특성상 은둔자는 별로 없을 텐데?’
당장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는 게 불법이라도, 누군가가 너만 알고 있으라며 조심스럽게 말해 주는 건 어디에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나라…… 한국은 그게 조금 더 심한 편.
땅덩이도 좁은 데다, 특유의 친분 문화가 만들어 낸 암묵적인 비밀 공유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비상시 국가에서 각성자를 동원한다는 정신 나간 법도 있었으니…….
‘……덕분에, 이 나라에선 힘을 숨기기보다는 그걸 드러내고 차라리 한 푼이라도 벌어 보겠단 인간들뿐이다. 당장 음식 배달에 각성자를 쓰는 것부터가…….’
얼마 전, 각성자가 치킨을 배달해 주던 일을 떠올리는 파렌하이트.
“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거냐……! 권왕과 맞상대가 가능한 실력자가, 대체 어디에……!”
파렌하이트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그 실력자가 바로 그 치킨을 배달하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