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15)
젊은 여성, 에르메스는 이번 작전 때 쓸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으음, 이건 예쁘긴 한데 한번 쓰고 버리기엔 너무 비싸고……. 저건 좀 별로인데…….’
차마 자존심상 공주님 가면을 쓸 순 없었기에, 그녀는 풀 페이스형 헬멧이라도 하나 구해서 쓰려고 했다.
‘……기능은 별로라도 디자인은 괜찮은 거 없나?’
그렇게 헬멧들을 둘러보는 그녀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순간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
물론 각성자들이 사용하는 물건도 판매하는 백화점이니 각성자들이 오는 거야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방금 순간적으로 든 본능적인 느낌은 약간…… 이질적이었다.
‘……뭐지?’
그 느낌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한 남자가 헬멧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으음…… 내 마음에 드는 게 없네…….”
여자의 감, 아니면 제법 많은 고난을 겪으며 단련된 감각이 눈앞의 남자가 위험하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근데, 진짜 잘생겼네…….’
위험해도 저 정도면 잠깐 말이나 한번 걸어 볼까 하는 생각에 남자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때 그녀의 동행이 그녀를 붙잡았다.
“아, 언니이이…… 밥 먹으러 가자, 응?”
“……하아, 그래.”
잘생긴 남자를 보내 줘야 하는 건 조금 아깝지만, 그녀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나중에 밥 먹고 와서 보자.”
“응! 빨리 가자!”
에르메스의 말에, 프린세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앞장서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나아갔다.
‘……아깝네, 번호라도 먼저 물어볼 걸 그랬나?’
에르메스는 프린세스의 손에 이끌려 식당가로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편, 그런 둘이 나가는 것도 딱히 의식하지 않고 헬멧을 계속 골라 보던 영의.
“……으음, 기능은 있어도 디자인이 영…….”
오랫동안 써 온 그의 은색 헬멧은 이미 정이 들어서 다른 디자인으로 바꾸기는 싫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것들은 대부분 훨씬 좋은 기능이 내장된 헬멧들이 많았지만 디자인이 달라져 있었다.
“어떡하지…… 디자인 괜찮은 거 하나 사서 베키한테 그냥 개조해 달라 해야 하나?”
베키의 실력 자체는 믿고 있었고, 또 지난번에 헬멧 개조에 대한 건을 약속받았기에 영의는 일단 베키에게 줄 헬멧 하나만 사기로 했다.
“저기요, 이거 하나만 주세요.”
“네, 고객님. 결제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영의는 헬멧을 구입하고는, 박스째로 옆구리에 끼웠다.
한 손에는 쇼핑백 두 개를, 그리고 다른 쪽에는 잘 포장된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백화점 내부를 걸어 다니는 영의.
그렇게 걷다가 에스컬레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시야에 문득 식당가의 안내판이 보였다.
‘……흠, 간식이나 하나 사 갈까?’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백화점 쇼핑이나 간식 구매.
하지만 지금 그의 계좌에는 돈이 충분…… 아니, 영의의 기준상 넘칠 정도로 있었기에 씀씀이도 커졌다.
“수연이가 뭘 좋아하더라……?”
그가 집안에서 입맛을 고려할 대상은 동생인 수연밖에 없었다.
야생에서 살아남으려면 뭐든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내려 준 아버지는 가리지 않고 잘 먹었고, 어머니도 싫어하시는 건 없었다.
다만 늦둥이에다 유일한 딸인 수연만큼은 곱게 키웠기에(집안 기준으로) 어느 정도 편식이 있었다.
‘……다 사면 되려나?’
영의는 돈지랄…… 아니,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하기로 했다.
그렇게 식당가 옆에 붙어 있는 디저트 가게들로 향한 영의.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뭐지? 이거 한글 맞나?’
수없이 다양하게 빛깔을 뽐내는 과자와 케이크, 그리고 빵들.
물론 거기까진 좋았다.
보는 떡이 먹기도 좋고, 또 색깔에서 나오는 대략적으로 기대되는 맛이란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슨 메뉴 이름이 이렇게 괴랄해……?’
거의 반평생을 고급짐과는 거리를 두고 산 영의로서는 고급 디저트 가게들의 메뉴 이름이 생소했다.
‘아니, 그냥 아이스크림처럼 딸기 맛, 바닐라 맛, 초코 맛 이렇게 하면 안 돼?! 무슨 단어를 저렇게 복잡하게 써 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누가 봐도 딸기 맛으로 보이는 색의 아이스크림에 이런 이름이 붙어 있었다.
-베리스트로베리
‘그냥 스트로베리라고 해! 나처럼 처음 오는 사람들은 뭐 어떻게 사 먹으라고!’
그렇게 영의가 상당한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영의가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아까 헬멧 가게에서 마주쳤던 여성, 에르메스가 있었다.
방금 전 프린세스의 손을 잡고…… 아니, 프린세스의 손에 이끌려 식당가로 와 버린 에르메스.
그녀는 고기가 먹고 싶다던 프린세스의 말을 기억해 내 고기가 나올 법한 곳을 찾고 있었다.
“으음…… 어디를 가야 할까?”
마침 그녀의 눈에 띈 것은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
거기서 나오는 스테이크 정도면 프린세스도 만족할 것이었다.
“저기, 저쪽으로 가면…….”
레스토랑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던 에르메스.
하지만 프린세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나 저거 먹고 싶어! 한국은 처음이라서!”
프린세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를 가리켰고, 거긴 제법 분위기 있는 한식당이었다.
‘……뭐, 나쁘진 않네. 나도 한식은 간만이고.’
물론 에르메스의 입장에서 한식이라고 하면 저런 고급진 음식점에서 나오는 게 아닌, 국밥과 백반 등이 더 친숙했다.
“그래, 저기로 가자. 그래도 고기는 먹을 거지?”
“응! 고기 먹을래!”
그렇게 프린세스와 함께 한식당에서 적당한 코스로 주문을 한 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에르메스.
그녀는 음식점 내부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방금 전 봤던 헬멧 중에서 뭘 써야 그나마 괜찮을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흠, 핑크색이 그나마 괜찮은 것 같기도……. 근데 그건 너무 여자애 같은 느낌이야. 아, 그보다 아까 그 남자 번호나 한번 물어볼 걸 그랬나?’
방금 전 헬멧을 보다가 마주쳤던 남자가 아까웠던 에르메스.
“……어?”
그리고 그때, 아까 보았던 그 남자…… 영의가 식당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응? 왜?”
에르메스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움찔하자 메뉴판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던 프린세스가 의문을 표했다.
“잠깐, 여기 있어 봐. 금방 올게.”
프린세스는 그녀가 금방이라고 말한 것은 언제나 30분 정도 걸렸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럼 나 먼저 먹고 있어도 돼?”
“그래, 마음대로 해.”
이내 자신의 가방과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가는 에르메스.
그리고 그녀는 방금 전 영의를 목격한 곳으로 이동했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고민에 빠져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에르메스는 이번 작전을 끝내고, 잠깐 만나 볼 생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둘이 마주치고 20분 뒤, 영의와 에르메스는 식당가의 카페의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하, 진짜 고맙습니다. 저는 저런 게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20분 전, 우연히 마주쳤던 여성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괜찮은 과자들을 구한 영의.
그는 솔직하게 감사함을 표했다.
“아니요, 그냥…… 눈에 띄어서요. 가게 앞에서 계속 노려보고 있길래…….”
에르메스는 솔직히 영의를 보고 쫓아간 거였지만, 내숭을 떨었다.
그리고 한식당에서 혼자 2인분을 먹고 있는 프린세스는 까먹은 채, 영의와 수다를 떠는 에르메스.
“저기, 혹시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에르메스는 영의에게 곧바로 직구를 던졌다.
‘금요일이 작전 날이니까, 끝나고 잠깐 놀아야겠네.’
그녀는 한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굳이 위조 신분이나 가짜 거주지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집이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파렌하이트처럼 안전 가옥으로 갈 필요도 딱히 없었다.
‘음,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민간인처럼 놀아 봐야지.’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영의가 거절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 그게…… 주말에 약속이 있어서요.”
“…….”
하지만 거절해 버리는 영의.
그는 지난주에 화연에게 주말에 시간을 내줄 수 있다는 말을 했기에, 눈앞의 여성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여자예요?”
“아, 네.”
잠깐 표정이 굳었었으나, 여친이 없으면 오히려 더 이상할 거라 생각한 에르메스.
‘그래, 저 얼굴에 여자가 없으면 그게 정상일 리가…….’
“여친?”
“……뭐, 그렇죠.”
직접적으로 당사자끼리 헤어지자고는 말을 안 했기에, 영의와 화연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몇 살이에요?”
“갑자기 그건 왜…….”
느닷없이 나이를 물어 오자, 영의는 잠깐 경계심을 가졌다.
‘……나이를 물어보다니…… 설마, 제사 지내라고 하는 건가?!’
“빨리, 말해 줘 봐요.”
“……28살인데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기에, 영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도와줬던 은혜가 있었기에 나름 매끄럽게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그냥 말로 돌려보내자…….’
“흠, 생각보다 나이가 있네? 28살인 연상 여자 만나는 거보다…… 난 어때요? 25살인데.”
에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아, 제가 28살인데요. 여친은 27이고.”
그 말에 에르메스는 깜짝 놀라 사레가 들렸다.
“커흑, 켁, 켁!”
“어어, 저기요?!”
에르메스는 기침을 하면서도 영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28? 저 얼굴로? 진짜? 그보다, 딱 봐도 디저트들 두고 어리숙하길래 20대 초반인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로 더 나이가 많았다니.
에르메스는 약간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자신의 나이를 듣고 사레가 들리자 약간 미안해진 마음이 든 영의.
“괘, 크흠. 괜찮아요. 더 좋네? 오빠, 지금 여친보다 더 어린 난 어때?”
“……여친 있다니까요?”
“에이, 그러지 말고.”
그렇게 영의를 계속 붙잡아 두려던 에르메스.
‘아, 그냥 도망칠까……?’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도망을 칠까 고려하던 영의는 다행히도 구원자를 만났다.
“언니, 언니. 나 왔어.”
“……?”
어느새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와 에르메스를 툭툭 치는 프린세스.
그리고 그녀의 양손에는 에르메스가 쇼핑했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어…… 다 먹었어?”
“응, 다 먹었어.”
아니, 밥이야 뭐 혼자 2인분을 먹었다 쳐도…… 카드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계산은?”
“갖고 있던 돈으로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에르메스는 프린세스가 아직 현금 다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사람들이 뭐라고 안 했어?”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두고 간 쇼핑백들 한번 보더니 다시 가던데?”
그냥 소녀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현금을 마구 꺼내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볼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의 뒤에 명품들이 가득 담긴 가방이 있다면?
그러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다.
“……하아, 가야겠네.”
에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그래도 전화번호라도 주면…….”
영의에게 번호라도 따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영의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뭐야, 여기 있던 남자 어디 갔어?”
영의가 있던 자리에는 마치 12시의 부름을 받은 신데렐라처럼, 하나의 과자 상자만이 남겨져 있었다.
“응? 나 오자마자 바로 저기 가서 계산하고 가던데? 그보다, 나 이거 먹어도 돼?”
프린세스는 테이블 위의 디저트 상자로 손을 뻗었다.
“……안 돼. 내 거야.”
“아, 왜애~ 나도 과자 좋아한단 말이야~.”
“안. 돼.”
그렇게 신데렐라를 떠나보낸 왕자처럼 과자 상자를 소중히 챙기는 에르메스.
“뭐,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에르메스는 작전이 끝나고 주말에 다시 이 주변을 한번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범인은 한번 온 장소에 다시 오게 되어 있다! 그래도, 계산은 했고 과자도 두고 간 걸 보면…… 귀엽네.’
에르메스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프린세스의 손을 잡고 백화점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쥐여 줘서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던 그녀였다.
한편, 그들이 작전에 사용하려던 사무실 주변의 거리.
“허억…… 허억……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가뜩이나 길치라서 어디서 길 잃으면 가만히 있거나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있으라고 했는데…….”
에르메스가 연락을 하지 않는 바람에, 파렌하이트는 프린세스를 아직도 찾고 있었다.
한편, 선물을 한 아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영의.
그가 사는 건물 옥상은 뇌영의 둥지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휘익!”
영의가 집 주변으로 오자 옥상에서 내려와 곧바로 그의 어깨 위로 안착하는 뇌영.
“잘 있었지?”
“휘요!”
파닥파닥.
잘 지냈다는 걸 증명하듯, 날개를 퍼덕거리는 뇌영.
“……휘익?”
그리고 뇌영은 영의의 품에 한가득 담긴 선물 보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먹을 거 아니야. 수연이 알지?”
“휘요?”
“아, 아기 때 봐서 모르나……?”
동생에 대해 물었으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젓는 뇌영.
“그럼 내일 한번 가서 우리 가족이나 만나 보자. 어때?”
“휘익!”
영의는 그렇게 내일 뇌영과 함께 본가에 갈 생각을 하며 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병병 브라더스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여자한테 번호 따일 뻔한 썰 풀어본다.]
[핑키 병찮: 오, 역시…….]
[병민: 그 얼굴에 대시가 안 온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핑키 병찮: 그러면 대시 못 받은 우리는 뭔데?]
[병민:…….]
[핑키 병찮:…….]
채팅방에는 정적만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