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24)
영의가 열심히 용산에서 집으로 날아오기 전,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지연.
그녀는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는 듯한 큰 배낭을 메고 몰래 집을 나섰다.
‘……아무도, 모르지?’
지연은 문밖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전력으로 힘을 끌어 올렸고, 뇌기를 몸에 둘러 더 빨라진 그녀의 움직임을 집 안의 사람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한 명 눈치채긴 했다. 저택의 안, 안방 침실에서 한 남자가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지연아…… 운동도 좋긴 하지만, 아침부터 전력 질주는 아니잖니…….”
그녀의 아버지, 단군 길드의 마스터 전황준이었다.
물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딸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지연이 운동을 하러 나간 줄로만 알았다.
평소에도 운동을 자주 하던 딸이었고, 지금은 방학 기간이었기에 아침 운동인 줄로만 알았던 황준.
나중에 점심을 먹을 때가 지나고,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황준이 딸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소리치게 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그렇게 배낭을 메고 최대한 빠르게 집을 벗어난 지연은 대로변에 접어들자 발걸음을 늦췄다.
“음…… 지하철이, 어디지……?”
물론 지금은 집이 부자라 원한다면 기사가 태워 주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각성자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평범하게 살았던 지연.
주변 지하철역은 몰라도 지하철 사용 방법은 알고 있었다.
“아, 휴대폰…….”
정 안 되면 지도 앱을 켜서 걸어서라도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이내 휴대폰을 이용해서 찾아보면 된다는 걸 깨닫고는 휴대폰을 켰다.
“……이쪽인가?”
그렇게 성공적으로 지하철역을 찾아 통행권을 구입한 뒤(카드는 있었지만, 교통카드 기능을 넣지 않았다) 간밤에 찾아 둔 이동 경로를 보는 지연.
사이트에서 추천한 경로를 그대로 이용해서 가기로 했다.
‘……이대로 15정거장만 더 가면 돼.’
지연은 고양시, 영의네 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강 체육관]
“……여긴가?”
그렇게 지연은 영의네 체육관에 도착했다.
좀 많이 낡아 보이는 외관이었지만, 문 옆에 세워진 몇몇 수상 이력(빛이 바랬지만)을 표시한 간판과 영의가 보내 준 주소를 믿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계세요?”
“누구신가!”
지연의 말에, 갑작스럽게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 중년 남성.
“엄마야!”
갑자기 튀어나오자 지연은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아아, 참. 미안하네 학생. 여기에 이 시간에 손님이 올 거라곤 예상 못 해서 말이야. 회원 등록하러 왔나?”
사과를 하며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는 근육질의 중년 남성. 그는 영의의 아버지, 최정권이었다.
“어…… 그, 혹시…….”
“음? 아, 이것 참. 내가 눈치가 없었네. 여기서 서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일단 관장실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정권은 그렇게 사무실 쪽으로 지연을 안내했고, 지연은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관장실 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차? 아니면, 음료수?”
정권은 관장실 옆의 냉장고를 열어 안에서 몇몇 주스와 음료수가 담긴 병을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어, 그게…… 여긴 회원으로 온 게 아니라요…….”
그렇게 지연이 찾아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말을 꺼냈을 때, 관장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아저씨, 계세요……. 어? 상담 중이었나 봐요? 나중에 올게요.”
관장실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신화연.
그녀는 일주일간의 휴가 동안 우선 영의에게 시간이 비냐고 물어보았지만, 문자를 안 읽었기에 직접 찾아온 것이다.
“오오, 화연이 아니야? 오랜만이구나.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어! 하하!”
제법 친숙한 사이인 듯 선뜻 말하는 정권. 화연도 그 말에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 아저씨도 참. 그럼 일단 이야기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여기 샌드백 옛날이랑 똑같죠?”
“그래, 같은 사양이야. 나도 금방 끝내마!”
화연은 관장실의 문을 닫고 나갔고, 정권은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 했다.
“음…… 회원으로 온 게 아니라고? 그래, 뭐 운동 지식에 대한 조언이라도 구하러 온 거니?”
지연은 방금 겪은 상황이 바로 이해되지 않아 잠시 생각에 혼선이 온 듯 멈춰 있었다.
정권은 그 모습에 지연이 지금 멍을 때리고 있나 싶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고,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지연.
“핫! 어디까지 얘기했죠?”
“어어, 으음. 회원으로 온 게 아니라는 말……?”
“아뇨, 할게요! 회원! 해야죠! 네!”
10년 전, 신화연이 큰 인기를 얻고 한국의 톱 랭커로 올라가기 전부터 그녀를 동경해 온 지연.
눈앞에 동경의 대상이 나타나자 지연은 다급히 이 체육관에 뼈를 묻어 보기로 했다.
‘아아…… 화연 언니가 직접 만지고 사용하던 기구들과 땀이 묻은 체육관……!’
물론, 10년 전에는 화연도 여기서 자주 운동을 했지만, 5년 전부터 여기엔 오지 않았고, 오늘에야 다시 찾게 된 것이지만 지연이 그것을 알 도리는 없었다.
“어, 어음…… 일단, 신청서부터 작성할까?”
갑작스럽게 고객이 생기게 된 정권은 일단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프로답게 신청서를 꺼내어 내밀었다.
“5년요.”
“……응?”
갑작스럽게 나온 5년이란 단위에 잠깐 움직임이 멈춘 정권.
“일시불로요.”
“네, 회원님. 아주 열심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신청서는 제가 쓸 테니, 그동안 체육관 구경이라도 하시죠. 나중에 오셔서 개인 정보만 써 두면 됩니다.”
지연은 신청서 위에 카드를 올렸고, 그걸 받아 든 정권은 자신이 대신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류 작성을 마치고(?) 잠시 밖으로 나온 지연. 그녀는 화연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퍽-
파팡-
‘샌드백 치는 소리……!’
지연은 그 소리가 화연의 소리일 것이라 판단하고 그곳으로 향했고, 거기엔 화연이 외출 차림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움직이며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와아…….”
나중에 저 샌드백을 꼭 한번 안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지연은 그렇게 홀린 듯 화연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샌드백을 치다가 갑자기 멈추고 옆을 돌아보는 화연.
“어! 뭐야, 있었네?”
상당히 반가운 듯, 얼굴에 미소를 띠며 누군가를 반기는 화연의 모습에 지연도 그 인물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거기서 나타난 건 도복을 입은 한 소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키가 더 컸다.
그리고 이내 둘은 반가운 듯 서로를 껴안았다.
“언니도, 간만이네? 오빠 만나러 왔어?”
“뭐…… 그렇지? 그보다, 여기 샌드백 구멍 났었어? 테이프가 붙어 있는데.”
“어, 영의 오빠가 한 방에 터트려 먹었지.”
“역시 선배네…….”
그렇게 친한 듯이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며 지연은 내심 질투가 일어났다.
저 여자애는 대체 뭐길래 저렇게 친한 듯이…….
“아, 다 됐다! 화연아! 무슨 일로 왔다고 했지? 그리고, 수연아! 여기 새로운 회원님 좀 봐 드려라!”
지연이 둘을 노려보던 그때 관장실의 문이 열리며 정권이 나와 크게 소리쳤고, 그 외침에 화연과 수연은 관장실 쪽으로 왔다.
“……새 회원요?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너는 더 어릴 때부터 훈련했잖아. 일단 가서 기본적인 거부터……. 아니지, 뭘 배우러 온 건지부터 물어보고, 정리해라. 그리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가르쳐 주고. 자, 화연아. 여긴 왜 온 거라고?”
그렇게 화연과 함께 관장실로 들어가는 정권. 지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내 옆에 수연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음…… 새 회원이라고요……?”
“……네. 근데, 전 여기 등록해서 운동하러 온 게 아니라 기술 배우러 온 건데…….”
어느새 본래 목적을 잊고 회원 등록을 해 버렸지만, 지연은 이곳에서 영의를 만나고 그에게서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흠…… 여기 기술 가르쳐 주는 곳 맞아요. 뭐…… 요즘은 거의 다 운동 느낌으로 오는 사람이 많지만. 무도관이에요.”
일단은 회원이니 자신보다 어려 보여도 존대를 해 주는 수연.
그녀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지연도 수연이 제법 강한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나,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영의에 대한 건 관장인 정권한테 물어봐도 될 일.
그녀는 화연과 눈앞의 소녀와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었다.
“저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네. 얼마든지…….”
“얼음꽃, 아니…… 신화연 님이랑은…… 무슨 사이예요?”
물어봐도 기술이나 뭐 단련법이 아니라 그런 것부터 물어보는 건가 싶었던 수연.
그러나 이내 생각해 보니 그게 일반적인 게 아닐까 싶어서 대답해 주었다.
“그냥…… 옛날부터 알고 지낸 언니죠. 언니도 나 여동생처럼 대해 줬고요. 한 일곱 살 차이 나니까…….”
수연의 말에 지연은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화연의 나이 27세, 그리고 자신의 나이 17세…… 그렇다면 수연의 나이는……20?
“어, 그럼 저보다 세 살 언니시네요……. 말 편하게 하세요.”
지연은 처음에는 수연에게 크게 존대할 생각이 없었지만, 화연이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지 않은가.
그녀도 나름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었기에 말을 높였다.
“아하하, 뭐야. 이제 막 고등학생이네? 학교는 어디로 가니?”
말 편하게 하라는 말에 곧바로 말을 놓아 버린 수연.
그녀는 지연에게 친밀감을 쌓으려는 듯, 일단 학생 나이대에 맞는 질문을 바로 던졌다.
“네…… 그, 아카데미요. 각성자 아카데미.”
“어? 나도 올해 거기 들어갈 건데! 이야, 동기네?”
각성자 아카데미는 일종의 각성자 전용 고급 교육 기관으로, 나이나 성별 관계없이 입학이 가능했다.
물론, 등록금은 필요했지만.
“정말요? 다행이네요.”
“등록금 모으기가 힘들었는데, 오빠가 열심히 일해서 모아 줬지……. 오빠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않겠어?”
딱히 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말을 꺼낸 수연.
지연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정말로 여기 찾아왔던 이유에 대해 떠올렸다.
“……저기, 영의 쌤…… 아니, 최영의 선생님 여기 안 계신가요……?”
“응……? 영의 오빠?”
갑자기 오늘 회원으로 온 소녀의 입에서 왜 자신의 오빠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물론, 아까 한 말을 들어서 이름이야 알 수 있어도 갑자기 선생님이라고?
“네, 최영의 선생님요. 기술 배우고 싶으면 여기로 오라고 하셔서…….”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는 지연. 영의가 자신을 구해 준 것, 그리고 자신이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
아무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는 대신에 기술을 배우기로 한 것……을 듣고, 수연은 다급하게 집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자, 잠깐만 여기 있어 봐…….”
오빠가 어떤 애를 구했다- 제법 미소녀!
그런 다음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조건이나 대가 없이?
그리고 아무 부탁이든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 범죄의 향기……?!
수연은 오빠가 화연과 학생 시절에 사귀다가 나중에 고등학교 때 화연과 멀어진 것을 기억해 내며 그런 결론을 내려 버렸고…….
그렇게 집에서 엄마에게 자신이 들은 결론을 말하는 수연.
영의 남매의 어머니인 희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난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너는 도대체가…… 미성년자한테 손을 대다니, 그게 무슨…….]
으로 시작하는 내용이었고, 영의는 그렇게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