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13)
영의는 얼마 전에 봤음에도 다시 화연을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이번엔 별로 복잡한 마음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한번 제안을 했으니 이번엔 제안 없이 그냥 얘기나 해보자고 부른 거거나 어쩌면 정말로 햄버거가 먹고 싶었던 걸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햄버거집이 너무 가깝기는 한데…….’
영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주문을 받은 입장이니 그대로 호찬의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 바이크를 세워 두고는 헬멧을 벗어 바이크에 걸어 두고 곧바로 보온 가방을 든 채 가게로 들어가는 영의.
“어서 오세요~.”
“……호찬 아저씨 없어요?”
어쩐 일로 카운터에는 호찬 대신 여직원이 있는 상태. 직원은 처음 들어오자마자 느닷없이 사장부터 찾는 배달부에게 당황하거나 눈살을 찌푸릴 만도 하지만 영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해 주었다.
“사장님 안에 계시는데, 불러 드릴까요?”
“네? 아뇨, 뭐 어쩐 일로 직접 버거를 굽는진 몰라도, 조리하고 있으니까 맡겨야죠. 일단 포장 주문으로…….”
지난번에 시킨 것과 같은 메뉴로, 물론 콜라를 제로 칼로리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고 직원에게 확인까지 시킨 뒤에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영의.
그렇게 기다리는 와중, 업데이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그의 시야 한구석에 떴다.
‘확인은 나중에 해야겠다, 일단은 배달부터…….’
영의는 지금 업데이트를 확인하기에는 묘하게 시간이 모자라다고 판단했고, 알림 확인을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하자 이내 알림 창이 그에 반응했다.
[알림을 나중에 표시합니다.]
‘……이젠 이것도 인식한다고?’
그렇게 잠시 업데이트된 자신의 배달 능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또 당황하기도 하여 잠깐 얼이 빠진 영의였으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사색에 잠긴 잘생긴 청년이었을 뿐이다.
“저기, 주문하신 햄버거 세트 두 개, 나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주문은 완료되었고, 영의는 종이봉투에 담긴 햄버거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사장님한테 안부도 전해 주세요.”
영의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려 했지만, 안쪽의 주방에서 호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부 안 전해 줘도 된다! 사실 나도 너 온 거 알고 있었어!”
“계셨으면서 안 나오셨네요!”
“낮 시간에는 내가 조리 담당하거든! 이번엔 사고 안 나게 조심해서 가라!”
“네, 장사 잘하세요!”
“그래!”
그렇게 서로 나름의 덕담도 주고받고 나서 영의는 호찬이 자신이 온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소 지었고, 카운터의 직원은 그 미소에 직격당했다.
“아, 안녕히 가세요오…….”
“네,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영의는 보온 가방을 바이크에 달고, 헬멧을 쓴 다음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화연을 만나러 가는 길의 발걸음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이내 신화 길드 건물에 도착한 영의. 지난번의 그 검문 절차를 대충 거치고는 이내 내부로 들어섰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배달 주소는 사무실이 아닌, 지하의 훈련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들어선 영의. 지금껏 많이 드나든 건물이었지만, 지하에는 처음 와 봤다.
“오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비밀 격납고나 거대한 물류 창고를 연상케 하는 지하의 거대한 공간. 그리고 곳곳에 있는 다양한 훈련 시설들이 영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강화 계열 각성자들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정신 나간 중량의 운동 기구들부터, 사격을 위한 사격장, 속성 계열들이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어장이 펼쳐진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기술을 단련하기 위한 각종 연습용 무기들이 걸린 선반을 지나쳐 한구석으로 걸어가는 영의.
훈련장이니만큼 누군가 있을 법했지만, 아무도 이곳에서 훈련하고 있지 않았다. 한 명만 빼고는…….
지하 훈련장의 한구석, 아무도 없는 스파링용 공간에서 신화연이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었다.
얼음으로 만든 폭이 넓은 검을 들고는 그 위에 작은 얼음 공을 올려 둔 채 떨어트리지 않고 휘두르고 있는 그녀. 마치 한 폭의 그림이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후우…… 후…….”
그러나 이내 호흡이 한계에 달한 건지, 아니면 난도 자체가 어려워서 그런 것인지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는 얼음 공.
그녀는 다급히 그 공을 검으로 받아 내려 했으나 당황해서인지 공을 받아 내지 못하고 쳐 냈고, 그 공은 그녀의 뒤로 빠르게 날아갔다.
“위험……!”
누구든 맞으면 부상은 무조건 입을 것 같았기에 그녀는 다급히 뒤를 돌며 소리쳤다. 동시에 공을 잡기 위해 전력으로 마력을 개방해 달려오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 차거…….”
영의가 발전된 반응속도와 신체 능력으로 얼음 공을 잡아내 부순 것. 영의를 발견한 화연은 미소 지었다.
“왔네요, 선배.”
“그래, 왔지. 이번에도 나를 설득하려면…….”
“아뇨, 이번엔 안 할 거예요.”
영의는 화연이 말을 꺼내기 전에 미리 화연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화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부른 거야? 그냥 대화나 하자는 의도였으면, 전화로 해도 됐잖아?”
영의의 말에 화연은 말없이 구석으로 가서 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온몸의 땀을 닦아 내는 그녀. 뒤로 묶은 머리에, 레깅스 차림에 탱크톱의 그녀.
운동 후 나온 땀에 젖은 미녀도 충분히 괜찮은 그림이었지만, 땀을 닦고 나서 얼음으로 식히는 그녀의 모습 또한 퍽 아름다웠다.
“말을 해. 말을.”
그러나 옛날부터 봐 와서인지 크게 동요하지 않는 영의. 그의 재촉에 화연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뭔가 결심을 한 것인지 단호하게 말했다.
“선배, 저랑 싸워요.”
“뭐? 지금? 아니, 그 이전에…… 왜?”
A급 속성 계열 능력자가 C급…… 지금은 B급이지만, 아무튼 보조 계열 능력자와 싸운다니?
누가 봐도 괴롭힘의 현장 아니나며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면 따졌겠지만, 영의는 당장 왜 싸우는지부터 물었다. 그도 딱히 싫어하진 않는 듯했다.
“선배는 옛날부터 말로 하면 안 들었죠.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심지어 우리가 사귈 때에도!”
화연은 그렇게 말하며 땀을 식히던 얼음을 수건에 감싸 옆으로 던졌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수건이 땅에 굴렀다.
“……뭐, 내가 좀 그런 면이 없진 않았어. 그건 사과할게.”
“아뇨, 전 사과를 바라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오늘 문득 생각난 건데, 선배는 딱 하나, 대련으로 내기하거나 약속을 하면 절대 어기진 않았더라고요.”
“……그건 맞지.”
어릴 적부터 무인의 마음가짐을 배우면서 자라 온 영의는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절대적인 신용을 자랑했다.
사실 화연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해 온 것도 무인 나름의 마음가짐이 작용한 것도 있었으리라.
“그래서, 대련으로 내기를 해요. 우리.”
“내기라…… 내용은?”
“마력 없는 1:1 대결. 선배는 이미 C급은 벗어난 것 같은데, 맞죠?”
실제로 번개를 맞고 독고휘의 가르침을 받은 뒤, 마력 출력이 B급으로 올라갔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지.”
영의가 그것을 인정하자 화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나름 대등하네요. 그리고…… 패자는, 승자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줄 것.”
“무리한 건 아니겠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부탁하는 걸로 하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죽으라거나 수십억을 내놓으라거나 하는 건 영의가 들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물론 거기까진 안 하려는 화연. 영의는 그 조건까지 듣고 나머지를 묻기 시작했다.
“룰은?”
“없어요. 모든 수단을 써서 싸우죠.”
“모든 수단이라…… 좋아, 나쁘지 않네. 마력은 허용해.”
“미쳤어요?!”
영의의 말에 화연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워, 워. 진정해. 모든 수단이라면서? 그리고, 내가 B급이고 네가 A급이지만 내가 널 못 이길 것 같아?”
영의 기준에서는 나름대로 믿는 바가 있었고, 또 화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었지만 화연은 그게 만용으로 들렸다.
“선배…… 처음엔 이럴 생각이 없었지만, 안 되겠네요. 선배를 때려눕혀서라도 다신 그런 소리 못 하게 해야겠어요.”
화연은 적당히 대련하며 영의와의 관계 개선이나 해 볼 생각, 물론 잘만 풀리면 그대로 훈련 교관으로 스카우트할 생각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영의의 자신감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B급으로 올라갔다고 갑자기 자신감이 넘치고 그러면 안 돼요, 선배. 만용은 죽음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요…….’
실제로 길드 내에서도 몇몇 각성자들이 자신의 등급이 오른 것에 도취되어 마구잡이로 게이트에 들어가다 사망한 사례가 많았으므로 등급이 올라도 상당 기간 동안 관찰하며 게이트의 입장에 제한을 두거나 검증을 거쳤다.
“……글쎄, 결과는 까 봐야 아는 법이지.”
영의는 그냥 배달이나 해 주고 잠깐 대화나 해 볼 생각이었지만, 화연의 달라진 태도에 마음이 바뀌었다. 조금 제대로 해 볼 마음이 든 것.
“지금 옷은 별로인데, 혹시 좀 제대로 된 옷 있어?”
영의의 말에 화연은 벽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탈의실이에요. 운동복도 다 있으니까 입고 나와요.”
“그래, 그동안 쉬고 있어. 지친 상태로 싸워서 졌다라는 변명은 듣기 싫으니까.”
“하, 누가 할 소리를…….”
영의는 그렇게 웃으면서 탈의실로 들어가며 휴대폰을 껐다. 중간에 연락이 와서 방해받기 싫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 배달부 영의가 아니었다. 한 명의 무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의가 탈의실로 들어가자, 화연은 아까 내던졌던 얼음 수건을 다시 들어 올려 얼굴을 덮었다. 열이 올라서 조금씩 붉게 변하는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어떡해……. 왜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건데…….”
물론 진짜 더 잘생겨진 거였지만 화연이 알 도리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진정하고 있었을까, 안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영의가 나왔다.
“……이거 다 새거 같은데, 입어도 되는 거야?”
“네, 어차피 강화 계열은 그거 입고 훈련 한번 하고 나면 다 찢어 먹어서요.”
강화 계열이라고 다 힘이 강해지고 빨라지는 게 아니라 몸이 암석으로 변하는 타입도 있고, 몸이 칼날처럼 변하는 이들도 있었다.
속성 계열과 강화 계열 사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았으나, 예를 들면 몸에 불꽃을 두른다면 불꽃을 뽑아내는 마력과 몸에 강화되는 마력, 둘 중에 비중이 더 큰 쪽으로 분류되었다.
아무튼 그런 이들이 입고 훈련하는 것이니 보통 재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 입으면서 빨고 입고 하기엔 힘드니 반쯤 일회용으로 만든 운동복들이 내부에 준비되어 있었다.
“뭐, 그럼 감사히 입을게.”
영의는 그렇게 말하며 팔다리를 돌려 보며 점검했고, 운동복은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의 간단한 형태를 지녔기에 활동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운동복을 입자 영의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고, 화연은 다시 수건을 얼굴에 덮었다.
‘아…… 미쳤다, 미쳤어……. 선배 몸이 저렇게 좋았나……?’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얼굴에 수건을 덮고 떼지 않고 있자 영의가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 물었고, 화연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마음의 준비예요. 마음의 준비.”
“……그래, 알아서 해.”
이미 그의 배달 복장은 탈의실에 두었고, 음식은 훈련장의 한구석에 두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바닥에 충격 흡수용 재질이 깔려 있다는 것만 빼면 거의 아무것도 없는 수준.
‘뭐, 그래도 구석에 이것저것 있긴 하지만…….’
사소한 아령이나 벽에 있는 충전기와 화연의 것으로 추정되는 휴대폰 등이 있긴 했지만, 거의 완벽하게 빈방인 이곳. 영의는 만족하며 주먹을 쥐었다.
“좋아, 난 준비됐어. 시작하자고, 우리 방식대로.”
“네, 그럼…… 시작하죠. 우리 방식대로.”
화연은 그렇게 말하며 수건을 영의의 얼굴에 집어 던졌고, 어느새 수건은 꽁꽁 얼어 하나의 묵직한 둔기가 되어 있었다.
얼어붙은 수건을 던지며 곧바로 달려드는 화연.
“하하, 그래. 이게 우리 방식이지!”
영의는 그렇게 웃으며 수건을 피하며 몸속의 뇌기를 더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