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5화
외전 49화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본다. 무슨 대회를 나가도 얼음같이 냉정하더니. 아빠는 아빠구나. 우리 진혁이 좀 사람 같네.”
마리오는 보냉백을 열어 안쪽에 들어있는 것을 진혁에게 꺼내주었다.
“내가 만든 미트 파이 좀 가져가. 너네 애들이 좋아할 거야.”
“애들이 미트 파이를 좋아한다고?”
“명이가 좋아해서 회장님이 종종 부탁하셔. 이번엔 부탁하신 건 아닌데 너 만나는 김에 만들어 왔지.”
“……그럼 이걸 카피해서 같이 만들자고 하면 되겠군.”
“그냥 먹어라, 좀.”
마리오가 웃었다.
“너한테 애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아. 네가 대회를 그렇게 박차고 나가버리고 간 걸 내 눈으로 봤으니까.”
진혁이 뜨끔했다. 마리오는 말을 이어나갔다. 냉면 그릇은 치워지고 디저트로 따뜻한 물이 나왔다.
“하지만 애들 건강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걔들 자유의지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어? 네가 평생 대신 살아줄 수도, 선택을 해줄 수도 없다고.”
“내가 더 오래 살 수도 있잖아.”
진혁이 투덜거렸다. 마리오가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며 정면으로 진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임마. 생각을 해 봐. 너희 아버지가 아이돌 생존 경쟁 프로그램에 꽂혀서 너보고 아이돌을 하라고 한다고 생각해 봐. 너는 빵을 굽고 싶은데.”
진혁은 속이 답답했다. 따뜻한 물이 아니라 냉수를 마시고 싶었다.
“진희도 비슷한 말을 했지. 미미 씨도…….”
“나한테 똑같은 말을 세 번째 듣는 거야? 그런데도 너는 생각이 바뀌지 않아서 계속 애한테 빵 굽는 걸 시키고 싶다고 말하는 거고?”
마리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말해놓고 보니 그렇게 되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리오에게도 물어본 것이다.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리오가 한심하다는 듯이 진혁을 바라보았다.
“야, 임마. 넌 진짜 답이 없다. 빵을 만들고 싶으면 직접 만들어! 남 시키지 말고.”
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만들러 가자. 네 주방 써도 되지?”
“어어? 어? 어? 되지?”
* * *
마리오의 집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걸어서 10분 정도였다.
자녀들은 수련회에 가서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여기가 내 주방이야. 특별히 첼린스 사의 오븐을 설치했지. 집에서도 마음껏 연습하려고.”
마리오는 연한 핑크빛으로 꾸며진 주방을 자랑스럽게 공개했다. 진혁이 냉정하게 평가했다.
“이 주방은 너무 새것 같은데. 거의 안 쓴 것 아니야?”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느라 그렇지.”
“재료는 뭐 있어?”
“음. 너 지금 뭘 만들 거야?”
“밀가루 뭐 있어?”
“어디 보자.”
오랜만에 보는 젤로스 사의 밀가루였다. 진혁이 반갑게 말했다.
“이거 내가 좀 써도 되지?”
“쓰라고 꺼냈다.”
“무염 버터, 우유, 설탕, 달걀, 바닐라빈.”
진혁이 자기가 원하는 재료를 줄줄이 읊었다. 마리오는 착실하게 재료를 하나씩 꺼내 주었다. 동시에 뒤집개와 거품기, 과도와 스테인리스 볼, 채와 도마도 꺼내 주었다.
“달걀은?”
“아주 알차게 사람을 부려먹어요.”
마리오는 듣지 않아도 진혁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커스터드 크림 수플레 만들어 주려고?”
“네가 파리에서 좋아했잖아.”
예전에 대회에 참석했을 때 만들어주었던 음식이다. 마리오는 추억을 되새기며 흐뭇하게 말했다.
“재료 다 네 맘대로 써라.”
“그래.”
주방은 꽤 넓었다. 진혁은 준비된 재료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리고 톡 하니 달걀을 깼다.
“달걀노른자 분리기 여기에 있는데.”
“그건 필요 없어.”
진혁은 자기 집처럼 찬장에서 유리컵을 두 개 꺼냈다.
“그냥 바로 분리하게?”
진혁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달걀노른자를 분리했다. 틀도 없이 빠르게 분리된 주홍빛 노른자가 탱글하니 스푼 위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반짝반짝하니 더 신선해 보였다.
“5년 동안 쉬었다더니 손이 하나도 느려지지 않았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따로 분리하고 나서는 흰자에 거품을 치기 시작했다. 머랭을 만들기 위해서다.
손목을 날렵하게 움직이며 진혁이 웃었다.
“이렇게 거품기를 쓰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야. 아버지가 가르쳐주실 때 이런 식으로 옆에서 서서 가르쳐 주셨지.”
마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다음에는 기계식 거품기만 썼어?”
“그런 셈이지.”
스테인리스 거품기의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나무 손잡이는 조금 작았다. 성인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간단하게 할 때는 이런 거품기가 편하잖아. 이거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형이 사 준 거야. 그때는 내가 안 좋은 일이 좀 있었는데…….”
마리오의 속도라면 4분 정도 걸렸을 것이다. 진혁이 흰자를 머랭 치는 데에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진혁은 설탕을 넣고 거품을 쳐서 부풀어 오른 흰자에 노른자를 넣고 다시 휘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리오가 박력분을 체에 걸러주었다.
“이 정도면 되지?”
그리고 다른 재료들을 추가적으로 꺼내 주었다. 진혁은 방금 마리오가 체 쳐낸 박력분에 이어 바닐라 익스트랙트와 버터를 다시 넣으며 풀어주었다.
주홍빛이었던 색깔이 점점 더 연한 상앗빛으로 변해갔다.
데운 우유를 넣자 조금씩 거품이 생겼다. 거품기로 계속해서 휘저으며 진혁은 평온해졌다. 복잡하게 휘몰아치던 마음도 고요해지는 듯했다.
마리오가 창문을 열었다. 정원의 벚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잎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물엿은?”
“여기에 있어.”
“회사에서 쓰라고 준 건데 왜 집에 있어?”
“아, 연구하려고 가져왔지! 새 레시피 만드는 연구는 다 집에서 한단 말이야. 이거 수플레 위에 뿌릴 거야?”
“그러려고.”
“메이플 시럽도 있는데.”
“내가 만든 물엿이 더 맛있어.”
“그건 그렇지.”
달궈둔 팬에 버터를 둘렀다. 붓으로 바를 필요도 없이 막대 형태의 버터를 살살 문지르자 바닥에 얇게 깔렸다. 진혁은 조심스레 그 위에 머랭 반죽을 얹었다.
몽글몽글하니 미술작품처럼 얹혀놓은 머랭 반죽을 보고서 마리오가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예술적인 이 모양 봐라. 그냥 반구를 얹어 놓은 것 같네. 같은 스패츌라를 쓰는데 어떻게 이런 모양이 나와?”
마리오의 수플레 반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 자기 반죽에 거품을 냈다. 진혁이 말했다.
“거품기 줘.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너랑 내 실력 대결을 하려고 했는데.”
“진짜 하고 싶냐?”
“……어흠, 흠.”
마리오는 거품기를 건네주면서 덧붙였다.
“내가 너한테 양보하는 거야. 오 년이나 쉬었으니까 말이지.”
“그래, 그래.”
진혁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팬 위에 자기 뚜껑을 올리고 5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마리오의 반죽을 휘휘 저었다.
마리오는 진혁의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나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깨뜨린 달걀 껍질과 달걀을 놓았던 유리컵, 그리고 다른 그릇들도 씻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
그릇들이 부딪치며 나는 달그락달그락 소리.
그리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팬 위의 반죽이 익어가는 소리까지 전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진혁은 이 평안이 고마웠다.
이곳에서 그는 남편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저 마리오의 친구이자 페이스트리 쉐프였다.
“그 거품기 다 썼으면 이리 줘.”
마리오가 입을 열었다. 진혁은 명상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마리오가 옆에 있다는 것도 한순간 잊어버렸던 것이다.
“여기 있어.”
“고마워.”
마리오는 마지막으로 거품기를 씻었다. 거품기 위에 자몽향 주방 세제가 덧씌워지고 하얗고 몽글몽글한 거품이 났다. 거품기가 거품에 뒤덮이니 어쩐지 조금 우스웠다.
“거기 거품 나니까 먹는 것 같다.”
“냄새부터 다르잖아?”
“맞아.”
진혁은 두 번째 반죽도 팬 위에 올렸다. 두 번째 팬은 사각 팬이었다. 사각형 뚜껑을 올린 후에 첫 번째 팬의 뚜껑을 열어서 살짝 뒤집었다.
“이 뒤집개도 그때 선물 받은 거야?”
“아니, 그건 딸 거야.”
이 뒤집개도 크기가 좀 더 작았다. 청소년이 쓰기에 좋을법한 모양이었다.
“나무 손잡이에 손때가 묻어있어서 오래됐다고 생각했는데.”
“딸이 아기 바구니에 담겨서 보육원 앞에 놓여 있었는데 그때 같이 들어 있었던 물건이래.”
“……뒤집개를 아기 바구니에 같이 넣었다고?”
“응, 그렇다고 하더라. 뒤집개랑 마들렌이 들어 있었대.”
“허, 참. 뒤집개랑 마들렌이라. 이상한 조합인데.”
진혁은 떨떠름하게 뒤집개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저 평범한 뒤집개라고 생각했던 것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러면 이렇게 부엌에 두고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야, 야. 그런 걸 신경 쓸 거면 찬장에서 유리컵도 마음대로 꺼내지 말았어야지. 그건 내가 셀프 생일 선물로 베네치아에서 산 거라고. 100년째 가업을 이어오는 유리 장인이 불어서 직접 만든 거란 말이야.”
“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리오가 말을 이었다.
“딸이 뒤집개를 그냥 쓰고 싶다고 하더라. 나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은데.”
“왜?”
“아기용 요람에 넣었든 어쨌든 버린 거잖아. 자길 버렸는데 거기에 같이 넣어서 버린 거니까. 나라면 그냥 갖다 버렸을걸? 부모 따위 꺼져라 하고.”
코끝에 향긋한 수플레의 향기가 아른거렸다. 조금 전까지는 덜 익은 밀가루의 향기였다. 거의 다 익어간 것이다.
진혁은 수플레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니면 그걸 아주 소중하게 액자에 넣어서 보관했을 수도 있고. 탐정에게 맡겨서 추적해서 친부모를 찾았을 수도 있고.”
마리오는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냈다. 갈색 병에는 깔루아라는 상표가 붙어있었다. 그는 옆에 나와 있던 우유를 컵에 조금 부었다.
칵테일이라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진혁이 이야기를 재촉하며 첫 번째 팬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파란색 폴란드식 꽃무늬 접시에 수플레를 옮겼다.
“그런데 마리 베네딕트는 그 뒤집개가 고맙다고 하더라고.”
두 번째 수플레도 거의 다 익어가고 있었다.
“왜?”
“그 뒤집개랑 마들렌 때문에 제과제빵에 흥미가 생겼다고. 제과제빵을 잘했으니까 마리오 파파가 날 데려온 거 아니냐고.”
결국, 제 자랑이었다. 진혁은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아, 그래. 널 만나서 좋대냐?”
“그럼, 아주 좋대.”
마리오가 씨익 웃었다.
“나도 좋아. 마리 베네딕트하고 마티아스를 보고 있으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이 세상이 좀 더 애들이 살만한 세상이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환경 단체에 기부도 시작했고, 분리수거도 열심히 하고 있지.”
“……일반 쓰레기통에 귤껍질이고 뭐고 다 쑤셔 넣던 놈이.”
“우리 애들이 살아갈 세상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마리오의 표정.
창밖에 들이치는 햇살.
벚나무를 향해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진혁은 오랫동안 그 풍경을 잊지 못했다.
“수플레 다 됐다, 먹어라.”
“오! 이거 하나는 우리 애들 줘도 돼?”
“그러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