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654화 (654/656)

제 654화

외전 48화

* * *

홍대의 이자카야.

비서가 아예 룸을 통째로 예약해 주어 대화를 나누기 좋은 곳이었다.

오랜만에 본 마리오는 전보다 조금 더 살이 찐 것 같았다. 머리카락 숱도 줄어들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면 진혁이 훨씬 더 어려 보인다. 마리오는 체크무늬 재킷을 벗어서 걸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요양을 한 거야? 효과 좋은데.”

마리오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진혁이 웃었다.

“시골.”

“어딘지 소개 좀 해 줘. 아주 인연을 다 끊고 잠수 타더니 얼굴이 좋아졌네.”

진혁은 비빔냉면과 물냉면 중 물냉면을 선택했다. 반면에 마리오는 비빔냉면을 골랐다. 진혁이 놀라서 물었다.

“너 매운 거 못 먹지 않았어?”

“내가 한국 들어온 지 5년이다, 5년. 이제 비빔밥에 고추장도 넣어 먹고 비빔국수도 먹을 수 있어.”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5년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순 외국인 입맛이라 김치도 제대로 못 먹던 마리오의 입맛이 변했다.

“마리오의 스파이시 푸드 블록 라인이 맨해튼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데. 이번에 통영에도 들어갈 거야.”

“통영?”

“통영에 푸드 팩토리 분점 들어가잖아? 거기서 한국식으로 개량한 매운 음식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아아.”

어제 보고를 받았을 때 통영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에 팝업스토어로 입점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팝업스토어를 성사시킨 것도 한국 프랜차이즈를 연 것도 전부 미미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황미미는 정말로 뛰어난 사업가였다.

‘대단해.’

진혁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녀는 진혁이 대표이사로 재직하는 동안에 해둔 사업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아니라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명이의 교육에 충분히 신경을 썼다.

“이번에 황 회장님이 도와주셔서 이것도 샀다고.”

마리오는 팔목에 찬 시계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이게 뭔데?”

물론 진혁은 시계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오. 너 정도 되면 이제 이런 것도 알아봐야지. 파텍 필립 한정판이야.”

마리오가 투덜거렸다. 몇억을 주고 샀다며 자랑하는데 진혁이 놀랐다.

“시계가 집 한 채 값이네.”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슬아슬하게 대기해서 샀다고.”

진혁은 다시 한 번 마리오를 훑어보았다. 시계만이 아니었다. 드레스 셔츠의 옷깃과 양복의 재질, 그리고 구두와 가방 모두 양품이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하기도 했다.

“지금 네가 차고 있는 리미티드 모델보다는 못해도 꽤 구하기 힘든 거라고.”

진혁은 손목에 차고 있던 플래티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보니 마리오가 차고 있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시계가 그것보다 비싸다고?”

백금 시계의 가격을 따로 따져 보지는 않았다. 금시계가 아니니 그저 그런 시계겠거니 했다.

“황 회장님한테 결혼 예물로 받은 거잖아.”

“그러네.”

하지만 선물한 사람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미미가 선물하는 제품들은 진혁이 상상할 수 없는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진혁은 화제를 바꾸었다.

“독신 입양을 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며. 어때?”

“어떠냐니? 너도 입양을 하고 싶어서?”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육아를 하면서 어떤가 싶어서. 갓난아이도 아니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애를 데려왔다며.”

“응, 마티아스랑 마리 베네딕트.”

마리오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동양인 소년과 백인 소녀가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두 명이야? 언제 늘었어?”

“마티아스는 베트남 출신이야.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국제학교에 다니니까 한국말을 익히는 게 늦더라. 그리고 요즘은 케이팝에 빠져서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난리야. 노래 따라 하더니 한국말도 금방 배우더라.”

“마리 베네딕트는?”

마리오는 자랑스럽게 사진첩을 넘겨 마리 베네딕트가 오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얘는 축구랑 마들렌 굽기를 좋아해.”

“마들렌만?”

“마들렌이 좋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집에 조개 모양에 부채 모양, 복숭아 모양 마들렌 같은 마들렌 틀이 늘었어. 그러잖아도 이번에 마리 베네딕트가 구운 마들렌을 좀 가져왔으니까 가져가.”

“……나한테? 왜?”

“페이스트리 아트를 창시한 신비로운 은둔자 임진혁 쉐프. 나름대로 꽤 유명하다고.”

“그게 뭐야.”

“맨해튼에서 그냥 음식만 판 게 아니야. 미술관에서 푸드 팩토리의 블록을 예술 작품으로 전시하기도 했지. 다른 전시회도 속속들이 열리고 있다고. ‘먹을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작가는 이제 너 말고도 많아. 시몬 쉐프님도 학교 그만두고 나와서 이제는 아예 이쪽 계열 아카데미를 설립하셨잖아.”

“와.”

진혁은 감탄했다. 그가 심산유곡에서 은거하고 있는 동안 세상이 변했다. 마리오는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업계 동향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진혁이 정말로 듣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까 네 장남 마티아스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너는 그걸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긴? 아무 생각 없는데?”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거잖아.”

“그냥 춤추고 노래하면 되지.”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전에 나한테 문자 폭격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았어. 애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빵도 만들고 쿠키도 굽고 할 거라고 했잖아. 네 레시피들을 전수해 줘서 강 씨 가문 대대손손 빵 가게를 물려줘서 소망 베이커리보다 더 훌륭한 가게를 만들 거라며.”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마리오가 키득키득 웃었다.

“여기 증거도 있다. 문자도 남아 있어.”

진혁이 스마트폰 메시지 목록의 스크롤을 올렸다. 구형 스마트폰을 보고 마리오가 정색했다.

“야, 너 스마트폰부터 바꿔라. 누가 요새 그런 걸 들고 다니냐.”

“멀쩡히 작동하는데 왜?”

“배터리 빨리 끊기지 않아?”

“연락은 거의 다 비서 통해서 하니까. 내가 직접 핸드폰을 만질 일은 없지.”

“…….”

침묵이 흐르는데 점원이 노크를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점원이 말했다.

“냉면 나왔습니다. 이쪽 분이 비냉이시지요?”

“네, 접니다.”

진혁은 물냉면을 받았다. 파란색 도자기 면기는 둥글고 깊었다. 돌돌 말린 갈색 면 위에는 반으로 자른 완숙 달걀과 길게 썬 무와 오이채가 놓여 있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풍겼다.

진혁은 물냉면의 맛을 조금 보았다. 삼삼한 육수는 맛이 깊고 시원했다.

“흠.”

그리고 식초를 조금 뿌렸다. 그리고 겨자도 얹었다. 식초와 겨자가 잘 풀어지도록 젓가락을 휘휘 젓고 나서 한 입을 먹었다.

“나쁘지 않네.”

몇 년만에 먹어보는 냉면이었다. 진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오는 비빔 냉면의 소스를 빈 그릇에 떠내더니 남아있는 양만 비비기 시작했다.

“매운 거 잘 먹는다며.”

“잘 먹으니까 지금 이만큼이나 먹는 거지.”

“소스를 1/10밖에 안 넣은 것 같은데. 그럴 거면 물냉면 먹지. 이거 메밀 쫄깃하고 괜찮아.”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며 마리오가 투덜거렸다.

“비빔냉면도 같은 면이야.”

진혁은 집요하게 한 가지 화제를 파고들었다.

“아이돌 하라고 데려온 게 아니잖아. 집안을 일으켜 세울 대들보를 데려온 거지.”

마리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가에는 비빔 소스가 묻어 있었다.

“마티아스가 제과제빵을 해서 강 씨 제빵소를 만들면 좋긴 하겠지. 뿌듯하기도 하고. 그런데 싫어하는 걸 시켜서 뭐 해? 걔가 만드는 빵은 맛도 없어. 안 팔려서 하루 만에 바로 망할걸.”

“마리 베네딕트는?”

“걔는 축구 좋아해. 축구선수 하고 싶다고 얼마나 뛰어다니는데.”

마리오는 태평해 보였다. 진혁이 아이들의 사회 적응과 장래에 대해서 고뇌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괜찮아?”

“아니, 뭔가 오해가 있는데.”

마리오는 절박해 보이는 진혁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진혁이 왜 이 화제에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고민했다. 아마도 자녀 교육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책이가 다른 애들하고 거의 상호작용 없이 오래 혼자 있었지?’

그렇다면 걱정할 만도 하다.

“처음에 마티아스를 데려온 건 이기적인 동기였어. 네가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하는 걸 보면서 나도 나만 바라봐주는 가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지. 대뜸 입양부터 하지 않고.”

진혁이 지적했다. 마리오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페이스트리 쉐프니까 대회에서 이길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단 말이지? 처음에 이론 시험도 망쳤고. 그런데 그 다음 시험에서 평가를 좋게 받아서 수상을 했어. 그리고 파리에 가서 보육원에서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서류를 몇 장 추려주는데 너무 많은 거야.”

“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 급식이 별로였어. 그런데 가끔 하는 제과제빵 체험 클래스에서는 직접 만든 빵을 가져갈 수 있어서 따끈따끈한 빵을 먹을 수 있었대.”

“그래서 거기에 관심이 있는 애가 많았던 건가?”

“그렇지. 나 빵 좋아해요 하는 애들 말고 제과제빵 클래스를 자주 듣는 애들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뭐 여기 애들 전원이 클래스를 들으니까. 봐야 할 서류가 너무 많더라고.”

“그래서?”

마리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그냥 동양인 남자애를 데려왔지. 파리에서 한국인으로 자라는 게 힘들었으니까. 걔가 나 따라서 한국 오면 좀 더 낫겠다 싶더라.”

“그리고 걔가 너네 집에 오니까 이제 빵 굽기가 싫대?”

“맞아. 우리 집에 와서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나니까 빵에 대한 흥미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 같더라.”

마리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사실 좀 기뻤어.”

진혁은 물냉면의 면발과 오이채를 함께 씹었다. 아삭하고 싱그러운 오이채와 쫄깃한 메밀면이 잘 어울렸다. 연한 사골 육수의 느끼함도 겨자가 잡아주어 괜찮았다.

“빵을 만들기 싫다는데 그게 왜 기쁠 일이야?”

“마티아스는 처음부터 나를 어려워했어. 열두 살에 데려와서 이제 열일곱 살이 됐는데 뭐가 갖고 싶다거나 하고 싶다거나 이런 얘기를 전혀 안 했단 말이지.”

마리오는 손톱만큼 소스를 묻힌 비빔냉면도 매웠는지 동치미를 물처럼 마셔댔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못 먹는 거 맞네.’

입가를 닦으며 마리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아이돌이 하고 싶다고 어렵게 말을 꺼내더라. 그걸 들으니까 반가웠어.”

“그렇구나.”

“본심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친해졌다는 거잖아. 그런데 네 아들들은 이제 여섯 살이잖아? 빵 굽기가 싫대? 과자 만들기는 한창 좋아할 나인데.”

“싫대. 절대 안 한대.”

진혁이 풀이 죽어서 말했다.

“취미로도 절대 싫고 주말에도 할 일 없고 평생 안 할 거래. 하기만 하면 아주 잘 할 텐데.”

마리오는 말을 하는 진혁의 표정을 보고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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