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3화
외전 47화
황미미는 책이를 일반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황 그룹이 후원하고 있는 영어 유치원에 입학하도록 했다. 이곳은 명이가 3살 때 다녔던 곳이었다.
사립 국제유치원.
“이건 뭘까요?”
“B!”
어린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번쩍 들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다 같이 노란색 상의를 입고 있어서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 중 제대로 내공 수련을 한 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게 정말인가.’
책이는 슬펐다.
지금 시대에는 아무도 무공 수련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전에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무력집단을 보고서 유추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 유치원에 오니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명문가의 아이들만 모아서 교육을 시키는 학관이라더니.’
황미미의 설명을 듣고 그는 기대를 했다. 명문정파의 후계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영약을 먹고 훈련을 받아 강해진다. 정사지간이나 사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수련을 한 아이들은 한 명도 없잖아.’
유감스럽게도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이들은 저마다 선행 학습을 해서 알파벳 정도는 다 뗀 상태였다.
그 결과 학력 테스트에서 책이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낮은 반 중에서도 영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이 배정되는 초급반에 배정되었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책이보다 두 살이나 세 살이 어렸다. 그러잖아도 덩치가 크고 체격이 좋은 책이었기에 소인족 세상에 온 거인족처럼 튀었다.
“아주 잘했어요. 그럼 이건?”
“C!”
“책이 어린이도 이야기해 볼까요?”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거짓되게 꾸며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교사는 조금 놀랐다.
‘허세를 부리지 않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는 모를 때가 있다. 특히 이번처럼 동생들은 아는데 자기가 모르는 경우에는 거짓말이라도 해서 대답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이는 모른다고 인정했다.
선생님은 그 자세를 좋게 보았다.
“이건 D라고 해요.”
“저것도 모르나?”
“모르네.”
다른 아이들이 알파벳을 모르는 덩치 큰 형을 보며 수군거렸다.
책이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에 수치심을 느꼈다.
‘나만 저 글자를 모르는구나.’
학급의 인원수는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여덟 명이었다. 하지만 다들 번갈아서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그만 아무것도 몰랐다.
“…….”
책이는 A부터 Z까지 수업 시간 내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책이만 알파벳을 단 한 글자도 몰랐다. 아이들은 새로 온 아이를 경계했다. 흘깃흘깃 보기만 하고 말을 걸지 않았다.
이곳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에 오기 전에 어린아이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책이는 생각을 고쳤다.
‘애들은 곧 나를 존경하고 좋아할 테지.’
그랬던 경험에 비추어 짐작했다.
남궁가의 후계자였던 시절에 또래 아이들은 그를 경외하며 존경했다. 학우로 선정된 방계 가문의 아이들도 그의 권위를 존중해 주었다.
부잣집 장남의 삶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었다. 황미미는 다정하고 상냥한 어머니였고 임진혁은 엄격했다. 그렇지만 고용인들 모두 아이들을 위해 주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선생님, 쟤는 왜 저기 앉아 있어요?”
“쟤가 책장 가려요.”
여자아이 하나가 손가락질을 했다.
그는 구석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에는 동화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책이를 두려워하며 가까이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책이는 눈치가 보여 다른 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아이가 말했다.
“쟤 때문에 블록도 못 꺼내요.”
책이는 아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기운을 느껴서 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런 기운을 느낄 정도로 민감하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반에 들어온 낯선 아이를 불편해할 뿐이었다.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고역스러웠다. 아이들은 블록을 가지고 쌓거나 던지면서 놀았다. 소년 두 명은 방금 쌓아둔 블록 사이를 피해서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놀이를 했다.
여자아이 네 명은 그림책을 배경으로 펼쳐놓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 아들을 유혹하다니! 이 김치로 맞아라!”
“에잇! 깍두기 방패!”
저마다 팔을 휘적거리며 노는데 나름대로 즐거워 보였다.
자동차를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서로 누가 이겼다느니 하며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가 바로 화해했다.
“…….”
아이들에게는 책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리가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뭔가 말이 통하는데 책이는 그걸 파악하지 못했다.
책이는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시간이 곤욕스러웠다. 빨리 그만두고 집에 가고 싶었다.
“식사합시다!”
점심 식사는 방울토마토를 곁들인 카레와 미니 돈가스였다. 책이도 귀여운 곰돌이가 양각된 캐릭터 젓가락을 받았다.
바삭바삭한 돈가스는 기름기가 없었다. 당근과 완두콩, 양파와 브로콜리가 골고루 들어간 카레는 맵지 않고 달콤했다. 책이는 돈가스를 잘라서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책이는 젓가락을 아주 잘 쓰네요.”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었다. 교정 젓가락을 사용해서 젓가락질을 하고 있던 다른 애들이 책이를 바라보았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흥.”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단 여자아이가 코웃음을 쳤다. 빨간 리본을 단 여자아이는 이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 젓가락을 쓰고 있었다. 그 애는 침착하게 젓가락을 밥공기로 향했다. 그리고 밥알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기 시작했다.
“명희도 아주 잘하네.”
빨간 리본을 단 여자아이가 선생님의 말에 활짝 웃었다. 그리고 견제하듯 책이를 바라보았다. 그 솔직하고 노골적인 행태를 보고서 책이는 부끄러워졌다.
다음 시간은 유아 체육 수업이었다.
“우리 친구들! 오랜만에 다시 만났네요. 즐거운 준비 체조부터 해 볼까요?”
유아 체육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이고 두 발을 벌려 깡총하고 뛰어올랐다.
“이게 딸기 모양이에요. 발 모양이 딸기 같죠?”
과일 모양으로 뛰어오르기라는 수업이었다.
“딸기 아닌데요.”
소년 한 명이 불퉁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건 사과 모양입니다!”
조금 전보다 두 발을 더 넓게 벌려서 뛰면서 양팔을 둥글게 모아 원형을 만든다. 그 다음에 다리를 더 넓게 벌린 다음에는 팔도 퍼덕거렸다.
“이건 수박 모양입니다!”
“와아아!”
선생님의 표정은 근심 없이 환했다. 아이들은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따라 했다.
책이는 한 번만 보고서도 그 동작을 무리 없이 똑같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리를 더 적게 벌리기도 하고 팔을 더 세차게 흔들기도 했다.
‘이렇게 쉬운데 왜 못하는 거지?’
그 모습이 한심해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은 자신의 팔다리가 몸통에 붙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꼭두각시 인형도 이보다는 더 잘 움직일 것이다.
빨간 리본을 단 여자아이 명희는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저러다가 넘어지지.’
책이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 들었다. 명희는 어설프게 뛰어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었다.
콰당.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명희가 울기 시작했다.
“흐와아아앙.”
책이는 선생님이 힐난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아이를 감싸 안았다.
“우리 명희 잘 뛰었는데 넘어졌구나. 이제 호 했으니까 괜찮아요. 그렇지?”
“웅!”
체육 선생님이 깨끗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자 명희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
5초 전까지만 해도 서러워 죽겠다는 듯이 울던 아이가 순식간에 발랄해져서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명희만이 아니었다. 다른 어린아이들도 감정이 휙휙 바뀌었다.
* * *
지옥처럼 느껴지는 여섯 시간이 끝나고 낯익은 기운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책이는 크게 안심했다.
“책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보육교사가 안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제발!”
책이는 제일 먼저 뛰쳐나왔다. 그리고 진혁에게 하소연을 했다.
“오늘 하루는 너무 힘들었어.”
차 안에는 명이와 황미미가 앉아 있었다. 명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유치원을 처음 가니까 그래. 친구 생기고 그러면 재미있어져.”
나름대로 위로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책이는 그 위로가 불쾌했다.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똥구멍 같은 게!”
명이는 바로 받아쳤다. 두 아이가 티격태격하는데 황미미가 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로 두세요.’
무어라 참견하려던 진혁은 미미의 시선을 받고서 입을 다물었다.
네 사람은 자택으로 돌아와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미미는 책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알파벳을 배웠어?”
“A부터 Z까지.”
“대단하네요.”
그림 모양 그대로 글자의 이름을 외웠을 뿐이다. 하지만 미미는 계속해서 책이를 칭찬해 주었다.
“유치원도 잘 가고 대단하네.”
“나는 알파벳 다 알아요, 엄마.”
“명이는 오늘 뭘 배웠어?”
“오늘은 한문 배웠어요. 높은 산에 밤이 먼저 와서 낮이 빨리 오려고 내려오는데,”
명이가 동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혁이 들어보니 높을 고와 낮을 저, 낮 주와 밤 야 등 한자를 활용해서 만든 동화인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와 글자를 묶어놓은 것이다.
“한문이라면 나한테 물어봐도 되는데.”
책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명이는 책이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알파벳도 모르는 애가 한자를 어떻게 알아.”
“그건 내가 잘 안다니까.”
미미가 빙긋 웃었다.
“책이도 한자 수업을 같이 들어볼까? 그러면 둘이 어떤 걸 알고 모르는지 알 수 있겠지?”
한자라면 자신이 있었다. 책이가 바로 대답했다.
“할래요!”
식사는 카레라이스였다. 책이가 카레라이스를 보고서 말했다.
“점심에도 똑같은 거 먹었는데.”
미미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이 장남을 타박했다.
“먹을 걸 가지고 불평하면 안 되지. 그냥 먹어.”
미미가 진혁을 바라보면서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진혁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미미의 미소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진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웠다.
그제서야 미미가 고개를 돌려 장남에게 시선을 주었다.
“책아, 유치원 점심식단에 카레가 나온 줄 몰랐네. 원래 오늘 카레가 아니라 돈가스였을 거야.”
“돈가스도 나왔어요.”
“그렇구나. 이 카레는 그 카레하고 향이 달라. 한번 냄새를 맡아 볼래?”
책이가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두 끼 동안 같은 음식 먹어도 괜찮아요.”
그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집어 카레 소스에 콕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얘가 왜 이래?’
진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황미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책이가 젓가락질도 아주 잘하는구나.”
책이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진혁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 옆에서 명이도 젓가락을 들어서 밥알을 하나 집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지 밥알을 뭉텅이로 집어 들었다. 그런 명이를 보고 미미가 말했다.
“엄마는 카레라이스는 숟가락으로 먹는 게 편하더라.”
진혁은 분위기를 살폈다.
‘젓가락질 정도로 칭찬을 받는 건가? 당연한 건 아니야?’
하지만 아이들은 화목했고 미미는 기뻐 보였다.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고작 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