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2화
외전 46화
“미미 씨. 잠시 저와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진혁의 말에 미미가 고개를 들어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네. 차를 마실까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보이차가 있어요.”
두 사람은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선 미미는 옆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다실이었다.
고풍스러운 티 테이블 위에는 우아한 꽃무늬 도자기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고, 두 사람분의 찻잔과 티스푼이 준비되어 있었다.
의외로 티 푸드는 없었다.
진혁이 두리번거리자 미미가 싱긋 웃었다.
“스콘이나 쿠키 같은 걸 내놓으면 그걸 드시느라 제 이야기에는 집중하지 않을 테니까요.”
담담하기만 한 그 말에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진혁은 과자나 쿠키, 초콜릿 같은 것을 즐겼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이건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탐구했다.
그래서 미미는 간식 시간에 항상 새로운 티 푸드를 내놓곤 했다.
덕분에 할 말은 부족하지 않았다. 진혁은 새로운 티 푸드를 내놓은 제작자에 대해서, 스콘을 어떻게 구웠는지 클로티드 크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진혁은 미미 역시 그 대화를 즐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티 푸드를 일부러 내놓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은 싫어했는데 맞춰주고 있었던 건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빵과 케이크와 쿠키, 그리고 크림과 초콜릿.
모두 진혁이 사랑하는 음식들이다.
‘그것도 불편했던 건가.’
진혁은 자신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준비해 왔던 초콜릿과 쿠키, 케이크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불편했던 걸까.
진혁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자 미미가 웃었다.
“진혁 씨가 만들어주신 티 푸드는 전부 맛있어요. 너무 맛있어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예요.”
진혁을 장남과 함께 보낸 후에 황미미는 크게 후회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도 길다고 생각했는데, 초콜릿이 너무 맛있었다. 무심코 설득당해 버렸다.
중간에라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진혁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면서 거절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보낸 DVD와 블루레이 영상들도 제대로 틀어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나중에는 화가 났다. 그리고 체념했고 수용하게 되었다.
진혁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1년, 2년, 3년 그리고 마지막 2년 모두 견디기 쉽지만은 않았다.
그때 진혁이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같이 먹지 않고 따로 보내겠습니다. 이번에 레시피를 많이 생각해 두었으니 오늘 밤에라도 만들어서 줄게요.”
진혁의 말을 듣고 미미는 한숨을 쉴 뻔했다. 자신은 남편이 자신을 생각하며 만든 달콤한 간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남편을 더 좋아했다.
그녀는 표정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실망한 눈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야.’
진혁은 지금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제대로 대응하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초반부터 미미가 너무 맞춰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5년은 너무 길었어.’
미미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제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 * *
첫 1년.
미미는 미칠 것 같았다.
둘째 명이는 힘이 셌다. 황미미가 눈앞에 있으면 힘을 쓰지 않았지만, 미미가 눈앞에 없으면 이것저것 망가뜨렸다. 물건이 망가지는 건 괜찮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쳤다. 미미는 그래서 항상 명이와 함께 있어야 했다.
사업적인 거래나 미팅을 할 때도 명이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진혁의 일을 오롯이 떠맡아 바쁜데 그 와중에 진희에게 선물할 집도 알아봐 주어야 했다. 그것도 기분이 나빴다.
미미는 시누이 진희가 지나치게 진혁과 관계가 가깝다고 생각했다. 고가의 선물을 주고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도 하지 않은 ‘집’을 선물하는 것은 너무했다.
그래서 지시대로 집은 선물했지만 다른 것은 돕지 않았다. 진희는 타지에서 집을 수리하느라 고생을 했다. 루이스와 마리오가 열심히 도와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미미가 계속 곁에 머무르자 명이는 더 이상 힘을 쓰지 않았다. 예전처럼 괴력 같은 힘을 발휘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더 이상 운기를 하지도 않았고 보법이나 권법을 연습하는 일도 없었다. 바로 옆에서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며 봐주는 사람이 사라지니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미미는 이것을 긍정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육아 교육 전문가들을 불러와 수학과 음악, 외국어 교육을 시켰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명이는 왕 노릇을 했다. 힘도 셌고 체구도 크고 똑똑하기까지 했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랐다. 남편이 없어도 아이가 있으니 버틸 수 있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자주 들러서 아이를 봐주었다. 아이는 진혁을 똑 닮았다.
장남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수련에 방해될까 봐 자주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저 빨랫감이 늘었다거나 밥양을 늘려야 한다거나 하는 소식만 들을 뿐이었다.
3년이 되자 명이는 거의 평범한 아이처럼 굴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여전히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체격이 좋기는 했지만 한 살 더 많은 아이들 사이에 집어넣으니 해결이 되었다. 엘리엇의 의견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블록을 옮기면서 블록을 부수거나 문을 열면서 문손잡이를 으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4년이 되자 진혁을 평생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이 되어 마침내 진혁이 나온다고 했을 때에는 안도감보다 원망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렇게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황미미는 진혁을 바라보면서 똑바로 말했다.
“책이에게 들었어요. 1년이 지나고 나서 건강해졌지만, 더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4년을 더 머물렀다고요.”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진혁이 보기에 책이의 멘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둘째만이 아니라 첫째의 기억 역시 날려 버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지?’
책이가, 남궁소천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이 되었다. 진혁은 미미에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모두 차를 마시지 않아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진혁은 손을 뻗어 찻잔을 어루만졌다. 미미의 앞에 있던 찻잔이 따스하게 데워졌다.
미미가 따뜻한 찻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부 하니 긴장이 풀린 것이다.
“저는 5년 동안 책이를 가르쳤습니다. 대련을 하기도 하고, 무공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듣는 것이었습니다.”
“듣는 것이요?”
“예, 지금처럼요.”
진혁은 기간이 길어졌던 이유를 설명했다.
“어린아이들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올 날이 길지만, 노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다르죠. 책이는 그 감각이 완전히 어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스스로 내면을 관조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가 심마가 오면 안 되니 제가 필요했고요. 보내주신 책이나 DVD 같은 것들을 활용할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진혁은 차가운 차를 그대로 마셨다. 데우지 않았어도 향기가 좋았다. 그가 말했다.
“보내주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미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와 남편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었다.
친구와 직원들은 부부상담 전문가를 추천했지만, 미미는 거절했다. 진혁은 자신의 속마음을 상담 전문가에게 터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간곡하게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책이가 살아가려면 무공 수련보다 사회화가 더 필요해요. 명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배웠지만, 책이는 놓친 부분이지요.”
“음.”
“지금도 너무 늦었으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유치원에 나가게 해야 해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당장 미미 씨한테 유치원을 다니라고 하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지금 책이의 정신 연령은 이미 성인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조금.”
“걔는 우리 사회를 잘 모르잖아요?”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또래들이 정신적으로 어리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지금은 당신 말고 자기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야 해요. 어린애들은 다른 아이가 좀 달라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춘기 청소년이나 성인들은 정말로 거리를 둘 거예요.”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지금 낯설고 불편할 때 시작해야 해요.”
미미는 진혁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저하고 책이도 가까워져야 해요. 당신도 명이하고 관계를 다시 만들어나가야 하고요.”
진혁은 앞으로 책이의 교육 일체를 미미에게 맡기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면 책이는 앞으로 어떻게 교육을 받게 됩니까?”
“일단 명이와 다른 유치원을 다닐 거예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지금 상태로는 두 사람을 조금 떨어뜨려 놓는 게 낫겠어요. 오전에는 각각 다른 유치원에서 수업을 받을 겁니다. 대신 오후의 그룹 과외 시간에는 같이 교육을 받을 거예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후의 화제는 사업이었다.
진혁은 5년간 푸드 팩토리가 이룬 성과에 대해서 보고를 들었다.
황미미는 진혁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웠다. 진혁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외부에서는 재벌가의 부유하고 젊은 미인과 결혼한 진혁이 행운아라고들 했다. 하지만 미미는 진혁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그가 핵무기만큼이나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미가 진혁을 만나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진혁을 잘 알고 있는 할아버지가 안배를 해놓고 가지 않았더라면 아예 연애를 시작하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그 일환일지도 몰라.’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
할아버지는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혁의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삶의 연장을 원치 않았다.
대신 손녀가 연은 이어가기를 바랐다.
‘할아버지는 죽음으로 마음의 빚을 만들었는지도 몰라.’
미미가 살짝 웃었다.
“5년이란 시간이 아주 길었어요. 저도 나이가 들었고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대표이사로서 해야 하는 일은 강 씨 형제와 임진희 아가씨가 다 했어요. 그러다가 혼기도 놓쳤고요.”
“혼기요?”
“파리에서 3개월 정도 짧게 만나다가 일이 너무 바빠서 헤어진 모양입니다.”
“어디 누굽니까? 지금이라도,”
“이미 헤어진 지 3년은 넘게 지났습니다.”
미미가 선을 그었다. 진혁은 풀이 죽었다.
“음.”
진혁이 머뭇거렸다.
* * *
다음날.
“이 알파벳은 뭐라고 하지요?”
“A입니다!”
책이는 유치원에서 멀뚱하니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전부 외치는 글자를 저만 몰랐다.
“…….”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