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650화 (650/656)

제 650화

외전 44화

“……그러면 설득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너한테 빵 만들라고 한 적이 있어?”

“아니요.”

임진혁은 아버지와의 대화를 상기해 보았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자기에게 빵을 구우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왜 그랬더라.’

아버지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잘하면 아버지가 자신을 돌아봐 줄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스스로 한 거구나.’

처음에는 주방에서 따라다녔고 나중에는 학교까지 갔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부 맞출 수는 없었다. 아직 실컷 놀고 싶은 20대 초반에 매일매일 새벽같이 나와서 한결같이 일해야 했는데 그건 싫었다.

좀 더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직접 하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군요.”

“맞아. 네가 하고 싶어서 해야지. 시켜서 하는 건 자기 일이 아닌 거야. 자기 일이 따로 있겠지.”

아버지가 싱긋 웃었다. 진혁은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빵을 만들면 정말 잘 만들어질 겁니다. 능력이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도 낭비라고요…….”

“그만.”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네 고집 봐라. 그 고집을 네 아들이 똑같이 타고난 거지.”

“아.”

“말해서 안 되면 뭐 때려서 시키기라도 할 거야?”

진혁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네요!”

“그러면 되긴 뭐가 되냐! 그러면 안 되지!”

아버지가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를 빽 질렀다. 진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도 맞으면서 자랐는데요. 맞은 만큼 성숙하는 겁니다.”

“난 너를 때린 적이 없는데?”

“……군대에서요.”

“요즘 군대도 그러냐?”

진혁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버지에게 과거를 이야기했다고는 해도 어떤 고생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도 화제 전환에 맞추어 주었다.

“당연히 잘 지냈지. 아들놈이랑 손자놈이 숨어서 얼굴도 안 비추는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진혁과 책이가 건강한 것을 보고 크게 안도한 모양이었다.

“좋은 곳에서 잘 요양한 모양이구나. 너도 안정되어 보이고.”

“큰놈이 말을 안 들어서 좋지 않아요.”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주인처럼 앞으로 나서서 안내를 했다.

“이쪽으로 와라.”

차에서 내리면서 황미미는 책이를 안으려고 했다. 명이가 항의했다.

“엄마! 엄마는 내 엄마야!”

책이는 위엄있게 명이를 바라보았다.

“네 엄마가 아니고 우리 엄마야.”

“엄마! 나 쟤 싫어!”

명이는 의사 표현이 확실했다. 진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명이. 진희 고모랑 같이 놀까?”

“놀래!”

명이는 진희와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책이는 찜찜한 표정으로 진혁을 흘깃 보았다.

임진혁은 문득 생각했다.

그는 책이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명이는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한 건가?’

“명이야. 아빠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 명이의 다른 손을 잡았다.

‘저 녀석이 나를 두고 저기로?’

책이는 황미미에게 안긴 채로 입을 조금 벌렸다.

그 눈에는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미미는 두 아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욕심이 많아.’

그렇다면 책이 역시 기업을 지켜내기에 적절한 후보자일지도 모른다.

* * *

한남동 자택은 그대로였다. 정원에 만발한 수국과 활짝 핀 꽃들은 계절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일행은 식당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모두를 위한 커트러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혁과 미미는 두 아이들을 유아용 의자에 앉혔다.

“우리 명이 손수건 할까?”

그리고 명이는 턱받이를 맸다. 책이는 턱받이를 거부했다.

“난 괜찮아.”

“괜찮으시겠습니까?”

웨이터 역할을 맡은 집사가 미미에게 물었다. 황미미가 책이에게 물었다.

“안 흘리면서 먹을 수 있니?”

“예.”

책이는 손발의 근육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절정의 고수다. 그는 반찬을 흘리기는커녕, 흘린 반찬도 허공으로 다시 띄워 올릴 수 있었다.

“그럼 나도 안 할래!”

황미미는 웃으면서 명이의 턱받이 매듭을 좀 더 세게 조였다.

“명이 너는 음식을 흘리잖아.”

“어어.”

명이는 스스로 턱받이를 빼려고 하다가 움직이지 않자 손을 내렸다. 책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다.

‘저 정도도 스스로 빼지 못하는 건가.’

명이는 힘이 없어서 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지만 책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첫 번째 메뉴는 마리오 셰프님이 개발하신 알 해리스입니다.”

“알 해리스를? 에피타이저로 먹는다고?”

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이거 맛있어.”

임진희가 설명을 해 주었다.

“네가 그때 대회에서 심사 위원 자리를 버리고 튄 다음에 말이지. 마리오가 엄청난 요리를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마리오 녀석이?”

“응.”

진혁은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맛인데?”

“그걸 물어보는 거야? 먹어 보면 되잖아.”

어머니가 거들었다.

“그럼, 그럼. 아랍 요리라고 해서 우리도 처음엔 어색했는데 요즘은 자주 먹어. 진희가 만든 알 해리스도 맛있더라.”

“진희 넌 뭐 만들었는데?”

임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진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만든 것도 오늘 코스에서 먹을 수 있어.”

“에피타이저가 두 개야?”

“아냐, 디저트거든.”

진희가 그때 내놓았던 것은 태국식으로 달콤하게 조리한 요리였다.

“호오.”

“루이스 쉐프님이 만든 디저트도 맛있는데 오늘은 내가 만든 거로 내놨지. 몇 년만에 보는 거니까.”

어머니가 아쉬워했다.

“된장찌개 끓여주고 싶었는데, 우리 며늘아기가 멀리서 오신 쉐프님을 모셨다고 하더라.”

“그래요.”

진혁은 이미 그 쉐프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멀리서도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지 안 물어봐?”

“알 것 같아서.”

“너 오리 구이 좋아하잖아. 그래서 미미 씨가 특별히 불렀대.”

“…….”

진혁이 피식 웃었다. 웨이터는 조심스럽게 카트를 밀면서 모두에게 접시를 나누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었군.”

마리오가 만들었다는 알 해리스는 과연 깔끔하고 가벼운 맛이었다.

본래의 알 해리스는 좀 더 포만감이 있고 텁텁하다. 하지만 이것은 주스처럼 마셔도 좋을 정도로 맑았다. 곡식이 들어간 수프를 이런 식으로 가볍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식전에 먹기 좋게 개량한 건가?”

“그렇지. 산뜻하지?”

진혁은 다시 알 해리스를 맛보았다.

“이미 알 해리스가 아닌데. 그냥 식전 수프 같아.”

레시피를 전부 알고 있는 진희가 해설해 주었다.

“바하라트도 들어갔고 토마토도 조금 넣었어.”

“괜찮은데?”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들 먹기에도 좋고, 아침에 먹기에 괜찮더구나. 우리도 자주 먹고 있어.”

‘그 대회가 쓸데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좋은 요리를 많이 만들었네.’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도망가버린 그 대회도 벌써 여섯 번째야. 이제는 한국이 아니라 두바이에서 하고 있어.”

“그래?”

진혁은 수프 그릇을 들어 마지막까지 마셨다. 첫맛은 산뜻했지만, 뒷맛은 살짝 산기가 있었다. 토마토의 맛이 느껴졌다.

“루이스 형도 실력이 많이 늘었네.”

에피타이저 다음에는 연어 샐러드와 오이 초무침이 등장했다.

진혁은 푸성귀와 셀러리를 집어 씹어먹었다.

‘채소는 자주 먹기는 했는데 이것들은 오랜만이네.’

특별할 것 없는 요리들이었으나 부모님이 좋아하셨다.

“연어가 신선하구나.”

“엄마는 왜 연어가 좋아요?”

“참치보다 덜 느끼한 것 같고, 건강에 좋다길래 말이야.”

“아.”

명이도 연어를 좋아했다.

“주황색 고기 맛있어!”

책이는 침착하게 젓가락을 사용해서 연어 조각을 집어 들었다. 포크가 아닌 젓가락을 유려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명이가 입을 오물거렸다.

“나도 젓가락 쓸래!”

황미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포크가 좋아.”

“……응.”

명이는 황미미가 엄격하게 교육했는지 미미의 말을 잘 들었다. 진혁은 새삼스럽게 아내와 아이들을 살폈다.

‘평화롭군.’

“아빠, 오늘은 한식을 먹는 게 좋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외국에 오래 있었는데 굳이 우리가 양식을 가져왔나.”

진희는 아버지와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리구이랑 어울리는 전채는 이게 제일 낫잖냐.”

“그건 그렇지만요. 요새 강의는 할 만하세요?”

“재밌다. 네 수업도 평가가 좋다던데?”

“그래요?”

“젊은 선생님이 열정 있게 가르친다고 평이 좋더구나.”

아버지와 진희 두 사람 모두 베이킹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공통 화제로 대화를 하는 동안 어머니와 황미미가 아이들을 살폈다.

“명이가 아주 잘 먹네. 당근도 잘 먹고!”

“난 당근도 잘 먹어!”

명이가 의기양양하게 뽐냈다. 하지만 책이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피망은?”

“피망은…….”

명이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책이가 훗 하고 웃었다.

“난 다 잘 먹어.”

황미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루이스가 만든 알 해리스는 궁금하지 않아? 관심 없어?”

“응, 별로.”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대단하단 말이야.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안 궁금하다니까.”

“들어봐. 라이스 밀크에 쌀을 끓여서 밀은 전혀 넣지 않고 만들었는데…….”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마음대로 말할 거면서 도대체 관심 있냐고 질문은 왜 한 거야?”

그때 카트를 밀고서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진흙 오리 구이입니다.』

진혁은 그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적당히 놀라는 척을 해주었다.

진희가 제일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두 아이까지 모두 따라서 손뼉을 쳤다.

“오늘의 메인 요리, 진흙 오리 구이를 담당하신 장유향 쉐프님입니다! 짜잔! 놀랐지!”

임진희가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장유향 쉐프는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좀 더 늙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밝았다.

『작은 주군들께서도 많이 성장하셨군요!』

회색빛 머리는 이미 완전히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허리는 조금 더 굽었고, 손에는 주름이 많았다.

『아아.』

시간의 흐름이란 흐르는 물과도 같아 멈출 수가 없다. 진혁은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파왔다.

지금 저 모습은 자신의 가족들이 미래에 겪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도 곧 늙으시겠구나.’

진혁에게는 큰 변화 없이 쏜살같이 지나간 5년.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노인은 늙어버렸다.

『가족분들을 위해서 성심껏 구워낸 오리 구이입니다.』

장유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움푹 팬 안와 사이로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심혈을 기울여 개발해낸, 주군이 가장 좋아하시는 맛입니다.』

그는 과장된 태도로 칼을 집어 들어 진흙 구슬 같은 것을 반으로 갈랐다.

『드셔보시면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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