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2화
외전 36화
‘지금은 이런 걸 마시고 싶은 느낌이 아닌데.’
단 것을 마시고 싶은 갈망 따위는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하며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미미는 진혁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핫초콜릿을 마시지 않는다면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2년 동안 부부로 살았으니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알았어요.”
황미미는 말없이 초콜릿 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도 핫초콜릿은 소주잔만 한 유리잔에 담겨 있었다.
진득한 액체 초콜릿이 입술에 닿은 순간 코가 뻥 뚫리는 것처럼 강렬한 향이 코로 올라왔다.
“아.”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속으로 초콜릿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카카오 함량이 높아 진하기 그지없는 액체가 파도처럼 끊임없이 스며들어와, 잇몸과 입천장, 바닥과 혀를 전부 뜨겁게 적신다. 미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맛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고민이 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매일같이 도착하는 달콤한 간식.
치즈 케이크를 외면하자 이제는 더 맛있는 것을 가져왔다.
어제의 크리오요 핫초콜릿도 맛있었지만, 오늘은 무언가 좀 더 달랐다.
‘카페인?’
각성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뜨거운 음료를 마시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순식간에 다 먹어버리자 조금 아쉬웠다.
그녀가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자 진혁이 다른 컵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소주잔 크기가 아니라 일반 컵 크기의 사기잔이었다. 머그잔에 가득 담긴 핫 초콜릿 곁에는 튀긴 빵이 놓여있었다.
“이건 뭔가요?”
“여기 이 빵은 포라스입니다. 핫초콜릿을 찍어 드시면 됩니다. 스페인식 간식이지요.”
“포라스요?”
처음 보는 과자였지만 형태가 익숙했다. 진혁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접시를 내놓았다.
“이게 뭐죠? 요우띠아오를 닮았는데.”
요우띠아오란 중국에서는 아침 식사로 자주 먹는 빵이다. 한자로는 기름 유와 가지 조를 써서 유조(油條)라고 쓰는데, 기름에 튀긴 막대 모양의 빵이라는 뜻이다. 흔히들 요우띠아오를 또우장(豆醬) 콩즙에 찍어서 먹는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드셔 보시면 알 겁니다.”
“음.”
굵직한 막대기처럼 생긴 튀김 도넛은 츄러스(Churros)를 막대처럼 길게 펴 놓은 것 같은 생김새였다. 두 가지 모두 밀가루를 막대처럼 길게 뽑아 반죽해 기름에 튀겨낸 도넛 종류의 빵이니 형태는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츄러스는 길게 구워내서 구부려서 말발굽처럼 생긴 것도 있고 그냥 막대기처럼 먹는 것도 있습니다. 반면에 포라스는 조금 더 두툼하고 안에 크림이나 초콜릿을 넣은 것을…….”
포라스(Porras)는 츄러스보다 조금 더 두껍고 통통했다. 진혁은 스페인에서 이 빵을 아침 식사로도 자주 먹는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미미는 포크를 들어 포라스를 찍었다. 그러자 부풀어 오른 막대빵이 찌그러지며 안에서 하얀 크림이 터져 나왔다.
“크림이 들어 있군요. 어떤 크림이에요?”
“생크림입니다.”
-와삭.
미미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빵 안에서 왈칵하고 터져 나오는 담백한 크림! 이 생크림은 방금 전에 마신 핫초콜릿과 잘 어울렸다.
“아.”
코끝을 찌를 만큼 강렬했던 초콜릿이 생크림과 섞이면서 맛이 연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더 순해진 것은 아니었다.
미미는 저도 모르게 다른 맛을 떠올렸다.
‘크림 소라빵…….’
소망 베이커리에서 판매하고 있는 블랙 앤 화이트 크림 소라빵.
이전에 미미도 입수해서 먹어본 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개량되어 생크림과 다크 초콜릿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소라빵으로 바뀐 그 빵.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또 다른 맛이었다.
“이 빵은 튀겼는데도 기름진 맛이 느껴지지 않아요.”
“짧은 시간 동안 튀겨서 기름을 많이 흡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튀긴 빵과 크림, 그리고 초콜릿. 서로 다른 종류의 지방이 조화를 이루며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맛있어요. 이 세 가지가 아주 잘 어울리네요.”
미미는 문득 진혁이 왜 이 요리를 먼저 먹어보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튀겨 먹은 빵을 액체에 찍어 먹는다는 면에서는 츄러스와 요우띠아오가 비슷했다. 하지만 포라스는 빵 안쪽에 크림이 들어 있었다.
“서로 다르지만 잘 어울려요…….”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빵을 무는 순간 샤오룽바오처럼 우유 크림이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입안에 아직 남아있던 핫초콜릿과 섞인다.
“진혁 씨도 아이들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방법이 다른 거군요. 그걸 말씀하고 싶으셔서 이 핫초콜릿과 크림 포라스를 준비한 거였어요.”
생각해보면 진혁 역시 아이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하마드 왕자가 초청해서 부른 요리 대회 중간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말을 해주지 않는 것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미미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진혁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냥 이게 맛있으니까 먹어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요.”
부하들은 그를 하늘같이 모셨으며 우상처럼 받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혁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해도 지적하는 법이 없었다.
부하들이 멋대로 착각을 해서 진혁을 대단하게 느낄 때 그는 그것을 정정하지 않았다.
교주이자 제왕으로 군림하는 데에는 그것이 더 편리했다.
그중 유일하게 부하지만 친구처럼 가까웠던 광안마만이 예외였다.
현대에 돌아와서는 달랐다. 가족들이나 손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진혁은 크게 성공했고 가족들에게 성공을 안겨다 주었다. 부인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설립해서 아버지를 교사로 초빙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출근해서 빵을 만들지 않고 학교에 출근해서 교수 생활만을 하며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실습을 감독하고 행정 업무를 하던 아버지는 미안하다면서 한 달 만에 교수 일을 그만두었다.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구나. 미안하다.”
아버지는 그냥 자신의 빵집에서 빵을 만들다가 일주일에 한두 시간씩 전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아버지와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 보고 나서야 진혁은 아버지가 뭘 원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뭐든지 직접 물어봐야 해.’
진혁은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지금까지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님과 진희였다. 부모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한결같이 퍼주며 그를 돌보았다. 진희는 그가 돌봐야 하고 지켜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광안마와 혈도객 같은 예전 부하들 역시 그가 돌봐줘야 하는 자들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미미는 자신의 ‘배우자’ 였다. 둘 다 대등한 성인이었고 각자의 의견이 있었다. 진혁은 누군가 자신과 대등한 관계에서 의견을 내놓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어색했다.
대부분의 경우 미미는 진혁의 의견을 따라 주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황미미는 말없이 핫초콜릿을 마시며 빵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빵을 핫초콜릿에 찍어 먹었다.
입가에는 초콜릿이 묻어 있었다.
진혁은 미미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진혁의 손가락이 미미의 입술에 스쳤다. 분홍빛 입술은 달콤하고 향기로워 보였다.
진혁은 살짝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벚꽃처럼 고운 연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그럼 지금 저희 장남이 생명의 위기를 겪고 누워 있는데 제가 맛있는 걸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빵을 구워 오신 거예요? 제가 이런 상황에 빵이 넘어가겠어요?”
진혁은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솔직한 게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진혁은 미미가 지금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혁이 부하들 앞에서 위엄있는 모습만을 내보였듯 황미미도 부하직원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었던 부분을 내보였고, 그 이후에는 단점들을 내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평범한 사람이고, 미미 씨는 아주 특별하고 대단하며 매력적인 사람인 줄 알았지.’
누구나 자신은 평범하다고 믿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면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임진혁은 다른 사람들도 살인 사건이나 시체를 소재로 한 빵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이 정상 취향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미미는 다를 줄 알았다.
황미미는 아름다운 여배우였고 부유하면서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고, 함께 살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서로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들어 있었다.
황미미는 주변 상황들이 자신이 예상하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통제광이며 결벽증이 있어 더러운 것들을 견디지도 못했다.
진혁은 무공과 맛있는 빵에 미쳐있었고 주변 세상을 널리 돌아보지를 못했다.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한두 번 하면서 연애를 할 때는 숨길 수 있었던 점들이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는 서로 부딪히는 것이 있었기에 양보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미미는 진혁을 정말로 좋아했다. 진혁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면을 보여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혁은 미미 앞에서는 솔직하게 본심을 내보일 수 있었다.
진혁만이 아내에게 솔직한 것은 아니었다. 미미도 변했다.
그룹의 총수를 맡게 된 황미미는 일거수일투족 하나 마음대로 하지 않았으며 외부에 보이는 이미지도 철저하게 계산해서 내보였다. 어렸을 때도, 배우로 잠깐 활동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미미도 이제는 진혁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오는 데에는 이 년이라는 시간과 육아의 고통이 있었다.
“책이 때문에 많이 놀랐으니 마시라고 한 겁니다. 기운을 돋궈줄 거예요.”
“……다이어트에는 도움이 안 되겠지만요.”
미미는 툴툴거리면서도 나머지 빵을 전부 먹었다.
“맛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진혁이 씩 웃었다.
냉기가 감돌던 부부 사이에 온화한 기운이 돌았다.
‘역시 미미 씨가 화낼 때는 뭔가 먹이면 되는 거야. 그럼 좀 나아진다니까.’
진혁은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 오해를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동생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에 무공을 쌓는 데 더 집중하고 싶어 할 거라고요?”
“지금은 그냥 자는 겁니다. 심마는 극복했으니 당분간은 혼자 내버려 두세요.”
미미는 책이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요람 속에서 잠들어 있는 아기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황미미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혼자라.”
“가득 찬 항아리 같은 겁니다. 지금은 다른 걸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
“어차피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옆에서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뭔가 잘못해서 애들이 이렇게 태어난 걸까요?”
미미가 고개를 떨구었다. 검은색 생머리를 틀어 올려 동그란 모양으로 묶어 올렸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자 가냘픈 목덜미가 드러났다. 창가로 햇빛이 비쳐들어 검은색 머리가 갈색처럼 보였다.
“음,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임진혁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