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635화 (635/656)

제 635화

외전 29화

『늦었어.』

장남이 힐난하는 듯 쏘아붙였다. 진혁이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이 그대로 쓰러지며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책이가 한 짓이 분명했다.

‘이게 허공섭물이라고?’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명이는 분명히 저 청년을 ‘밀었다.’

그건 허공섭물이라기보다는 진기를 발출하는 것에 가까웠다. 흔히들 만화에서 ‘장풍’이라고 하는 그 기술 말이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허공섭물 아닌데.’

명이는 아버지를 보자 크게 안심한 모양이었다. 책이는 히죽 웃었다.

살인마가 지나간 듯한 광경이었다.

‘누가 널 무림맹의 맹주이자 정파의 수장으로 보겠니?’

『쟤가 이 사파의 문주거나 문주의 후계자로 보여.』

장남이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진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현대로 돌아온 이후, 그는 이렇게 피를 흘려본 적이 없었다.

간혹가다 한두 명을 심판하거나 조종하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살인을 피했다.

다 떠나서, 살인을 할 일도 없었다.

‘둘이서 대체 몇 명을 죽인 거야?’

명이는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탄피 알을 몇 개 손에 쥐고 있었다. 탄피에 맞아서 죽은 시체가 지금 눈에 띄는 것만 해도 세 구가 있었다.

그리고 평범하게 총알에 맞아서 죽은 시체만 다섯 구가 넘었다.

지금 후계자니 뭐니 하는 놈은 책이가 손을 써서 몸에 직접적인 기의 흔적이 남았다.

타인의 진기가 묻어있는 것이다.

‘저 다섯 구 전부 책이가 손을 썼군.’

무림맹의 감찰관이 와서 살인 사건 현장을 조사하면 누가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진기를 잔뜩 묻혀 놓았다. 특히 총기류의 손잡이와 죽은 자의 손 부분이 심했다.

‘이곳에 감찰관이 없어서 망정이지.’

황미미는 장남이 똑똑하다며 칭찬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진혁은 의문이 들었다.

‘이놈은 머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왜 여기 안까지 들어와 있는 거야? 그것도 엘리엇이나 이낙호를 달고.’

『다 죽인 건 잘했어. 이런 놈들은 후환을 불러오게 마련이니 말이지.』

이들은 갱단이 분명했다. 무장 수위가 높았다. 권총과 소총, 기관총, 산탄총까지 온갖 총기류가 다 있었다.

두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사체들의 상태를 보았다. 진혁이 아들에게 설명했다.

『저기 있는 저런 거. 저런 것도 같이 파괴해야 해.』

그가 손을 뻗어 가리키자 천장 구석에 설치되어 있던 검은색 플라스틱 반구들이 폭파되었다.

『저런 거?』

『보안카메라, 아니 CCTV야. 보안실에서 보고 있는 거야. 남의 눈 같은 거지.』

진혁이 렌즈들을 폭파하면서 설명했다.

『오.』

책이는 빨리 배웠다. 그는 다른 쪽 구석에 있던 CCTV에 기를 밀어 넣어 보았다.

-파팡

『좋아, 그거야. 잘하네.』

진혁은 고개를 들어 두 육아 도우미를 살폈다. 엘리엇은 선 채로 기절해 있었고, 이낙호는 의자에 앉아서 기절해 있었다. 둘 다 창백해 보였다. 총소리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명약관화했다.

『수혈을 짚었군.』

엘리엇과 이낙호는 둘 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안색은 창백했고 덤불과 나무에 여기저기 긁혀 양팔에 상처가 많았다. 옷 군데군데에 피가 튀어 있었으며, 바지에서는 지린내가 풍겼다.

임진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색 모직 카펫은 피에 젖어 적갈색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멀쩡한 커튼을 부욱 찢어냈다. 그리고 임시로 아기 띠를 만들어 책이를 앞에, 명이를 뒤에 맸다.

“꺄! 꺄!”

아버지의 등에 매달린 명이가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진혁이 두 아들에게 속삭였다.

“언제 어디서든 증거를 남겨두면 안 된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집 안에서 제일 사람이 많은 곳은 어디인가?

‘벙커?’

* * *

구아노는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적갈색 수염을 잡아 뜯을 것처럼 긁어대며 말했다.

『저 미친놈은 뭐야? 킬러야?』

『글쎄요』

그는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카르텔의 수장인 반에게 인정받아 남부 지방의 카카오 빈 농장에서 보호비를 걷었다. 하지만 호르헤스 농장은 달랐다. 백여 년 이상 이 자리에 머물렀다는 필리페 호르헤스는 보호비를 줄 수 없다며 총을 들고서 협박을 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양 새끼처럼 순하고 멍청했다. 그래서 아들 필리페 호르헤스 주니어를 납치해 왔다.

그렇지만 필리페 그놈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얌전히 보호비를 줬어야 하는데 뜻밖에 서부지역통합 카르텔에 SOS를 청했다.

서부 카르텔이 습격해와서 거의 다 물리쳤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바깥에서 한 명씩 소식이 끊기더니, 평범해 보이는 아시아인 가족이 나타났다.

부모와 두 어린아이로 구성된 4인 가족이었다.

그 아이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처럼 솔방울이나 나뭇가지, 숟가락이나 포크, 단추 따위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들이 뭔가를 집어던질 때마다 그가 어렵게 훈련시킨 정예 부하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삼류 영화의 단역처럼 픽픽 쓰러졌는데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상황을 본다고 내려갔던 보스의 아들까지 죽어버리고 말았다.

「끄윽, 끅.」

구아노가 수염을 비틀면서 괴로워했다.

「이제 우리는 끝장인가?」

방구석에는 호르헤스 주니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안대와 재갈을 차고 있었고 손발은 밧줄로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귀는 멀쩡했으므로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기절한 척 이들의 이야기를 숨죽인 채 귀 기울여 들었다.

구아노의 참모, 델린저가 말했다.

「아니.」

구아노가 눈을 크게 떴다.

「응?」

델린저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저 아기들은 어려. 부모는 죽이고 아이들만 생포하면 돼.」

「!」

「애들만 초능력자잖아? 부모는 겁에 질려 있다고.」

구아노가 구슬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부모를 죽이고 애들을 데려와서 우리 애로 키우면 되겠군.」

「우리 애라니, 내 애야.」

델린저가 씨익 웃으며 구아노에게 총을 들이댔다.

「저 애들을 잘 키우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구아노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꺼냈다. 그 손에는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같이 죽을래?」

「비겁한 자식! 이 벙커 안에서 그런 걸 터트릴 셈이냐?!」

「비겁하긴 누가 비겁하다는 거야. 친구에게 총을 들이대는 놈이 더 비겁하지. 저 애들을 입양하려면 힘을 합쳐야 돼. 둘이 하나씩 가지는 건 어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느라 CCTV 화면이 하나둘씩 까맣게 꺼지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호르헤스 주니어는 있는 힘을 다해 꿈틀거렸다. 이대로 잡혀 와서 죽는 줄 알았는데 희망이 보였다.

‘이런 데서 어이없이 죽을 수는 없어.’

아버지는 원래 카카오 빈을 공급하던 푸드 팩토리라는 곳에 도움을 청하겠다고 했었다. 전화와 이메일 모두 감시를 당하고 있어서 그 상황을 말하기는 어려우니 반드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기들이 초능력자라니.’

그리고 갑자기 문이 콰쾅! 하고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

-빵!

총소리가 울렸다.

시끄럽게 떠들던 구아노와 델린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구아노? 델린저? 아니면 침입자인가?’

바닥에 대고 있던 뺨에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 닿았다.

케첩보다 덜 질척거리고 우유보다는 끈적한 무언가.

피가 분명했다.

재갈이 피를 빨아들여 젖어 들어갔다.

「으읍웁웁웁!」

그는 피를 먹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고개를 움직여 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영어를 할 수 있나?」

「웁웁웁웁!!」

호르헤스 주니어는 있는 힘껏 대답했다. 그리고 안대가 풀렸다.

“?”

눈앞이 밝아지며 눈이 시큰했다. 눈앞에 보이는 동양인 남자는 그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리고 아기 띠를 매고 있었다.

한 살이나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꺄르륵 웃었다.

재갈이 풀리고 나서 호르헤스가 황급히 말했다.

「아이들이 이런 곳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호르헤스는 두리번거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구아노는요?」

「직접 봐.」

바로 옆에 카르텔의 행동 대장과 부대장, 두 명이 쓰러져 있었다. 수류탄도 멀쩡했다.

「상대방을 쏘더니 자살하던데. 뭔가 다툼이라도 있었나 봐.」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볼만한 광경은 아닌데…….」

「나는 이제 나갈 건데 거기 가만히 있을 건가?」

「어라?」

어느샌가 손과 발목의 밧줄이 풀려 있었다. 호르헤스 주니어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대로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고 그대로 섰다.

「부, 부디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내가 왜?」

사내가 반문했다. 호르헤스 주니어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저희 아버지가 필리페 호르헤스입니다. 카카오 빈 농장주죠. 크게 사례하실 수 있습니다.」

「아.」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분명히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남자의 어깨 위에서 아기 팔이 불쑥 올라와 남자의 귀를 잡아당겼다.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명아, 아빠 일하는 중이다.”

『웅!』

‘아기가 둘? 구아노랑 델린저가 말했던 그 초능력자 아기?’

「저, 저는, 아기님들이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보지도 못했고요.」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따라오지.」

* * *

진혁은 다른 곳의 커튼도 뜯어냈다. 커튼으로 둘둘 말아 호르헤스 주니어와 이낙호, 엘리엇 조를 옮겨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럴드와 왕이 비서는 이미 자택에 도착해 준비를 마치고 지시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따로 불려온 의사에게 엘리엇과 이낙호를 맡기고 진혁은 거실로 내려왔다. 왕이 비서가 호르헤스 주니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임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호르헤스 주니어가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자기가 필리페 호르헤스의 아들이라는데.”

“필리페 호르헤스의 아들이 맞습니다.”

진혁이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왕이 비서가 덧붙였다.

“어제 방문한 농장의 농장주 말입니다.”

“어제 얘기하고 싶었던 게 그거였나? 나한테 얘기해도 딱히 소용이 없을 텐데.”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호르헤스 주니어가 황급히 말했다.

「아버지는 평화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하셨습니다. 카카오 빈 농장을 지키기 위해 무력이 있는 자경 대원이 필요해서, 투자금을 받아서 용병을 더 고용하려고 하셨어요. 그러려면 카카오 빈 가격이 다시 올라가야 해서…….」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호르헤스 주니어의 안색이 창백했다.

납치당하고 이틀을 계속해서 굶으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을 데리고 나와줬다지만 이 사람들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왕이 비서가 말했다.

「필리페 호르헤스 님께서 지금 데리러 오고 계십니다. 씻고 갈아입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식사를 좀…….」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진혁이 말했다.

「이거라도 먹어볼래?」

그가 내민 초콜릿 바는 단순히 은박지에만 싸여 있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직육면체 형태인 초콜릿 바로 겉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말끔했다.

호르헤스 주니어는 반질반질한 초콜릿 바를 받아 입안에 넣었다.

「!」

이것은 아버지의 맛이었다. 아버지가 당나귀를 타고서 실어 나르는, 붉은색 흙의 산미가 달콤하게 담겨있는- 고향의 맛.

달콤하면서도 뒷맛은 씁쓸한, 살아서 다시 맛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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