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9화
외전 23화
“분명히 이천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너무 빨리 오셔서 놀랐어요.”
엘리엇 조가 머쓱하게 말했다. 그녀는 책이를 안고 있었다.
책은 화가 날 대로 난 듯,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진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얘는 왜 화가 난 거지?’
진혁이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는데 덩치 큰 이낙호가 앞으로 나서며 엘리엇을 가렸다. 덕분에 엘리엇이 안고 있는 책이도 가려졌다.
“하핫, 아버님 목소리가 흔한 목소리는 아니잖아. 그런 착각을 하고 그래.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해야지.”
이낙호는 임진혁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컸다. 비슷한 눈높이에 서 있는 시선을 받으면서 진혁은 생각했다.
‘이것 봐라?’
엘리엇이 핀잔이라도 들을까 보호하는 모양새였다. 책이는 엘리엇의 품에 안긴 채로 능숙하게 전음을 보냈다.
『이 두 남녀가 근무 도중 사사로이 정분을 나누고 있는데 도대체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
진혁은 물끄러미 책이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이 책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다행히 두 아드님은 다치지 않았어요.”
이낙호와 엘리엇 모두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지난번에 유리 조각에 다친 흔적이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것이다. 진혁이 혀를 찼다.
“근무 교대표를 좀 보겠습니다.”
“예? 그건 갑자기 왜……,”
의아해하면서도 이낙호는 바로 스마트폰으로 근무 스케줄을 보냈다. 엘리엇 조와 이낙호가 계속해서 함께 근무하는 스케줄이었다. 진혁은 그 스케줄을 보고서 말했다.
“두 분이 일을 잘 하시니 번갈아서 근무하도록 하세요.”
“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혁은 바닥에 무너져 있는 루버 셔터 블라인드를 살펴보았다. 미미가 따로 주문 제작한 편백 블라인드가 짙은 향을 뿜어내며 부서져 있었다. 제작자가 공들여 새긴 봉황, 황씨 가문의 신수 역시 꽁지깃과 부리가 부서져 버린 상태였다.
‘이건 미미 씨가 안타까워하겠는데.’
부서진 쪽쪽이도 보았다. 손잡이는 멀쩡했고 고무 부분이 산산이 조각나서 찢겨 있었다. 이 매끈하고 탄성 있는 최고급 의료용 실리콘 고무를 조각낸다는 건 보통 힘이 아니다. 다만 파손된 흔적이 기이했다.
속에서부터 터져나간, 남아있는 기의 흔적을 보고서 진혁은 생각했다.
‘이건 발경이잖아?’
“제가 잠시 아이들을 돌보겠습니다. 오늘은 스케줄을 정리하고 일찍 퇴근하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 아기를 기르는 부모라면 예민하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도 느닷없이 유리가 터져나가는 사고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루버 셔터가 망가졌다. 진혁이 어떻게 화를 낼지 눈치를 보고 있던 보육교사들은 뜻밖의 빠른 퇴근에 감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진혁은 이 사태가 보육교사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그들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일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동생한테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발경.
기를 안쪽으로 넣어 터트리는 고급 기술이다. 겉표면이 아닌 내부에 기를 흘려보내어 충격을 주고 내장을 진탕시킨다.
최근 물리치료에 활용하고 있는 체외충격파와도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어디까지나 충격은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며, 표지는 멀쩡하다.
돼지를 발경으로 공격하고 나서 해부한다면, 겉가죽과 껍데기는 멀쩡하지만, 내부의 내장은 전부 터져서 곤죽이 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절하지 못하는 발경은 극히 위험한 살인 기술이다.
『내 동생은 천재라니까. 내가 잘 가르치기도 했지만.』
책이는 으스대고 있었다.
『벌써 발경을 터득했다고! 아직 두 살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대로라면 세 살 이전에 절정 고수가 될지도 몰라.』
책이가 보내는 전음을 듣고서 진혁이 대답했다.
『두 살이 되기 전에 살인자가 될 수도 있겠지.』
『……!』
장남이 조그마한 분홍색 입술을 벌렸다. 큰아들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데 진혁이 말을 가로챘다.
『이건 명이가 아주 귀하게 여기는 쪽쪽이잖아?』
보호자라고 붙여 놨더니 살인기술을 가르친다. 진혁은 책이를 노려보았다.
『네가 명이한테 가르쳐야 하는 건 무공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야.』
『무공이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인데.』
『자기가 귀하게 여기던 쪽쪽이한테 화풀이를 했어. 뭐가 기분이 나빴던 거지?』
책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아하는 아빠가 오지 않아서.』
『…….』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것은 처음이었다. 진혁이 머쓱하게 말했다.
『명이가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군.』
『슬프게도 그렇지.』
『후후, 후후후후.』
『악당같이 웃지 좀 말고.』
임책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원래 발경을 가르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손을 내뻗으면서 기탄을 발사하는 걸 가르치고 싶었는데, 목적은 단순히 호신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명이는 기탄을 쏘는 게 아니라 쪽쪽이를 부숴버렸다.
책이는 당장 저 쪽쪽이를 분석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모 역할을 하는 보육교사들은 그를 돕지 않았다. 위험하다며 창가에는 못 가게 했다.
그는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었고, 수치스럽지만 거짓으로 칭얼대는 척 연기를 해서 아버지에게 연락이 빠르게 가도록 했다.
‘전음에는 거리의 제한이 있으니까…….’
자신이 아는 진혁은 항상 서재나 주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임책이 전음을 보내면 바로 방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전음을 보내도 응답이 없었다.
부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임책은 크게 놀랐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외출이 잦았다. 메 뭐라는 곳으로 출장도 간다고 했다. 임책이 상상하는 외출은 무림에서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계 말을 타고 멀리 멀리, 여러 날을 다녀오는 것.
그러다 보면 호랑이가 나타날 수도 있고, 산적이 격돌해 올 수도 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문파에서 살수를 보낼 수도 있고, 정예 대원들이 습격해올 가능성도 있다.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초조해하고 있던 책은 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크게 안심해버렸다.
‘한 집안의 가장이 주방에서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보내길래 금분 세수를 하고 은퇴했으리라 생각했는데…….’
보육교사들은 듬직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공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자꾸 사고가 나는 것이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임진혁이 엘리엇과 통화를 할 때 간신히 안심했다.
남궁소천은 진혁이 돌아왔을 때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남궁소천이라고 하기 어려워. 지나치게 저자에게 의존하고 있어. 이제는 책이가 돼버린 거야…….’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원래 부모의 손길을 갈구하는 거야. 믿음직한 형이 아무리 옆에서 말을 해도 부모가 우선이지. 그 부모가 아무리 천하의 악독한…….』
“음, 음.”
진혁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 나를 좋아해~.”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이상한 노래.
한국어였지만 이 정도 한국어는 책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책은 멍청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나하고 명이를 데리고 다녀.』
『응?』
뜻밖의 발언에 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육아실에 있는 보육 교사들은 내공이 전혀 없어. 명이가 치는 사고에 대처를 할 수가 없지. 난 할 수 있지만, 보육교사들이 지켜볼 때는 손을 쓰기가 어려워.』
『……네가 이상한 기술을 가르치지만 않으면 무리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야, 스스로 깨달아가는 거지.』
『!』
『몸을 뒤척이고 움직이고 일어나고 걸어가고 주먹을 휘두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스스로 기술을 완성해 가고 있어. 천재라니까.』
진혁이 중얼거렸다.
『그 정도 천재였는데 옛날에는 왜 그렇게 멍청했대?』
『지금은 안전한 환경이고 축기를 하기에도 최적의 환경이지. 네놈이…….』
‘아차, 또 네놈이라고 해 버렸는데.’
책은 입을 다물었다. 저놈을 아버지로 인정해가고 있었지만, 아직 심리적인 저항감이 남아 있었다. 계속 네놈 이놈 그놈 하다 보니 그것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이미 익숙해진 듯 이번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음, 그러면 오리고기를 먹으러 갈 때 같이 갈 걸 그랬네.』
『오리고기?!』
『진흙 오리구이 알지? 그런 스타일로 땅에 구덩이를 파고 벽돌을 깔아서 숯을 달구고 그 위에 꼬치에 꿴 오리를 굽는 건데 맛있어.』
책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진력을 다시 노려보았다.
『후계자들을 위해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유력한 왕족을 만나러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리를 먹으러 유흥을 간 것이었어?』
진혁은 아들이 전음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응?』
『귀한 아들들이 무공을 익히다가 자칫해서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데 오리고기에 술을 곁들여 여자들을 불러서 끼고 놀다니! 이 방탕하고 문란한 자야!』
책이 알고 있는 진흙 오리 구이는 그런 음식이었다. 한때 개방도들이 즐겨 먹었던 진흙 오리구이는 마교가 득세하면서 어느 순간 고급 요리가 되었다. 마교주가 진흙 오리구이를 즐긴다는 말에 고급 주루와 기루에서 고급스러운 진흙 오리고기 요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오리구이 곁에서 기녀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우아하게 노래를 불렀고, 이것은 신장의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마교주가 사라지고 대가 바뀐 후에도 그 유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뭔가 오해가 있는데.』
진혁이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 * *
오해를 푸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진혁은 고개를 저으며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 띠도 잘 어울리시네요.”
그는 결국 미식 평론 대회에 아기를 데리고 참관하기로 했다. 미미는 진혁이 아기에게 이상한 것을 먹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허락을 해 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리고 보육교사와 경호원을 붙여 주었다. 혼자서 돌아다니고 싶었던 진혁은 조금 쓸쓸해졌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산다.』
하지만 책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 가문의 가주라면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수행원과 함께 다녀야 하는 것이야.』
‘이 녀석은 곱게 태어나서 곱게 자랐다가 곱게 죽었구만.’
진혁은 자신이 안고 있는 큰아들을 바라보았다.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귀여웠다. 피부도 맑고 투명하고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도 보들보들했다. 하지만 외출을 하는데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따라오는 걸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혁은 천마였던 시절에도 이렇게 많은 수행원들이 붙는 것을 귀찮아했다. 지금은 더 번거로웠다.
‘이걸 당연하게 여기다니 이 녀석도 보통은 아니야.’
소시민으로 태어나 이 세계에 떨어졌으며 죽을힘을 다해 적응하고 간신히 현대로 돌아온 진혁이 중얼거렸다.
“우리 가족 중에 평범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
“?”
옆에 서 있던 엘리엇 조와 이낙호가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 고용주님이 왜 이러시지.’
‘그러게.’
그들은 조기 퇴근을 해준다고 해서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진혁이 다시 호출해 추가 수당을 받는 조건으로 또 불려 나왔다.
주차장에서 처음 나오는 노란색 람보르기니 SUV는 반짝반짝 광택이 돌았다. 엘리엇 조는 이 차량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안전하겠어요.”
이낙호도 중얼거렸다.
“나는 람보르기니 처음 타 봐.”
다른 경호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낙호는 아기들을 유아 시트에 안전하게 고정시켰다.
운전사가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천에 갑니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장으로 향해주시면 됩니다.”
다행히 차가 그리 밀리지 않아 한 시간여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회장으로 돌아오니 무하마드 왕자가 반겨 주었다.
「빨리 돌아왔군, 진혁! 오오, 이 아기들이 채기와 며니인가?」
그렇게 말하는 무하마드 왕자의 옷에 그을음이 조금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