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5화
외전 19화
「생각 없이라…….」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드버그 박사가 대답했다.
「대회와는 아무 상관 없는 답을 내놓았지. 객관식 문제에 주관식 답을 내놓았다고나 할까?」
「그렇군요.」
진혁은 탈락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 라시드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혁 아저씨!」
진혁은 아직 20대다.
하지만 조카도 없고, 아는 동생들도 없다. 모두 깍듯하게 대하는 부하들뿐이다.
군대를 제대한 지 한참 됐고 결혼한 지도 한참 됐지만 몇몇 초등학생들도 진혁을 사장님이라고 불렀지, 아저씨라고 부르진 않았다.
‘아저씨라니.’
정신연령만 고려하면 할아버지라고 불려도 좋은 나이지만 아저씨라고 불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에게 괴상하게 친한 척을 하는 라시드를 보고 진혁이 눈알을 굴렸다.
「……웬 아저씨?」
진혁은 이 소년이 왜 이렇게 자기에게 친근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랍의 왕족은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진혁은 그런 자들을 아주 많이 봐왔다.
‘황가의 인물들은 콧대가 높은데 말이지.’
라시드 또한 왕족이다. 진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 어린 라시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엉클 엉클 하면서 진혁에게 거리를 확 좁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아저씨 덕분에 이제는 완전히 건강해져서 학교에도 다니고 있습니다.」
‘이건 또 새삼스럽네.’
진혁이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가까운 시일에 자신이 치료한 것을 눈치채리라고 생각은 했다. 자신을 만난 후에 천천히 몸이 좋아졌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지난번에 은근히 감사를 표하지 않았나?
그는 방금 훑어보았던 라시드의 몸, 그곳에 머무는 기의 흐름을 떠올렸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지긴 했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뛰어다닐 수 있다. 축구시합에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은 피식 웃음 지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뻐할 만도 하다.
「정식으로 아버지의 첫 번째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걸 자랑하러 온 모양이었다. 어서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뿌듯해 마지않는 얼굴을 보며 진혁은 그만 웃어버렸다.
‘이래서 자기 자식이 생기면 남의 자식들도 귀여워 보인다는 건가?’
그 얼굴에 책이와 비슷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저씨도 이번에 두 아들을 두었다면서요? 무하마드 삼촌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진혁은 납득했다. 이것은 무하마드 왕자의 빌드업인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혁은 라시드에게 친근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오마르 왕자와 굳이 가까이 지낼 생각이 없었다. 무하마드와 오마르 사이에서 미묘하게 신경전을 하면서 줄타기를 하는 것은 황미미로 충분하다. 진혁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그쪽 사업에는 아예 손을 뗀 지 오래였다.
‘병철이 형하고 루이스, 진희가 알아서 잘 하겠지.’
진혁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내키는 대로 빵을 굽는 지금 생활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가 편의점에서 팔리는 레디메이드 소망 베이커리 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소망 베이커리에서 머물며 직접 빵을 굽고 싶어 하는 이유를 지금은 완전히 이해한다.
그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 좋았다.
「진혁 쉐프님은 누가 제일 유력해 보입니까?」
황미미가 오는 시간과 예선 시간이 겹쳐서 진혁은 일부러 심사는 본선 마지막에만 참가하기로 했다. 그러니 예선에서는 굳이 심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먹어봐야 알겠는데요.」
「에이, 진혁 쉐프라면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무하마드 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페드로 쉐프도 끄덕거렸다.
「그 뛰어난 후각으로 뭐든지 알아내실 수 있잖습니까.」
「우와!」
라시드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웃었다.
「그렇게 후각이 뛰어나다니 초능력 같군요.」
「원한다면 라시드 님도 후각 훈련을 받으실 수 있게 제가…….」
무하마드 왕자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 훈련은 어른들만 받을 수 있지. 애들이 받으면 위험해.」
납치당했을 때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훈련!
어둠 속에서 극히 희미한 냄새를 맡았던, 그 고통스러운 기억!
온몸의 세포가 단 하나의 더듬이가 된 것처럼,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오는 냄새를 향해 날카롭게 다듬어져, 솟아가는 그 감각!
첨가물이 들어간 음식들을 끊고,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무하마드 왕자는 진정한 미식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훈련을 어린 조카에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릴수록 더 효과가 좋습니다만.」
「어어…….」
무하마드 왕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될성부른 새싹일수록 이른 시기에 키워야 하는 법이죠.」
린드버그 박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무하마드 왕자님도 진혁 쉐프님의 감각 훈련 방식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중년이 지난 늦은 나이에도 미각과 후각을 더 예민하게 할 수 있다면 저도 관심이 있는데요.」
「린드버그 박사님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무하마드 왕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나만 특별히 한 것이잖나!」
「그렇죠, 무하마드 왕자님은 재능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린드버그 박사님도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관심이 생기는데요.」
「아니…… 린드버그 박사, 그건 무리야.」
페드로도 창백한 표정으로 합류했다.
「린드버그 박사님, 그건 정말로 힘든 훈련입니다……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는 것보다 더 훈련량이 많다고요.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 하고요.」
「더 흥미가 생기는군요.」
무하마드 왕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 대화가 흘러가는 방향이 유쾌하지 않았다. 린드버그 박사는 유망한 투자자가 불쾌해하는 것을 느끼고 화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저도 제 사업과 수업이 있는지라 그렇게 시간이 많이 든다면 참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 박사 나이에 했다가는 심장 마비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떤 훈련이길래?」
린드버그 박사는 정말로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장유향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듯, 임진혁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통역사가 옆에 서 있었다.
『심사를 받을 건, 겁니까?』
장유향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에게서는 짙은 사프란 향내가 풍겼다.
『아직 익히는 중입니다, 완성되려면 두 시간이 더 걸립니다.』
『그럼 그때 심사를 받지.』
『알겠습니다.』
장유향은 어디까지나 진혁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군……!’
그는 감격 어린 표정으로 진혁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는 자신의 예멘식 오븐으로 돌아갔다. 린드버그 박사가 코를 킁킁거렸다.
「사프란과 강황을 주로 하는 양념을 쓰고 있나 본데.」
「숨김 맛으로 계피를 사용했죠.」
진혁의 말에 린드버그 박사가 놀랐다.
「진혁 쉐프는 정말로 후각이 뛰어나군요. 지금 잠시 대화한 것만으로 그걸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무하마드 왕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제가 심사 위원으로 모시고 또 스승으로도 대우하며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겁니다.」
진혁은 이미 무하마드 왕자가 자기 대신 자신의 일을 자랑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린드버그 박사가 눈알을 굴렸다.
「그렇군요.」
‘정말로 숨김 맛으로 계피를 넣었는지 어떤지는 저자의 요리를 맛봐야 알 수 있지. 적당히 말한 것일 수도 있잖아?’
페드로 쉐프는 린드버그 박사가 진혁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차피 맛을 보고 나면 알게 될 테지.’
그렇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마리오가 다가왔다.
「예선 심사를 받고 싶습니다.」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필기시험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요리에는 자신이 있었다.
‘코코뱅.’
프랑스의 전통적인 닭요리. 각 지방의 특징적인 포도주에 닭을 넣고 뭉근하게 끓이고 졸여서 만드는 요리다. 코크 오 뱅(Coq au vin), 즉 코코뱅은 무조건 수탉을 재료로 만든다.
딱 봤을 때는 포도주를 넣고 요리했을 뿐, 우리나라의 찜닭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마리오는 오직 코코뱅의 소스만 가져왔을 뿐 다른 것들은 모두 바꿔버렸다.
‘저 오리고기의 강점은 오리 자체를 진하게 농축하고 쪄내서 그 맛을 쌀에서 느끼게 한 거니까 말이야.’
오리고기 요리 자체가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같은 고기로 재현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소고기를 농축하고자 했다.
‘소고기가 최고지. 스튜는 비프 스튜가 제일 맛있어.’
먼저 압력밥솥을 이용해 사골과 도가니를 빠른 시간 내에 진하게 끓여 졸여냈다. 그리고 그 졸인 것을 젤리와도 같은 큐브로 만들었다.
그리고 부챗살을 얇고 길게 잘라내어 따로 끓여 데쳐냈다.
‘진혁이 녀석이 만든 물엿은 정말 최종병기나 다름없다니까.’
여기서도 마법의 물엿이 등장했다.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혁이 만든 물엿은 달콤하면서도 모든 재료를 위화감 없이 붙여냈다.
부챗살에 물엿을 사용해 만두피처럼 만들고, 그 안에 얇게 썰어낸 두부와 감자, 쌀알과 소고기 국물 큐브를 넣었다.
「이건 무슨 요리입니까?」
마리오가 내놓은 요리는 겉보기에는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주먹밥에 고기를 씌워놓은 것 같기도 했고, 고기를 둥근 모양으로 익혀놓은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맛을 보죠.」
마리오는 심사위원들에게 세 개씩 고깃덩어리를 나누어 주었다. 동글동글하니 익혀나온 구형의 고기 뭉치를 보고서 무하마드 왕자가 코를 킁킁거렸다.
「양념은 프랑스식인가? 코르시카 산 최고급 와인을 썼군.」
「예, 코코뱅처럼 끓였습니다.」
정향과 생강, 마늘과 와인, 그리고 계피까지 아낌없이 향신료를 퍼부었다. 마리오는 자신이 있었다.
라시드는 제일 먼저 그 고깃덩어리를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입안에서 톡 터지면서 흘러나오는 국물을 음미했다.
「이건 그 중국 음식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맛있었다. 그리고 국물만이 아니라 작고 탱글탱글한 쌀알들도 굴러 나왔다. 쌀알 사이에는 더 작게 잘라내서 데쳐낸 한우 제비추리살 조각들이 숨어있었다.
완두콩과 양파, 당근과 감자 조각들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탱글탱글하게 씹히는 쌀알과 고기 조각의 식감은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샤오룽바오……?」
페드로 쉐프가 중얼거렸다. 소롱포, 육수가 만두 안쪽에 담겨 있는 중국식 만두와 비슷했다. 겉껍질을 고기로 만들고 안에 쌀 요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제과제빵사인 줄만 알았는데 요리도 꽤 하는데. 하긴 그러니까 푸드 팩토리에서 일하겠지?’
페드로 쉐프는 고기의 맛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푸드 팩토리에서 온갖 음식을 만들다 보니까 이것도 쉽게 느껴지네.’
무하마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잘 먹었습니다, 다음.」
「오!」
마리오는 예선을 통과했다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임진혁을 흘끔흘끔 보았다.
‘진혁아, 내가 만든 이 소고기 만두 맛있지 않냐? 나 잘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