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4화
외전 18화
임진희는 닭을 손질했다.
‘저 오븐을 써야겠어.’
운동장처럼 펼쳐져 있는 흙 마당은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유향이 좌측의 예멘식 오븐을 독점하며 갖가지 양념을 하는 동안 진희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쿠 밥솥을 써서 찌면 빠른 시간 내에 음식을 완성할 수 있긴 할 텐데.’
평소에 자주 하던 요리다. 닭 안에 인삼과 각종 한약재 그리고 찹쌀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한 시간 만에 훌륭한 닭백숙을 요리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시험 시간이 너무 길어.’
먼저 요리를 완성한 사람은 빨리 심사를 받을 수 있다.
그 증거로 지금 저 앞에서 치킨 요리를 완성한 사람이 심사를 받고 있었다. 진희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치킨 몰레입니다.」
짙은 검은색 눈썹과 곱슬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같은 색의 눈과 콧대와 광대가 높은 얼굴에 짙은 색 피부. 아무리 봐도 멕시코인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요리를 내놓았다.
언뜻 보면 카레나 짜장밥처럼 보였다.
큼직한 닭다리 살은 형체를 잃지 않은 채 가장 가운데에 올려져 있었다. 닭다리 살에 끼얹어진 갈색 소스도 그냥 소스가 아니었다. 잘게 손질한 감자와 당근, 브로콜리와 양파 따위의 채소가 들어있었다.
닭다리 살 외 다른 고기들은 먹기 쉬운 크기로 조각나 있었다. 뼈를 제거하고 난 닭의 순 살코기에서 지방과 껍질을 제거하고 토막 쳐 익힌 것이다. 그 닭고기 조각들은 양념에 물들어 짙은 갈색이었다.
소스를 얹은 닭고기와 잘 익혀낸 인디카 쌀의 조화를 멀리서 언뜻 본 진희는 익숙한 음식을 떠올렸다.
‘닭 다리를 올린 짜장밥?’
조명이 그늘져서 갈색 소스가 검게 보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골라낸 닭고기에 양념을 겹쳐 바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멕시코에도 짜장이 있나?’
짜장 라이스는 저쪽 앞에서 심사를 받고 있었다. 멀어서 음식의 향기는 맡지 못했다.
진희가 가까이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그 음식이 멕시코의 전통음식인 치킨 몰레(Chicken Mole)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카레처럼 다양한 채소와 고기를 넣고 양념해 장시간 끓여낸 음식이지만 각 지방마다, 집집마다 그 향신료의 배합이 다르다.
멕시코인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각종 요리대회를 석권했던 비장의 소스를 선보였다.
「매운 것을 잘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해서 할라피뇨가 아닌 마늘과 후추로 양념한 것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두 종류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심사 위원은 무하마드 왕자와 페드로 쉐프, 그리고 린드버그 박사와 꼬마 라시드였다.
향기와 맛을 연구하는 과학자, 린드버그 박사는 치킨 몰레의 형태를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이봐, 너무 나태한 거 아닌가?」
「예?」
린드버그 박사의 푸른색 눈이 안경 너머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문제를 생각해 보라고. 이건 그냥 당신 집에서 대대로 물려 받아온 치킨 몰레가 아닌가?」
「그래요, 향기만 맡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페드로 쉐프가 냉정하게 말했다.
「매운 할라피뇨와 호두, 아몬드와 마카다미아, 초콜릿과 계피를 듬뿍 넣어 끓이다가 인디카 쌀을 넣었죠.」
「예.」
「그게 어딜 봐서 아까 먹은 오리 구이의 맛을 어레인지한 겁니까?」
「그 오리 구이는 안쪽에 야채와 쌀을 넣어서 오랜 시간 익혔으니까요.」
「오리구이와 똑같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거기서는 쌀이 오리 기름을 빨아들여서 부드럽고, 향신료 역시 흡수했지. 하지만 이 안남미는 그냥 밥으로 해서 소스를 얹은 게 아닌가? 양념을 전혀 흡수하지 않았어.」
페드로 쉐프가 조목조목 따졌다. 무하마드 왕자 역시 눈썹을 찡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마르 왕자의 아들이자 무하마드 왕자의 친척인 라시드 왕자는 이 중에서 가장 어렸다. 어린 소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아주 맛있는 치킨 몰레였어. 그 오리구이와는 닮지 않았지만 말이야.」
임진혁이 약한 몸을 치유해주었던 소년은 이번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특별히 한국에 왔다.
‘이 대회가 끝나면 진혁 쉐프님을 볼 수 있다고 했지?’
사실은 진혁과 진혁의 가족에게 바로 방문하고 싶었지만, 삼촌이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여 주겠다고 대회에 참가해 달라고 요청해서 이쪽에 바로 온 것이다.
왕족 소년이 부드럽게 말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요리를 만들어 줘.」
멕시코인 청년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흰색 옷을 입은 소년의 정체를 몰랐다. 하지만 이 소년이 다른 심사위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마음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무하마드 왕자는 치킨 몰레를 탐내지 않았다. 그는 딱 한 술만을 먹어보았다.
‘초콜릿과 계피, 그리고 아몬드. 마카다미아. 페드로 쉐프가 다 맞군. 하지만 숨김 맛으로 할라피뇨 말고도 파프리카를 써서 맛의 통일성을 잡았어.’
맛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대회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하마드 왕자가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렸다.
「우리가 가정식을 먹고 싶었다면 가정식 콘테스트를 했을 거야, 후안 로드리게스. 돌아가게.」
멕시코인 청년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린아이의 위로를 받았다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서 뒤로 돌아섰다. 바로 탈락한 것이 분명했다.
‘와우.’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마이크를 통해 시험장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고민하던 임진희는 전기압력밥솥의 편리함을 버리기로 했다.
‘오래 끓여내서 푹 익히는 게 좋긴 하지. 스튜를 만들려면 말이야.’
그녀는 외할머니가 만들었던 추억의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추억.
「저건 너무 잘못 짚은 거 아닌가? 그냥 자기가 가장 잘 하는 요리를 한 거잖아.」
옆에서 마리오가 중얼거렸다. 임진희는 마리오를 흘긋 보았다.
‘비슷한 실수를 하는 사람이 많을걸?’
진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강원도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맛볼 수 있었던, 이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맛을 떠올렸다.
진희와 진혁이 가지고 있는 소울 푸드.
가마솥에 팔팔 끓여낸 토종닭 한 마리!
그때 할머니는 닭을 어떻게 요리했던가?
‘일단 제일 좋고 건강한 닭을 고르셨지.’
하지만 당시에는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 부부와 손자 손녀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여 주고 싶었던 할머니는 일부러 양을 불리셨다. 닭 뼈를 넣어 장시간 끓여낸 국물 요리에 미리 불려둔 찹쌀을 넣어 장시간 끓인다. 그러면 잘게 찢은 닭 다리 살과 닭가슴살 사이에 푹 익어 녹아내리는 쌀이 섞여 묵직한 죽이 된다.
물을 넣고 끓여서 양을 늘리는 죽이라면 한 마리의 닭으로 여러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그건 안 되고.”
임진희는 오리고기의 육질에 주목했다. 그녀는 아까 씹혔던 오리고기의 쫄깃함을 잊지 않았다.
‘오븐 구이.’
하지만 진희는 이 자리에 있는 오븐에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전기 오븐으로 닭을 굽다가 자칫 태우면 곤란하다. 그녀는 좀 더 자신이 다루기 쉬운 무언가를 원했다.
‘꼬치구이 같은 거면 좋겠는데. 직접 닭을 구우면서 계속해서 알아볼 수 있으니까.’
보니까 저쪽에 잘라낸 닭고기를 꼬치에 꽂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일본인 같지는 않았지만, 그 요리의 형태는 일본식이 분명했다.
최근의 한국식 닭꼬치가 점점 더 큼직해지는 것에 비해서 일본의 닭꼬치는 좀 더 조그마하고 종류가 다양했다.
‘데리야키 닭꼬치 맛있겠다.’
일본식 닭꼬치를 보자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도쿄에 출장 갈 때마다 유키코네 놀러 가면 그녀는 자신의 단골 이자카야에 데려가곤 했다.
거기서 내놓는 파와 염통, 그리고 닭 다리 살 꼬치는 정말로 일품이었다.
‘아냐, 아냐. 지금 다른 요리를 생각할 새는 없어.’
진희는 아까 임진혁을 보고 난 후로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 황미미에게 미움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조금 전에 지나친 진혁을 보니 더 그랬다. 그녀는 뭔가 좋은 것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꿀과 소금, 청양고추와 우유, 생강과 마늘. 버터까지 바른 닭.
‘소금은 특별히 플레이크 솔트를 썼어.’
미국의 포틀랜드에서 생산하는 플레이크 솔트. 푸드 팩토리에서 최근 사용하기 시작한 이 소금은 제임스 플렌치 사의 시그니처 바닷소금이다.
겨울에 되면 바닷가재들이 헌 껍질을 벗고 새로이 태어난다. 그 과정에서 탈피하고 남은 허물이 바닷물에 스러지며 바닷물 속의 미네랄과 콜라겐 농도가 증가한다. 봄과 여름, 가을에 만드는 바닷소금과 재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쌀알도 제일 좋은 거로 골랐고.’
일부러 찹쌀이 아닌 일반 쌀을 썼다. 경기도 이천 지방에서 생산하는 하이아미는 미네랄과 필수 아미노산을 다양하게 함유한 쌀로, 일반 백미에 비해 찰기가 높았다. 영양분이 풍부해 노인과 아이들에게 좋은 쌀, 진희는 이 쌀을 사용하고 싶었다.
“이제 적당한 오븐만 고르면 되는데.”
임진희는 두리번거리다가 우측의 문을 발견했다. 아까 그녀가 들어온 것과 다른 문이었다.
‘시험장에서 지나치게 늦게 나오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녀는 문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운동장을 발견했다.
그곳에선 루이스가 꼬치에 꽂은 칠면조를 땅속으로 미끄러뜨리고 있었다.
“루이스! 어디 있었나 했는데 여기에 있었네.”
루이스 강이 활기차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기 탄두르가 있어. 이거 써 봤지?”
“오.”
남는 탄두르가 있었다! 임진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딱이네.’
장유향이 특이하게 생긴 오븐을 전부 차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보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탄두르가 있다니 안심이었다.
탄두르(Tandoor).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방의 전통 흙 가마다.
가마라고는 하지만 형태는 항아리에 가깝다.
김칫독처럼 생긴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두고, 바닥에 석탄이나 숯, 나무를 깐다. 고온의 숯이 장시간 열을 발하고, 그 위에 흙판이나 꼬치를 걸고 고기를 굽는다.
한국에는 ‘탄두리 치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탄두리 치킨이란 탄두르에 구운 치킨을 말하는 것이다.
“이거라면 보면서 굽기를 조절할 수 있으니까.”
진희는 닭 안에 담겨져 있는 쌀과 은행, 밤과 인삼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실로 꿰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꼬치에 닭을 끼웠다.
“어디가 좋을까?”
꼬치를 탄두르 안쪽에 있는 걸이에 걸기만 하면 된다. 세 개의 탄두르가 비어 있었는데 각자 아래쪽에 있는 것이 달랐다.
석탄과 장작, 그리고 숯.
진희는 코를 킁킁거렸다.
“이쪽의 사과나무 장작은 내가 맡았어.”
“아아.”
진희가 웃었다. 그녀는 사과 김치를 닭요리와 함께 낼 생각이었다. 거기에 사과 장작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 숯도 좋아.’
참숯은 자주 써 오던 재료니까 오히려 더 좋다. 탄두르는 한두 번밖에 써보지 않았으니까 불 정도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 난 여기서 구울 거야.”
진희는 야심 차게 참숯 탄두르를 골랐다. 그녀는 닭을 안쪽의 걸이에 걸었다.
이제 버터를 발라주며 타지 않게 계속해서 지켜보며 뒤집어줄 생각이었다.
* * *
「무하마드 왕자, 대회는 어떻습니까?」
미미를 배웅한 임진혁이 어슬렁어슬렁 대회장으로 걸어들어왔다. 무하마드 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만큼 괜찮은 애들이 없어서.」
진혁의 미각 훈련을 거친 무하마드 왕자는 후각만으로도 대부분의 재료를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는 요리사들에게 실망한 상태였다.
페드로가 거들었다.
「아까 후안도 나름대로 준우승 후보 정도는 됐는데 생각 없이 대충 요리를 내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