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2화
외전 16화
임진혁은 진희나 가족들을 방에 데리고 들어오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이전에 살던 집과 다른 대저택의 사진을 진희나 어머니가 찍어서 자랑하는 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게 생각했다.
사치를 부려보지 못했으니 화려하고 큰 집을 보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번에 미미의 대처를 보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다.
‘교주의 거주지. 그 내부에서 후계자들이 머무는 육아실의 그림을 누군가 그려서 외부에 공개한다고 하면…….’
일월신교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처형이다. 아기들은 아직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나이다. 미니 주방과 주방은 진혁 역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청소를 하거나 하는 고용인들이 수시로 오간다.
진혁은 자신이 미미보다 더 보안에 신경을 덜 쓰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미리 허용해 둔 보육 교사와 경호원, 그리고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게 하면 안전 문제가 조금 더 나아질 겁니다.”
미미는 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혁이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보안 카메라 같은 전자 제품은 치우고 진을 설치하면 감히 침입하려고 한 외부인들은 무궁토록 미궁을 떠돌아,”
“잠깐만요.”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미미는 손을 내저었다.
“저희 집 보안은 괜찮아요. 핵폭탄은 견디지 못하겠지만 지하 벙커에 숨으면 괜찮을 수도 있고, 안전 문제는 그냥 핑계였어요.”
“핑계요?”
“그 미니 주방은 나중에 제가 당신하고 애들이랑 같이 과자도 굽고 빵도 만들면서 놀려고 특별히 크리스토퍼 씨한테 주문 제작한 거란 말이에요.”
진혁은 포크를 내려놓고 미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희 씨가 그걸 함부로 자랑해대는 바람에 그 주방이 알려졌잖아요. 제가 만들어둔 주방이랑 완벽하게 똑같은 걸 다른 사람들이 갖게 됐다고요.”
미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군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거절했을 텐데. 디아타 공주는 지금도 푸드 블록 팩토리에서 매년 새로운 블록을 주문하고 있으니까 거절하기 힘들다고요. 그리고 디아타 공주의 주문은 받고 무하마드 왕자의 주문을 거절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내 패밀리 키친이 여기저기 퍼져 버린다고요. 벌써 일곱 개나 주문을 받았어요.”
“미니 주방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군요.”
미미가 한숨을 쉬었다.
“아동용 갑옷 같은 거죠. 돈과 세력을 과시하는 거예요. 하필 인스타그램에 올려 버려서, 쯧. 아무것도 없고 돈만 있는 사람들도 주문을 하려고 귀찮게 해요.”
어린이는 금방 자란다. 그렇기에 어린이용 옷은 사이즈가 바뀌면 한 계절을 입다가 버려야 한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만들기 위해서 몇억이 넘게 들던 시대. 부유한 황제들은 어린 후계자를 위해서 황금과 은, 청동으로 갑옷을 만들었다. 1, 2년을 입고 나면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최신 유행의 갑옷이었다.
그걸 본 대귀족들 역시 황제를 쫓아 하고 싶어서 아들에게 갑옷을 만들어 주었다. 돈이 모자라 갑옷을 완성하지 못한 자도 있었고, 갑옷이 완성되기 전에 파산한 자도 있었다.
미미의 짧은 역사 이야기를 듣고서 진혁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애들이 나중에 자라서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가지면, 그때 미니 주방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풉.”
미미는 웃어 버렸다.
“그건 너무 먼 미래의 일이잖아요.”
진혁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자 이해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미가 누그러져서 말했다.
“……크리스토퍼 씨도 제가 고안한 미니 주방을 그대로 쓰지는 않고 각 주방에 맞게 재설계를 한다고 하긴 했어요.”
진혁은 미미의 말을 들으며 기름진 밥알을 혀끝에서 굴렸다. 농후한 오리의 지방이 기 버터와 함께 농축되어 있다. 후추와 정향 등 갖은 향신료로 양념을 한 밥은 밥 자체로도 훌륭한 요리였다. 느끼하지 않고 고소했다.
하지만 그는 미미한 비린내를 느낄 수 있었다.
‘오리 누린내를 잡는 시간을 좀 더 길게 해야 했을 텐데.’
하지만 아주 맛있었다. 진혁이 음식의 맛을 음미하고 있자 미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는 어른스럽지 못하게 행동했어요. 진희 씨에게 적당한 보답을 해야겠어요.”
“진희가 미미 씨보다 나이가 많은데요?”
“하지만 제가 회사의 상사고, 집안의 어른이니까요.”
미미가 포크를 쥐며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 폐기했던 계획을 다시 실행하겠어요.”
“설마 그 계획 말입니까?”
“네.”
황미미가 눈을 번득였다.
“결혼한 남매의 살림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 외로워서 그런 게 틀림없어요.”
미미는 황씨 집안에 충성심을 가진 능력 있고 잘생긴 남자들을 후보자로 선발해 임진희의 주변에 뿌려 두었다. 비서, 직장 동료 등등 다양한 후보자들이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과 자연스러운 연애를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으나 진희는 결국 아무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진희는 진혁의 유일한 남매였다. 그러니 진희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황가의 재산이나 권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제일 가능성 높은 후보자는 진희의 사람됨을 알게 되면서 거짓된 마음으로 접근하지 않겠다고 미미에게 보고했다.
‘그러면 제대로 연애를 해 보든지!’
그렇지만 이후에도 계획은 모두 실패해 버렸고, 그 계획은 자연스럽게 폐기하였다.
“블라인드 데이트라는 문화가 있어요.”
“그거 한국에도 있습니다. 소개팅이라고.”
“제가 괜찮은 사람들을 소개해 줄 거예요.”
진혁은 아직 다 먹지 못한 오리고기를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됐지?’
미미와 진희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너무 멀리 나갔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진희는 비혼하겠다고 하던데요.”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가까운 친구 둘이 형편없는 남편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어서 그래요. 친구들의 이혼을 도와주고, 제대로 된 신랑을 새로 찾아줘야겠어요. 친구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보면 마음이 바뀔 거예요.”
그녀는 단호했다.
“…….”
진혁은 눈알을 굴렸다. 그가 말리기 위해서 새로운 말을 할 때마다 상황이 다르게 계속 바뀌었다.
‘이전의 나를 볼 때 진희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미미에게는 전능감이 있었다. 돈과 권력이 있다면 거의 뭐든지 할 수 있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아주 쉽게 바꿀 수 있다.
과거에 광안마 역시 그랬다. 하지만 광안마는 명확한 의도, 즉 일월신교의 포교를 우선으로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미의 목적은 ‘진혁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였는데 자꾸 다른 일을 끼워 넣으려 했다.
진혁은 광안마가 자기 침실에 집어넣었던 수많은 여자들을 떠올렸다. 지금 이 계획도 사실 그렇게 다르지는 않게 느껴졌다.
‘사실 똑같지. 침실이 아니라 주변에 접근하게끔 한다는 걸 빼면.’
그는 이전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해도 인연이 아니면 잘 되지 않을 테니까,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임진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미미 씨.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면 됩니다.”
“…….”
“하지만 아시죠? 진희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친구 두 명이 결혼에 실패했다가 다시 잘됐다고 해서 결혼하고 싶어질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네.”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리구이가 맛있네요.”
진혁이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미미는 그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아랍 요리가 마음에 들면 아랍인 요리사를 한 명 고용할까 봐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하지만 이 요리는 아랍식이라기보다 예멘식이니 예멘인 요리사를 고용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주방에 화덕도 두어 개 더 설치해야 하고요.”
부부가 미소를 교환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 * *
한편 마리오는 1번 문제를 노려보면서 연필을 굴리고 있었다.
‘나 이거 아는 건데.’
푸른색 껍질의 달걀.
그는 이 달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달걀노른자가 노랗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름도 ‘노른자’라고 붙였다. 그렇지만 정말로 신선한 달걀의 노른자는 주황색이다.
이 푸른 껍질의 달걀을 낳는 닭은 야생닭이었다. 개량되어 매일매일 달걀을 낳는 닭이 아니다. 정글에서 살면서 며칠에 한 번 영양분을 농축한 진한 달걀을 낳는 이 닭은 보통 산란계들보다 덩치가 작았다. 하지만 달걀에 담긴 영양분만은 일반적인 달걀들보다 훨씬 최고였다.
황혼에 저무는 태양처럼 찬란한 주홍빛 달걀. 마리오가 베이킹을 할 때도 쓰는 이 달걀은 식량 창고의 우측 세 번째 서랍에 보관되어 있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토요일에만 배달되어 온다. 풀어 키우며 곤충을 먹고 자라는 닭들이 이틀에 한 번씩 달걀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
마리오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진짜로 아는 건데 기억이 안 나서 답답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나랑 형제잖아! 텔레파시 좀 보내 줘! 이거 이름 뭐냐고!’
하지만 루이스는 마리오의 텔레파시를 수신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지를 제출하고 교실을 떠났다. 마리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오…….’
마리오는 섭섭했다. 임진희는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서 교실을 떠났다. 방 안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다. 마리오는 결심한 듯 답안지에 답을 적기 시작했다.
[이 달걀은 푸드 팩토리 식량창고 우측 세 번째 서랍에 보관되어 있음. 파리 외곽의 와쥬 블루 농장에서 생산함.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배달됨.]
와쥬 블루(L’Oiseau Bleu)는 파랑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닭의 깃털은 파랑새가 아니었다.
‘달걀만 파란색인데 왜 파랑새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어쨌거나 답안을 적어서 제출한 마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리고기를 먹게 되었다.
“지금 자리가 없어서, 여기 동석하셔야 해요. 아니면 다른 데서 기다리셔도 되고요.”
“그럼 여기 앉을게요.”
안내원이 데려다준 자리의 맞은편에는 수염이 긴 동양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오리고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마리오는 몰랐지만, 그 둘은 장유향과 그의 통역사였다. 그리고 두 응시자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안내원이 동석해 있었다.
웨이터가 접시를 들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오리 반 마리와 곁들여진 쌀, 그리고 찐 채소들.
알 마추부스였다.
마리오는 알 마추부스를 보고 생각했다.
‘강황 향이 아주 강한데. 새로운 스타일의 탄두리 커리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또 색깔이 다르고.’
마리오가 포크를 들어 오리고기를 먹었다. 부드럽고 향긋하며 고소하다. 시험 때문에 엉망이었던 마리오의 표정이 점차 부드럽게 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양인 노인의 눈에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청년, 이게 맛있어 보이지만 말이야. 사실 내가 만든 오리고기가 더 맛있다고!』
노인은 오리고기를 포크에 꽂아 흔들어 보이며 크게 외쳤다.
장유향의 돌발적인 행동에 그의 통역사가 당황하여 안내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