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1화
외전 15화
‘필기시험이라니.’
시험장에는 한국어 시험지와 영어 시험지, 프랑스어 시험지, 스페인어 시험지 등 다양한 언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희는 고민 없이 한국어 시험지를 골랐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시험을 보고 있지.’
다행히 문제의 개수는 많지 않았다.
‘1번. 해당 달걀을 낳는 닭의 품종명을 적으시오.’
날달걀의 사진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진희는 시험지의 종이를 만져 보았다. 잡지 화보처럼 매끄러운 고급 종이였다. 진희는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팸플릿의 견적을 내본 적이 있어 이 시험지의 원가를 대략 계산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비싸잖아. 시험지에 뭐 이렇게 돈을 많이 썼어.’
이 대회의 참가비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무하마드 왕자는 자선 사업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진희는 푸르스름한 달걀 껍질과 탱글탱글하니 선명한 주홍빛 노른자 사진을 보고 주저 없이 답을 적었다.
‘청계- 아라우카나.’
아라우카나는 이틀에 한 번 가량 자그마한 푸른색 달걀을 낳는 야생종 닭으로, 가두어 키우면 스트레스를 받아 금방 죽는다. 국내에는 제주도에 방사 농장이 하나 있을 뿐이다. 진희는 최근에 달걀을 이용한 푸드 블록을 개발한 적이 있어 사진만 보고도 품종명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 사진은 무척 헷갈렸다.
‘갈색 달걀은 너무 많은데.’
연갈색 달걀은 로드아일랜드레드종이 아니면 뉴햄프셔종의 달걀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부분의 국산 산란계는 로드아일랜드레드종이나 뉴햄프셔 종이기 때문이다.
60년대까지는 국내 산란계의 대부분이 미국산 레그혼이라 하얀 달걀이 대세였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에는 황금란을 선호하는 풍조가 있어 산란계의 품종이 바뀌었다.
‘지금도 국내 달걀의 99%는 갈색이니까.’
하얀 달걀의 경우 껍질이 얇아 훨씬 더 잘 깨지고, 작은 얼룩만 묻어도 더러워지기 쉬워 유통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진희는 달걀의 역사를 공부할 때 배웠던 사실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지금 이 사진만으로는 로드아일랜드레드와 뉴햄프셔 중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크기를 보고 달걀을 만져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텐데 사진만으로는 전혀 모르겠네.’
그녀는 찍기로 했다.
‘로드아일랜드레드로 하자. 그게 더 흔하니까.’
그리고 누군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시험관이었다.
진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익숙한 검은 바지가 보였다. 차고 있던 명품 벨트 역시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었다.
‘임진혁?! 왜 여기에 있어?!’
진희는 임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진혁은 혀를 쯧쯧 차는 것 같았다. 그는 복도를 지나 책상 옆을 전부 돌더니 앞으로 다시 나갔다. 임진희는 진혁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나 지금 틀린 거야?’
그녀는 로드아일랜드레드를 벅벅 지우고 뉴햄프셔라고 썼다. 그리고 다시 고민했다.
‘잠깐, 내 답안지를 보고 혀를 찬 게 맞나? 내 헤어스타일이 이상해서 혀를 찬 건 아니겠지?’
그 이후에도 달걀과 토마토, 딸기와 고구마 등.
다양한 식재료의 사진을 보고 골라야 했다.
‘푸드 팩토리에서 다양한 식재료를 골라왔던 경험이 도움이 되네.’
진희는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루이스와 마리오는 이거 다 맞추겠다. 그렇지만 일반인이나 그냥 요리사들은 이거 다는 못 맞출 거 같은데?’
보통 요리사들은 레스토랑에서 매일 사용하던 재료를 사용하게 마련이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때가 아닌 이상 다양한 요리 재료를 사용해 보기는 어렵다. 당장 토마토 요리를 한다고 해도 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토마토를 고르지, 세계의 토마토들을 종류별로 공수해서 비교해 볼 일은 없다. 진희는 푸드 팩토리에서 맛보았던 요리 재료들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문제를 다 풀고 나서 제출해 주십시오.”
진희는 제일 먼저 문제를 다 풀었다. 토익 시험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시험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답안지와 함께 교탁에 제출했다.
“제출하신 분은 복도로 나가서 안내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진희는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임진혁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잠깐 순회하러 온 건가.’
복도에는 요리사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진희는 그 여자를 따라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안내원은 1층 후원까지 진희를 데려다주었다.
“여기까지 오시면 됩니다.”
1층 후원에는 자그마한 테라스가 있었다. 하얀 테이블에는 이미 1인분의 요리가 차려져 있었고, 진희는 그 앞에 앉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벚나무 아래 하얀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은 오리고기 요리였다. 기름을 발라 익힌 쌀 위에 오리고기가 반 마리 놓여 있었고, 감자와 당근, 양파 등 익숙한 채소들이 오리를 장식했다.
‘이 요리는…….’
벚꽃잎이 흩날렸다. 진희는 포크를 들어 오리고기를 한 입 먹었다.
맛있었다.
장유향의 진흙 오리구이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본래는 퍽퍽할 가슴살조차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훅 풍기며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파삭하니 얇게 익은 껍질은 기름기 없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느끼하지가 않았다.
진희는 이 오리 요리를 어떻게 했을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건…… 찐 것 같은데. 기름기를 어떻게 뺀 거지?’
아무리 봐도 오리 백숙 같았다. 하지만 물에 넣고 삶았다고 보기에는 기름기가 너무나 없었다. 바비큐처럼 기름이 쫙 빠져 있었다. 오리를 뒤적거려 보자 꼬치에 꿰뚫린 구멍이 보였다.
커민과 강황, 정향과 카다멈. 마늘과 후추, 사프란.
익숙한 향신료들이 낯선 배합으로 조합되어 강렬한 향기를 풍겼다. 거기에 벚꽃의 향기도 선명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진희는 다른 것들도 먹어 보기로 했다. 먼저 숟가락으로 장립종 쌀밥을 뜨고 그 위에 조그마한 감자 조각과 통마늘 하나를 올렸다. 한 수저를 입안에 넣자 기름기가 확 퍼졌다. 고소한 오리 기름의 맛이었다.
밥알 하나하나에 오리 기름이 농축되어 진하기 그지없었다.
스물네 시간은 끊인 사골 육수처럼, 오리의 정수가 이 쌀알 안에 담겨 있었다.
“우와.”
한국에서 흔히 먹던 단립종 쌀과 달리 길쭉길쭉한 쌀. 리조또처럼 투명하게 익었는데도 고소하고 향기롭다.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렀다. 한국의 밥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고슬고슬한 밥과 달리 찐득하리만큼 버터와 오리 기름의 향이 풍겨, 마치 떡과도 같이 쫄깃한 밥.
진흙 오리구이의 배 안에 차 있던 찹쌀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맛이었다.
“맛있어!”
입술에 기름기가 묻은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고서 진희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이래서 진혁이가 유향이 아저씨보고 와 달라고 했구나.’
장유향의 오리구이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유향의 화덕 오리구이는 살코기가 단단하면서 씹는 맛이 있었는데 이 오리고기는 장시간 찐 것처럼 부드러웠다. 둘 다 아주 맛있었지만, 굳이 고르자면 진희는 이쪽이 더 취향이었다.
임진희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아까 보았던 요리사가 다가왔다. 그녀는 종이를 한 장 건네주었다.
진희는 그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먹은 요리가 어떻게 맛있었습니까? 그 요리의 맛을 살려 요리를 해 주십시오!>
지시문은 짧고 간단했다.
요리 재료의 제한도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맛있었냐고? 그냥 맛있었는데.’
고기는 부드럽고 향이 풍부했으며 누린내가 없었다. 밥은 고소하고 맛이 깊었으며, 채소들은 푹 익어 보들보들했다.
기본에 충실한 가정식이었다.
‘어느 나라 요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아주 잘 된 요리야. 할머니가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을 사용해 요리한 것 같은…….’
김치로 치자면 종갓집 김치 같았다.
먹어서 맛있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있냐면 그건 아니다.
진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요리 재료는 이 문을 열고 가져오시면 되고, 화덕은 거실에 있습니다.”
“…….”
임진희는 눈알을 굴렸다.
테라스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 요리 재료 창고의 문을 열자 거대한 창고가 보였다. 절반은 냉동고, 절반은 냉장고였다.
냉장고에 있는 붉고 흰 살코기들이 눈에 띄었다. 오리와 닭, 칠면조와 메추리, 돼지고기와 소고기, 캥거루 고기와 말고기.
채소와 향신료도 종류가 많았다. 붉고 푸르고 노란 과일과 채소, 그리고 작은 유리병에 담긴 향신료들이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루이스가 오리고기를 집어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리오는?”
“나보다 더 빨리 요리를 시작한 것 같아.”
진희는 생각에 잠겼다.
‘방금 맛있었던 거. 고기가 부드러워서 좋았고 향이 강하고.’
그녀는 맛이 진한 오리가 아니라 부드러운 닭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향신료로는 자신에게 제일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김치를 골랐다.
‘사과 김치.’
얼마 전에 푸드 팩토리에서 새로운 푸드 블록을 개발할 때 발견했던 메뉴다.
배추가 아닌 사과에 생강과 꿀, 멸치액젓과 마늘, 부추를 넣어 간을 한 사과 김치는 달콤하면서도 매콤하다.
발효하고 나면 매운맛도 덜해져 닭고기의 부드러운 맛을 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설탕 말고 꿀을 쓰자.’
솔직히 빵을 굽고 싶었다. 그녀는 요리사가 아니라 페이스트리 쉐프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먹은 오리 구이는 빵으로 그 맛을 재현해낼 수가 없었다.
‘꿀은 코르시카산 사과 꿀을 써서 사과 향을 두 겹으로 진하게 하는 거야.’
아이디어가 쌓이자 용기가 났다.
“좋아. 잘 해보자고.”
그녀는 먼저 닭부터 골라냈다.
* * *
요리학교의 5층에 만들어진 귀빈실에서 임진혁은 황미미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하마드 왕자가 호탕하게 황미미도 초청해 준 것이다.
「우리 아랍 요리의 진수를 맛보라고!」
요리사가 특별히 더 준비해둔 아랍 요리는 무하마드 왕자의 추천답게 훌륭했다. 오늘 시험 메뉴로 나온 오리고기 요리는 정말로 맛있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황미미도 칭찬할 정도였다.
“이 오리고기는 정말로 장유향 숙수님이 먹어야 할 만한 맛이네요.”
온갖 고급 식사를 하고 자라 입이 까다로운 미미도 사양하지 않고 계속 오리고기를 먹었다. 죽처럼 익은 쌀 요리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장유향 숙수님도 이번에 저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미미가 고개를 들었다.
“장유향 숙수님은 사업 때문에 바쁘실 텐데요. 그냥 이 요리만 드셔도 괜찮을 텐데, 굳이 대회에 참석까지 하셔야 했을까요?”
진혁이 오리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필기 시험성적으로 보면 아마 1회차나 2회차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사업에 시간을 투자할 시간이 많겠죠.”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진흙 오리구이의 대부님께서 미식 평론 대회에서 초반에서 탈락하면 사업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어요.”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미미 씨는 항상 한 걸음 앞을 먼저 내다보시는군요.”
“장유향 숙수님의 참가는 아예 보도하지 않는 거로 하죠. 이건 알려지면 곤란해요.”
그녀가 왕 비서에게 문자로 지시를 내렸다. 진혁이 스마트폰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진희가 멋대로 사진을 SNS에 올려서 곤란해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진희를 아예 집 안에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밖에서 만나죠.”
극단적인 방법에 미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제가 관리하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