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9화
외전 13화
‘아버지에게 혼났다.’
진혁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굳게 믿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놀란 모양이었다. 이렇게 혼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린아이가 오븐에 접근하면 위험해. 자칫해서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그래, 진혁아. 이번에는 네가 잘못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거들었다. 장남은 크게 놀라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혼나고 있다. 저자가 혼나고 있어.’
차남이 꺄르륵 웃었다.
“할압뿌-우.”
차남이 뒤뚱뒤뚱 걸어가 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애교를 부리는 둘째 손자를 보고서 아버지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후우.”
아버지는 아기를 안는데 서툴렀다. 불편하게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둘째 손자를 어머니가 받아들었다.
“우리 명이가 아주 복덩이야, 복덩이.”
아버지 앞에서 혼나는 임진혁을 보며 장남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확실히 닮았다.’
조부모는 사업이 바빠 손자들을 자주 찾아오지 못했다.
정확히는 진혁이 자신이 없을 때에는 두 아기들이 조부모를 보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었다. 무공이 뛰어난 아기들이 조부모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옆에 있고, 부모님은 장남과 어느 정도 관계를 형성한 상태였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긴 뭐야?”
임진혁은 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미니 주방을 공개했다.
“당연히 위험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계속 곁에 있었어요.”
장난감처럼 조그마한 조리대와 오븐, 인덕션 전기레인지를 본 아버지가 놀랐다.
“이게 실제로 작동하는 거라고?”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미니 가전제품들의 뒤편을 살폈다.
“너무 귀엽다. 여기 전기 코드도 있네.”
“보시면 안전을 위해서 여기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작동시킬 수 있어요.”
“이거 그래도 위험할 수 있겠는데.”
“전기를 꽂지 않았을 때는 그냥 장난감이구나?”
“네.”
아버지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한 살짜리 아기랑 실제 오븐을 쓴 줄 알았다.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지. 네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 것을.”
어머니는 아기자기한 미니 주방의 사진을 찍었다.
“작고 귀엽잖아요. 검은색 인덕션 레인지에 스테인리스, 그리고 여기 조그마한 식기세척기까지 아주 다 갖춰져 있는 것 좀 봐요. 서랍하고 그릇까지 다 어린이용이네요.”
한 살 정도 되는 유아의 평균 신장은 81cm 전후다. 하지만 미미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쯤 미니 주방을 사용할 것이라 생각해, 대략 신장 135cm에 맞추도록 주방을 설계했다. 그 앞에 160cm의 어머니가 서서 브이 자를 그렸다.
“저 이거랑 같이 사진 찍어 줘요.”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작긴 하네.”
미니 주방 세트와 진혁의 진짜 주방은 나란히 있었다.
그렇게 두 개만 찍었을 때는 그냥 샘플과 일반 주방처럼 보였다. 그런데 앞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자 미니 주방이 얼마나 작은지 더 강조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소꿉놀이 세트가 있었으면 정말 세상에 바랄 게 없었겠어.”
어머니는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실제로 켜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달걀 있니?”
“있어요.”
“여기 미니 프라이팬에 달걀부침을 해 보고 싶은데.”
“음.”
진혁이 전기 인덕션을 켜 주었다. 그리고 성인 주방에서 꺼낸 6인치 프라이팬을 미니 인덕션 위에 올려 주었다.
“예열하고 나서 하실 거죠?”
그들은 프라이팬이 예열되는 것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진을 한 장 찍어 주었다.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고서 어머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보, 기본 카메라 말고요. 여기 이 프로그램으로 적용해 주세요.”
“아주 딴 사람같이 뽀샤시하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진혁은 두 아이를 다 안아 들었다. 첫째는 가만히 있었으나 둘째가 바둥거렸다. 천진난만한 둘째가 이것저것 잡아당겨 보고 싶어 하며 손을 내뻗었다. 다른 쪽 팔에 안겨있는 장남이 차남의 손가락을 맞잡았다.
‘자, 가만히 있어.’
‘웅.’
둘째는 첫째 말을 잘 들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프라이팬 위에 버터를 조금 바르고 달걀을 깼다.
“응.”
장남은 동생의 손가락을 꽉 잡은 채로 할머니가 요리하는 것을 구경했다.
‘역시 조부모님들은 무공을 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장은효도, 임운정도 두 사람 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아버지…….’
남궁소천은 임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임진혁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고아 부대의 살수로서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마교의 소교주가 되어 진전을 이어받아 마침내 마교의 교주가 된 자.’
하지만 환골탈태를 한 이후 쿠키도 함께 굽고 사회와 수학, 언어 교육을 받으며 남궁소천은 자신이 임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섭혼술을 통해서 가짜 기억을 심은 줄 알았는데.’
임진혁이 적당히 닮은 사람을 골라내 가짜 기억을 심고, 조부모 역할을 하게끔 조종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만 닮은 게 아니야.’
진혁의 아버지인 임운정과 어머니 장은효, 두 사람과 임진혁은 아주 닮았다. 쌍둥이 남매라던 임진희 역시 비슷하게 생겼다. 누가 봐도 친가족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남궁소천, 아니 임책 자신의 얼굴도 닮았다. 눈썹과 코는 임운정을 닮았고 귀는 장은효를 닮았으며 입매는 황미미를 쏙 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렸을 적 사진들을 보여주며 발가락이 지금 손자들과 닮았다고 주장했다.
색이 바랜 옛날 사진들이 수없이 쌓여있었다. 최근에 탄 상과 명예 훈장들까지, 임진혁의 과거는 아주 뚜렷하고 확고했다.
그는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왔고 언젠가 흘러가 버릴 부평초가 아니었다. 이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였다.
‘이제 내 이름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가 봐.’
임진혁은 지금 이 시대에서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적응해, 평범한 사람인 척 살고 있다. 실제로 평범해 보이기도 했다.
‘세상에 정말로 적응해야 할 건 나야.’
남궁소천, 아니 임책은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탱글탱글한 주황빛 달걀노른자 곁의 투명한 흰자가 완연한 흰색으로 익어갔다.
할머니 장은효가 무릎을 구부린 채 달걀 프라이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것 봐, 정말로 작동하네.”
임운정 할아버지는 충실하게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어 주었다. 사이좋은 노부부였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노부부가 서로를 아끼고 있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임책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이런 식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결혼하고 자녀를 두고 늙어가는 것도 좋겠지…….’
아직 두 살이 되기 전이었지만 벌써 평범한 삶을 꿈꾸는 임책이었다.
* * *
장은효는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나서 만족했다.
“기능이 아주 좋구나.”
그리고 달걀 프라이가 올라간 주방의 모양도 또 찍어 달라고 했다.
“이것도 또 찍어?”
임운정은 지친 듯 눈알을 굴렸다. 장은효가 방긋 웃었다.
“진희한테 자랑하려구요.”
어머니는 진희에게 사진을 보냈다.
3분 후.
임진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엄마가 찍어 보낸 그 미니 오븐 말이야. 언제부터 팔아?”
“응?”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진희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받은 미니 오븐 사진을 받자마자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러자 팔로워들이 일제히 문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 미니 오븐은 어디서 팔아요?”
“너무 귀여워요!”
“우리 집에도 설치하고 싶은데.”
댓글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VIP 중의 VIP, 푸드 블록의 가장 큰 고객인 디아타 공주였다. 그 공주에게서 다이렉트 메시지가 왔다.
“디아타 공주님께서 따님을 위해서 미니 오븐이랑 전기 레인지를 갖고 싶대. 어디서 제작했냐고 물어보시는데.”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잘 몰라. 미미 씨가 주문 제작한 거라서.”
“황 회장님이 직접? 음……, 그거 혹시 추가 주문 가능한지 물어봐 주면 안 돼? 지금 디아타 공주님만이 아니라 무하마드 왕자님까지 주문을 하고 싶어하는데.”
진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연락처 있잖아? 직접 물어봐.”
“내가 물어보는 거랑 다르단 말이야.”
진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황 회장님이 얼마나 무서운데.’
처음에 소개를 받았을 때는 상냥하고 친절한 올케라고만 생각했다.
외국인이니까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희는 푸드 블록 체인에서 실무자로 일하면서 황미미와 자신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황미미는 가족에게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진희에게는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달랐다. 일할 때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20대 초반에 거대한 기업을 물려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진희는 함께 일을 하면서 황미미의 평판을 실감했다. 진혁이 말했다.
“그래도 이제 가족인데 직접 얘기해도 되지. 네가 직접 주문받았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럴까?”
임진희가 솔깃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직접 물어볼게.”
* * *
임진희는 황 회장과의 직통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받은 것이다.
“진희 씨.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어요.”
황미미가 차갑게 말했다. 진희가 놀랐다.
“예?”
“지금 저희 집의 주방 사진을 SNS에 공개하셨던데요.”
“아, 예. 그렇죠. 지금 디아타 공주님하고 무하마드 왕자님, 그리고 여든 명 정도가 미니 주방의 가전제품을 사고 싶다고 해서요.”
“저희 집안의 내부 구조는 외부에 함부로 공개하지 않아요. 그런데 상의도 없이 글을 올리셨어요.”
진희는 놀라서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족들끼리 보는 건 괜찮지만 외부에 올리시는 건 지양해 주세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임진희가 사과하자 황미미가 부드럽게 말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 그게.”
“주문 제작은 제가 업체를 소개해 드릴 수는 있어요. 왕 비서에게 목록을 넘겨 주시면 알아서 처리할게요.”
진희는 승낙했다.
“바로 보내드릴게요.”
‘역시 무서워.’
임진희는 전화를 끊고 이마를 감쌌다.
“아! 또 실수했어! 회장님한테 찍혔어!”
“진, 무슨 일이야?”
옆에서 새로운 푸드 블록 메뉴를 구상하기 위해 과일들을 늘어놓고 있던 마리오가 물었다.
“으으으으. 어머니한테 받은 사진이 너무 귀여워서 SNS에 올렸거든. 올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당장 지워야겠어.”
“나 좀 보여 줘.”
마리오는 그 사진을 보고서 눈알을 굴렸다.
“이 미니 주방 나도 갖고 싶다. 애한테 만들어 주고 같이 요리하면 완벽하겠는데? 진, 나 소개팅 좀 해 줘. 일단 아이부터 있어야겠어.”
옆에서 수플레용 반죽을 휘젓고 있던 루이스가 마리오에게 핀잔을 주었다.
“마리오, 지금은 진희를 위로해 줘야지.”
“아니다. 연애해서 임신까지 가려면 너무 오래 걸리지. 입양을 하면 어떨까?”
“마리오, 형 말 듣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