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8화
외전 12화
진혁은 무하마드 왕자에게 받은 선물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하마드 왕자는 친절하게 운전사를 시켜서 집으로 자동차도 배송해 주었다.
집에 들어오니 미미가 거실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진혁은 티테이블에서 낯익은 음식을 보았다. 진혁이 오늘 아침에 구워두고 간 치즈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이미 한 입 먹은 듯했다.
‘먹었군.’
자신이 만든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먹어준다. 최근에는 치즈케이크를 보내기만 했지,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었는데…… 진혁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재킷을 걸어두고서 미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미가 방긋 웃었다.
“어서 와요.”
미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의 카트에 준비된 찻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두른 하얀 도자기 잔 속에 붉고 투명한 홍차를 새로 따랐다.
“제 겁니까?”
“예.”
“그럼 이건 당신의 물건입니다.”
진혁은 세 개의 람보르기니 SUV 키를 그대로 내밀었다.
미미가 낯익은 브랜드명을 보고서 웃었다.
“설마하니 했는데 정말이네요.”
“뭐가요?”
“무하마드 왕자님이 주문 제작한 안전한 SUV. 아이 둘을 안전하게 태울 수 있는 걸 우선하느라 카시트도 따로 주문 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무하마드 왕자님의 자녀분들은 전부 성인이고 따로 손자도 없으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 진혁 씨한테 선물하려고 그런 거였군요.”
대략 일 년 전부터 제작을 시작했을 거라고 미미가 덧붙였다.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제가 제작하려고 하는 방탄유리를 먼저 채가서, 제 주문 제작이 늦춰졌어요.”
미미가 투덜거렸다.
“왕족들이란 제멋대로라니까요. 선물을 하려고 한다고 제가 제작 중인 차 출고도 늦어지게 하고.”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치즈 케이크를 살폈다.
그가 오늘 구운 케이크는 크림치즈 케이크에 초콜릿을 살짝 곁들인 것이었다. 크림치즈 위의 치즈 케이크 부분에 무하마드 왕자가 좋아하는 에티오피아 산 초콜릿 칩이 콕콕 박혀 있다. 미미는 초콜릿을 절묘하게 피해서 케이크 조각만 집어갔다.
“그렇군요.”
‘다음에는 초콜릿 칩은 아예 빼야겠군.’
진혁의 시선이 치즈 케이크에 가 있자 미미가 웃었다.
“오늘 치즈 케이크도 아주 맛있어요.”
그때, 미미가 귀에 끼고 있는 인이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오늘은 꼭 이야기한다고 했잖아요!」
「이제 치즈 케이크 말고 다른 것도 먹고 싶다고!」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얘기하기로 했잖아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 아티스트. 그리고 미미의 전속 운동 트레이너까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모두 인이어에서 들려왔다.
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뛰어난 청력으로 미미의 부하들이 결혼생활에 조언해 주는 것을 들을 수 있었으나 모른 척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치즈 케이크가 싫습니까?”
“시, 싫은 건 아니에요!”
미미가 황급하게 부정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오늘 우리 아들이 한글을 다 뗐어요.”
미미가 스마트패드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노골적인 화제전환이었지만 진혁은 그대로 따라주었다. 스마트패드 속에는 한글을 보고 따라 쓰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진혁은 장남을 바로 알아보았다.
“……책이 말입니까?”
“네. 명이는 아직 익히지 못했어요. 자기 이름을 따라 쓸 수 있는 정도에요.”
“그렇군요.”
책이는 하루 만에 한글을 전부 익혔다고 한다. 진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남궁소천은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은 진기가 활성화되어 뇌의 능력도 증진되어 있으니 단순 암기는 금방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자문도 절반은 뗐어요!”
‘……절반이라니.’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천자문 정도는 하루 만에 뗄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아직 두 살도 안 됐다구요! 너무 일러요.”
“…….”
미미는 이제 바로 로마자 알파벳과 아랍어 문자도 익힐 거라며 신나 했고 진혁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미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앗, 잠시만요.”
그리고 아내가 왕 비서의 연락을 받아 사무실로 다시 돌아갔다. 진혁은 육아실로 향했다.
『한글을 다 뗐다며?』
『…….』
장남이 지친 듯 누워 있었다.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80대 노인의 표정이었다.
옆에서는 차남이 모빌을 잡아당기며 옹알이를 하고 있는데 둘의 모습이 무척 대조되었다. 진혁이 빙긋 웃었다. 그는 아들을 놀려주고 싶었다.
『여, 천자문 다 뗀 무림 맹주.』
장남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무림맹주가 아니고 이곳에는 무림맹이 없고……!』
횡설수설하는 장남을 보고서 진혁이 물었다.
『공부하는 게 싫은가?』
장남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싫은 건 아닌데.』
『그런데?』
『무공을 익힐 시간을 자꾸 빼앗기니까.』
천자문 정도는 괜찮다. 그간 써오던 번체자 대신 간체자를 암기하는 것도 시간을 들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남궁소천에게는 미래가 보였다.
‘빨리 익히면 안 돼. 그러면 또 다른 걸 가르쳐 줄 거야.’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어린 나이에 환골탈태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임독양맥의 통로가 전부 뚫렸고, 24시간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축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통 여덟 살에서 열 살 전후에 심법을 익혀 시작하는 축기를 이 시기에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이전에 닿지 못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아니, 외국의 언어에. 문자에. 수리는 도대체 왜 공부해야 한다는 거야? 덧셈과 뺄셈이면 됐지. 곱셈이라는 건 대체 뭐냐고. 구구단이라니.』
장남이 투덜거렸다. 이 녀석도 만만찮은 무공광이었다. 무공을 익힐 시간에 자꾸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루의 절반은 어머니의 영재 교육을 받아. 나머지 절반은 나와 함께 빵을 만들자고.』
『진기를 잔뜩 담아서 영약급의 음식을 만들면 뭐해, 맛보지도 못하는데.』
‘아, 맞다. 이 녀석 눈앞에서 초콜릿을 빼앗겼지.’
『네가 먹어도 되는 맛으로 만들면 돼.』
『그 초콜릿이란 것의 맛이 궁금한데.』
진혁은 갈등에 휩싸였다.
아직 이빨도 나지 않았는데 초콜릿 맛을 보게 해도 좋을까?
‘이 녀석 자제할 수 있나?’
그때 책이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가르치는 것들을 열심히 배울 테니까 허공섭물을 가르쳐 줘.』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보여줬잖아.』
남궁소천은 할 말이 많았다.
보여준 것과 가르쳐주는 것은 다르다.
그는 제자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줄 때 한 번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여러 차례 보여주고, 그래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느리게 보여주었다.
그 후 제자들이 따라 하면 다시 팔의 각도와 힘을 주는 방향을 고치도록 말로 하고, 그래도 따라 하지 못하면 직접 몸에 손을 대서 고쳐준다.
어느 정도 동작이 익으면 대련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초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장남의 동공이 흔들리자 진혁이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가르쳐 줘? 그냥 띄우면 되잖아.』
진혁은 아득한 옛날, 전투를 할 때 남궁소천이 이기어검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용하던 장검을 날리며 허공에서 기묘하게 방향을 조작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기어검은 쓸 줄 아는데, 허공섭물은 쓰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설마 허공섭물 쓸 줄 몰라?』
남궁소천은 치욕에 몸을 떨었다.
『설마라니! 허공섭물 같은 고도의 절기를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당금 무림에 얼마나……!』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그것도 못 쓰면 반죽할 때 힘들 텐데. 지금 손이 너무 작아서 손으로 반죽하면 많이 못 만들어.』
『…….』
남궁소천은 생각했다.
‘이 자식의 머릿속에는 빵만 들이차 있나?’
* * *
진혁은 장남을 들어다 조그마한 미니주방 앞에 앉혔다.
『이건 뭐지?』
성인용 주방 옆에 설치된 작은 미니 주방은 미미가 특별히 설계해준 것이었다. 5~6살 정도의 아이가 사용할 수 있는 조그마한 오븐과 인덕션 그리고 냉장고까지.
소꿉놀이용 세트처럼 보였지만 전부 실제로 작동하는 전자제품들이었다.
『그럴 때는 “이건 뭐지?”라고 하는 거야.』
진혁은 미미의 조언을 듣고서 아이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로 했다.
보육교사들은 하루 3교대를 하면서 한 팀은 한국어, 한 팀은 중국어, 한 팀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진혁은 아이들이 한국말을 빨리 깨치기를 바랐다.
‘그래야 할아버지 할머니랑 얘기도 하지.’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한국어와 제과제빵을 동시에 가르칠 생각이었다. 남궁소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허공섭물부터 가르쳐 준다며.』
『“실습을 하다 보면 잘 알게 될거야.”』
진혁은 한국어로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해 주었다. 장남이 미간을 찡그렸다.
『외국어 공부 시간은 따로 있어.』
준비물은 모두 미니 주방 위에 나와 있었다.
프랑스산 박력분과 실온에서 녹인 무염 버터. 그리고 냉장고에서 한참 전에 꺼내 둔 달걀 하나. 베이킹파우더 약간과 설탕, 그리고 소금까지.
아주 기본적인 쿠키를 만들 계획이었다.
『먼저 무염 버터를 부드럽게 풀어 줘야 해.』
진혁이 실리콘 주걱을 건넸다. 하지만 장남에게 실리콘 주걱은 너무 컸다.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이것도 다시 만들어야 했는데.’
장남은 실리콘 주걱을 거절하고 무염 버터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저으면 되지.』
조그만 손으로 반죽을 조물거리는데 진혁이 뒤에서 양손을 등에 대 주었다.
『이제 버터 반죽에 설탕을 녹이자.』
진혁은 장남의 등에 진기를 주입했다. 차량 없는 8차선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임독양맥과 전신의 경맥에 기를 주입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
장남이 신음을 내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진혁은 장남의 손끝에서 미미한 양의 진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고서 손을 뗐다.
『됐다. 버터가 녹았지? 이제 설탕을 녹이면 돼.』
『…….』
환생하고 나서 처음으로 받은 추궁과혈.
그것은 버터를 녹이기 위해서였다.
‘엄청난 실력이다. 그리고 진기가 탁하지 않아.’
남궁소천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분명히 마공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진혁이 주입하는 진기는 마치 곤륜파 같은 도가(道家)의 것처럼 맑고 깨끗했다.
‘어찌 된 일이지?’
달걀 물과 버터 설탕 반죽을 섞을 때도, 가루를 체에 칠 때도 진혁은 계속해서 추궁과혈을 해 주었다. 전신의 세맥까지 전부 용솟음치는 활기에 남궁소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궁가의 장로 열다섯 명이 함께 추궁과혈을 했을 때에도 이만큼 잘하지는 못했어.’
만들어진 반죽을 휴지시키고 밀대로 반죽을 밀어 쿠키 틀로 만들 무렵에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오늘 하루 이 쿠키 만들기라는 걸 하면서 거의 반 갑자에 달하는 공력이 증진됐어.’
별과 꽃, 그리고 사람 모양의 쿠키가 오븐에서 달구어지고 있었다.
말랑말랑하던 노란색 반죽이 완벽하게 구워져 보기 좋은 갈색으로 변했다.
남궁소천은 따끈따끈한 쿠키를 손에 들고서 향을 맡아보았다.
냄새가 무척 좋았다.
『어때, 아버지와 함께 쿠키를 만드니 좋지?』
진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남궁소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을지도.』
* * *
그날 저녁.
오랜만에 부모님이 진혁을 방문했다.
“잘 지냈냐?”
“물론이죠.”
진혁은 뿌듯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쿠키를 내밀었다.
“아버지, 이번에 손자가 처음으로 만든 쿠키입니다.”
“그래?”
아버지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맏손자를 안아 들었다. 한 살짜리 아이가 쿠키를 만들었을 리는 없고 반죽에 틀을 찍는 정도를 도왔으리라.
“생 반죽이라도 입으로 가져가면 어쩌려고. 반죽을 돕게 했어?”
“굽기까지 같이 했습니다.”
아버지가 막 들어 올리던 쿠키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머니가 놀라 입을 가렸다. 아버지가 진혁을 야단쳤다.
“야, 이 자식아! 위험하게 그게 무슨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