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4화
외전 8화
진혁의 말은 허공에 맥없이 떠돌았다.
그 말을 들어야 할 자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었다.
설령 들었어도 남궁소천이 이해하는 한국어는 ‘기저귀’ ‘밥 먹자’ ‘아빠, 엄마’ 등 보육교사들이 사용했던 말 일부뿐이었으니 어차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공격의 강도를 일관되게 하면 상대가 읽기 쉬워. 이 자는 요리하는 행위를 공격으로 간주해서 빵이란 음식을 만들어 온 거야. 상대를 자극하고 그 반응을 얻어낸다는 행위의 본질을 꿰뚫어 본 거지…….’
만류귀종이라,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그러나 남궁소천에게 있어서 식(食)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학과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오로지 무공을 수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남궁가의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형편없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하인들이나 먹을 하찮은 음식들이었지만, 참고 억지로 씹어 삼켰다.
자신은 정당한 후계자의 지위를 빼앗기고 홀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악물고 수련에 매진했다.
당시 그가 눈여겨보던 세가의 삼류 무사가 있었다.
방계의 남궁찬이란 자였는데 갖고 있는 재능이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성취가 낮았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삼류 무사들도 성취가 극히 낮아, 삼류에서 이류로 올라가지 못했다.
소천이 열다섯 살의 나이에 일류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는 천재라 불렸다.
하지만 남궁찬은 스무 살의 나이에도 삼류였고, 결국 무사의 지위에서 해임되고 마당 청소를 맡게 되었다.
‘무능한 자들에게 어울리는 자리야.’
당시 남궁소천은 세가의 삼류 무사들의 성취가 낮은 이유는 수련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물이 넘어 실제로 무사수행을 나갔을 때 남궁소천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닭 한 마리도 큰 재산이었어. 암탉은 달걀을 낳으니까. 달걀도 두어 달에 한 개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후계자의 수련을 핑계로 돈 한 푼 없이 쫓겨난 남궁소천은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끼니마다 올라오던 고기 반찬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가 저급하다고 생각했던 음식들도 민초에게는 한없이 귀한 것이었다.
소면 한 그릇을 구하기 위해서 기나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는 어렵게 물고기를 잡아다가 팔아보았다. 하지만 흥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제값을 받지도 못했다.
수행을 나온지 사흘 만에 옷은 순식간에 걸레가 되었다. 본가의 하인들이 하던 빨래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데 직접 하니까 구멍이 날 뿐이었다.
물고기를 팔아 만든 돈으로 살 수 있는 옷은 기껏해야 거적때기 같은 것밖에 없었다.
삼류 무사였던, 성만 남궁가였던 찬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남궁가의 기초수련에 걸맞는 목검을 마련해야 하면서 동시에 무공 수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했을 터다.
대 남궁세가의 하급 무사라면 매일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하급 무사들은 자기 빨래만이 아니라 상급 무사들의 빨래도 맡아서 했다. 잡일을 하느라 실제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한두 시진밖에 되지 않았다.
남궁소천은 그제서야 가내 하급무사들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재능이 있어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받고 있던 대우는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남궁가의 직계에게 하는 대우는 다른 하급무사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단지 후계자의 것이 아닐 뿐이었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남궁가의 장손으로서 후계자로 인정을 받아야 해.’
힘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파의 젊은이들이 참가하는 무술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그때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마교의 소교주, 암천대의 대장.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후에는 ‘천마’라고만 불린 자.
그자와는 우연히 만났다. 아니, 그자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을 구해주었다.
처음에는 그 정체를 몰랐다. 그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과 닭을 굽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싸구려 옷이 상하지 않게 빨래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파의 후기지수인 줄만 알았다. 고생을 많이 해서 조금 특이한 데가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자는 어렵지 않게 예선을 통과하고 무술대회에서 쭉쭉 이겨나갔다.
처음에는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그자와 맞상대하고 무승부가 된 이후에는 응원할 수가 없었다.
생사결이었다면 남궁소천이 졌을 것이다.
정파의 후기지수였다면 정파의 미래가 밝다며 껄껄 웃고서 술잔을 교환했으리라.
하지만 그자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일월신교가 천하를 오시하리라는 광오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정파의 최고수들이 추격했지만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정파는 완전히 망신당했고 대회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변태. 사람을 속이는 것을 즐기는 거짓말쟁이.’
남궁소천은 그때부터 일월신교 소교주의 라이벌이라 불렸다.
하지만 소천은 자신이 그놈의 실력에 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놈이 봐준 것이다. 소교주 놈의 무공 실력은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이 더 기분 나빴다.
‘내 목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남궁소천은 약관의 나이에 청년 무림대회에서 우승하고 남궁가의 후계로 재차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자의 목표는 정파를 도발하고 마교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었다.
아예 보고 있는 곳 자체가 달랐다.
그렇다면 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 주었는가?
비늘을 떠내고 내장을 손질해서 비린 맛 없이 구워 먹을 수 있도록 왜 자신을 도왔는가?!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곳에서 배신당했고, 그 역시 마교의 일원이라 오해받아 한참 동안 감시를 받았다.
남궁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도 고초를 겪었다.
그는 대회의 우승자이자 소교주와 용호상박을 이루었던 정파의 미래로 인정받아 세가로 금의환향했고, 삼류무사들의 대우를 개선했다.
완벽하게 남궁세가를 장악할 수 있는 첫발이었다.
직계의 혈족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단순히 명분일 뿐이며 명분은 밥을 먹여주지 않고 하급무사들에게는 수련시간이 필요하다.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해준 외유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힘들게 키워낸 가문을 두고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환생했을 때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그리고 기뻤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후회를 되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시천존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이리라.
하지만 아버지라는 작자의 면상을 확인하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곳은 기회의 장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그런 배신자 새끼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니!
‘그래서 아버지를 자칭하는 자라고 불렀지. 하지만 이 자가 나에게 바란 것은 그저 아버지라고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영은 나의 것이어도 육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남궁세가의 후계자와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 억지로 가장을 했다고 생각했다.
본성부터 악독한 놈이 의도적으로 속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갓난아이의 몸으로 일 년여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남궁소천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하고 축기하는 것 외에는 다른 할 일도 없었다.
지금 거리를 두고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연구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한 기술들이었다.
‘밀가루와 인간의 몸은 달라. 이것은 철저하게 빵을 굽기 위한 수련이다. 인간에게 적용하기에는 과도하게 온도가 높아.’
방금 전까지는 자신의 시야가 너무나도 좁았다.
자신에게 남궁세가가 중요한 만큼 이자에게도 일월신교가 중요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자신을 견제하고 협박하고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더 이상 남궁세가도, 일월신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혈와수의 기억을 그렇게 날려버릴 리가 없다.
‘세력의 확장을 꾀하려면 일월신교를 신봉하는 혈와수를 계속 데리고 갔을 거야. 그런데 그 기억을 날렸다는 건 이미…….’
이 임진혁이란 자는 일월신교의 소교주도, 교주도 아니었다.
평범한 세상에서 아름답고 부유한 여인과 가정을 이루었다.
남궁소천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했던 세상과 가문에는 미련 한 조각도 없어 보였다.
천하의 진리라 외치던 일월신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삶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거야…….’
허공섭물로 달걀을 깨고 밀가루를 반죽해 삼매진화로 익히는 과정.
그것들은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 대강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연습하고 다시 고치고 적용해온 결과물이었다.
검술로 사람 썰던 놈에게 식칼을 쥐여준다고 사과를 잘 깎지는 못한다.
처음 거리에 홀로 돌아다니던 남궁소천도 비도로 과일 껍질을 깎으려다가 멀쩡한 살을 뭉텅이로 잘라내곤 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처음 칼을 잡은 것보다야 빨리 익히긴 한다. 하지만 수련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빵 만들기에 진심인 거야.’
임진혁은 이 세상에서 무공이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지만,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무공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남궁소천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저건.’
그는 꾸준히 임진혁을 봐왔다.
자신을 돌보는 모습만이 아니라 배우자를 대하는 모습도 보았다.
임진혁은 하루도 빠짐없이 치즈 케이크를 구워서 황미미에게 가져다주었다.
황미미는 웃으면서 이제 괜찮다고 몇 번인가 말했다.
그렇지만 진혁은 새벽마다 같은 시간에 다양한 맛의 치즈 케이크를 구웠다.
‘처음에는 그냥 보여주기식이라고 생각했지만.’
매일 모두 다른 치즈케이크였다고 들었다.
남궁소천이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구운 적은 없으나 매일 모든 다른 치즈케이크였다고 진혁이 자랑했다.
그리고 지금 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재차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임진혁이라는 자는 더이상 마교의 교주라고 할 수 없어.’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일컬어지던 일월신교의 16대 교주는 여기에 없다.
임진혁이라는 자는 평화에 물들어 있었다.
당장 조금 전에 한 말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브라우니 케이크만 주면 안 돼. 달고 진한 초콜릿은 맛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혀가 금방 피곤해져. 그래서 곁들여 먹을 바닐라 케이크도 지금 구워야 해. 검술을 할 때도 강강강 일변도로 가면 오히려 피하기 쉬워지잖아? 강과 유를 섞어야 하지 않아?”
검술의 강유를 먼저 이야기하고 먹을거리를 예로 들었어야 당연하다.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먼저 말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임진혁은 빵을 먹는 사람이 맛을 어떻게 느낄지, 자극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를 더 강조했다.
눈앞에 있는 이 자는 한때 천마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깨달음이 남궁소천의 마음을 열게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벽을 넘도록 도왔다.
‘대회장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는 진짜로 죽이고 싶었는데.’
사실은 믿고 싶었다.
친구로 대해주길 원했다.
검격을 교환하면서.
일월신교의 소교주만 아니었다면 쫓아가서 친하게 지내자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친해질 수 있을지 모르지.’
혈연(血緣).
같은 핏줄로 이어져 있는 지금은 굳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남궁소천은 이전의 삶에 가졌던 미련을 훌훌 털어내었다.
그는 소탈하게 말했다.
『잘 부탁한다, 아버지.』
기저귀와 요람에는 찌꺼기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진혁은 장남을 안아 올려 깨끗한 물로 씻겨주었다.
동시에 더러워진 기저귀와 옷은 그대로 태워버렸다.
진혁이 말했다.
『……지금 그 나이에 환골탈태를 하다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십 대 전에 현경에 오를 수도 있겠군. 그러면 늦어도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는 오븐 없이 빵을 구울 수 있겠어.』
하지만 그 무공광 새끼는 지금은 제빵에 미쳤는지 제빵 기술을 기준으로 무공을 논하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부른 건 취소하겠다. 넌 아버지 자격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