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613화 (613/656)

제 613화

외전 7화

계속해서 불만을 표현하면서 온갖 불평을 늘어놓던 장남이 고분고분해졌다.

심후한 내공을 통해 실현하는 예술! 케이크 굽기의 아름다움을 뼛속까지 느낀 모양이었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거야.’

진혁은 즐거워졌다.

미미는 이 제과제빵 과정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술 같은 결과에 놀라워할 뿐이었다.

진혁이 달성한 무학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정공의 초보 단계에 입문한 미미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책이 녀석은 이해할 수 있지.’

진혁은 아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했다.

경외감과 존경심.

그리고 향상심을 느끼고 있으리라.

‘내가 너무 멋있겠지? 케이크 굽기를 꼭 꼭 배우고 싶겠지?’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하는 심법 수련.

정신력을 뒤받쳐주는 기본 체력.

실제로 몸에 익힌 보법과 검법을 사용해 경험하는 실전.

한 명의 무림 고수가 탄생하려면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검제 남궁소천은 그 모든 것을 갖춘 자.

‘어떻게 보면 아주 잘된 일이지.’

지금 세상에 정파와 사파, 일월신교의 구분 따위는 무의미하다.

‘애초부터 일월신교는 도량이 넓으니 정파의 애송이들도 전부 바다처럼 너른 마음으로 포용해줄 수가 있어.’

광안마도 혈도객도 정파 출신이었지만 훌륭하게 적응해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아들도 좋아해 준다. 보람차기 그지없다.

드디어 아들에게 이해를 받았다는 기쁨에 진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라고 불러 줘.』

그는 이전부터 원하던 것을 요구했다. 장남이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사과가 아니라 배였다.

통통하고 물기 많은 과일들이 중력을 거스르고 부유한다.

껍질이 사르륵 벗겨져 나가고 얇게 썰린다.

물기 어린 촉촉한 과일 조각들은 바로 말라가기 시작했다.

남궁소천은 마교의 근거지를 탐색하기 위해 젊은 시절 신장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생애 처음으로 사막을 보았다.

비단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이용하는 길목이 있을 뿐, 모래밖에 없는 곳이었다.

실수로 귀한 물을 바닥에 흘리면 뜨거운 햇볕 때문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지금 이곳은 습도와 온도가 철저하게 조정된 안전한 주방이다.

하지만 뜨거운 사막에라도 놓인 것처럼 바싹바싹 말라가는 배 조각을 보면서 남궁소천의 입술도 바싹 말라갔다. 목도 탔다.

‘아버지라니.’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남궁소천은 남궁가의 아버지를 기억했다. 아버지 남궁효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심법과 검법을 전수해주었다. 본인의 무학적 재능은 뛰어나지 못했다. 고작해야 일류였다.

하지만 가르치는 기술이 뛰어나 아버지가 가르친 창궁대원들은 전부 일류의 경지를 초월했다.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남궁가의 직계보다 더 강해진 부하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돌발 행동을 했다.

결국, 창궁대 자체가 사파의 함정에 빠져 괴멸했고 아버지는 말을 듣지 않았던 부대장을 구출하러 갔다가 죽었다.

남궁소천이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선량하며 정의롭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어린 시절 기초를 닦아주었기에 지금의 남궁소천이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

장남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차남인 삼촌이 직계 후계자가 되면서 남궁소천은 견제를 받았다. 당장 음식부터 형편없어지고 대우도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실력을 인정받아 후계자의 자리를 다시 찾은 것은 스물이 넘어서였다. 한창 예민하고 섬세할 청소년기에 가문 내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면서 다져진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일월신교의 교주는 정파의 가장 큰 적이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에 저항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버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남궁소천의 눈동자에 촉촉하게 눈물이 영글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눈앞이 흐리다.

하지만 흐려진 시야에도 사과 조각에 이어 배까지 절단되고 구워져 바스러지기 직전까지 가는 모습이 보였다.

곱게 잘리고 건조된 사과와 배 조각을 장남에게 보여주며 진혁이 웃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심취해 장남의 반응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봐, 이제 여기에 꿀을 바를 거야.』

바삭바삭하게 건조한 과일에는 씹는 맛이 있다. 하지만 당도는 떨어져 과일 고유의 단맛은 사라진다.

아예 따로 간식거리로 내놓는다면 모를까, 진하고 촉촉한 초콜릿 브라우니와 함께 내놓는다면 신문지 같은 맛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혁은 꿀을 꺼냈다.

『사과에는 사과 꿀을 바르고, 배에는 메이플 시럽을 바를 거야. 메이플 시럽이라는 건 단풍나무의 진액을 달게 가공한 건데…….』

이 캐나다산 메이플 시럽을 쓰는 이유는 일부러 무하마드 왕자라는 사람의 입맛에 맞춘 것이란 설명이었다.

하지만 남궁소천은 설명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사과 꿀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보거나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상처를 절단하고 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죄를 저지른 이에게 꿀을 발라 내다 버린다.

그러면 어디선가 벌레들이 나타나 꿀을 핥아 먹으며 살결을 파고들어 간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형벌이다.

남궁소천이 있었던 남궁가에서는 고문으로라도 시행하지 않는다.

『아버……지.』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한 번 말하니 두 번 말하는 것은 쉬웠다.

『아버지.』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더 이상 이 자의 적이 아닌 아들이니 말이다. 훌륭한 후계자가 되어주고 남궁가를 재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오래 살 수도 있지 않은가. 남궁소천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진혁이 웃었다.

“음, 이제는 한국말로도 해 보자.”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한 장남이 눈알을 굴렸다.

『?』

『‘아빠~’ 라고 해 봐.』

이 ‘아빠’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강요와 폭압에 의해서 억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상황이다. 남궁소천은 부들부들 떨면서 외국어를 따라 했다.

“압바.”

모국어로 들으니 더 좋았다. 한 살짜리 아기가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을 놓친 진혁은 그저 뿌듯할 뿐이었다.

‘다른 집 애들은 한 살이면 충분히 엄마, 아빠를 한다던데.’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장남은 엄마 아빠는커녕 ‘이 마도의 주구야!’라고만 했다.

둘째는 ‘주군!’을 외치다가 이제는 완전히 지능이 리셋됐는지 옹알이만 하면서 장남을 따라서 무공을 익히고 있다.

‘자식 많이 쑥스러운가 보군.’

남궁소천은 임진혁과 나이가 비슷한 라이벌이었다.

아빠라고 하는 것이 쑥스러울 법도 하다. 하지만 아빠라고 불리니까 좋긴 좋았다.

‘이런 맛에 육아를 하는구나.’

장남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역시 미미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 진혁은 흐뭇해하며 요리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제 오븐을 예열할 거야. 이 오븐이란 기계는 열선이 들어있는 틀인데 삼매진화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면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려면 오븐을 사용한 척해야 해.』

진혁이 오른손을 과장되게 뻗었다. 사실은 손짓을 하지 않아도 열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들 앞에서 동작이 커 보이게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오븐 안에 오행진까지 설치했다는 걸 알면 나중에 기겁하겠지.’

하지만 그건 지금 단계에서 알려줄 것은 아니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오븐을 180도에서 예열했지? 그러면 9인치(23센티미터) 스퀘어 팬에 재료를 넣자고.』

예열이란 본디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이렇게 1초 만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오븐의 예열 기능 따위에 대해서 모르는 장남은 그런가 보다 하고 눈을 끔벅였다.

진혁이 선택한 첫 번째 재료는 무염 버터였다.

『이 노랗고 부드러운 것. 이게 버터야. 먹어 볼래?』

평소 진혁이 사용하는 버터도 좋은 것이었다. 경기도의 방사 목장에서 아침마다 갓 만든 것을 배달한다.

진혁은 자그마한 버터 덩어리를 조각내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었다.

“!”

부드러운 감각에 장남이 혀를 굴렸다. 보들보들하고 고소한데 입안에서 확 녹아내린다.

『……이게 버터의 맛.』

“꺄르륵.”

둘째는 즐거운지 신나 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보통 쓰는 버터가 아니야. 고객의 입맛을 맞추려고 특별히 가져온 거지.』

오늘 사용하는 버터는 알프스 산이었다. 스위스의 목장에서 풀어 키운 소에서 짠 우유로 만든 신선한 버터다.

예민하고 섬세한 무하마드 왕자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 오늘 새벽에 비행기로 공수해 온 것이었다.

‘쓸데없이 미각 훈련 따위를 시켰나.’

평소 먹던 버터와 다르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음식 재료를 따로 구했다. 페드로는 왕자의 궁전 주방에서 사용하는 재료 목록을 알려 주고 구입처도 소개해 주었다.

에티오피아 산 다크 초콜릿과 칠레산 커피, 그리고 프랑스산 고운 설탕과 역시 프랑스에서 수입해온 밀가루.

이전에 장기간 왕자의 궁전에 머물며 요리사들의 훈련을 써봤을 때 사용했던 식자재들이라 익숙하다.

달걀만은 일봉이네 농장에서 풀어 키운 닭이 아침에 낳아준 유정란을 썼다. 시중에는 동물복지 방사 유정란이라 하여 비싸게 팔리고 있는 달걀들이다.

진혁이 오른손을 내저었다.

-휘리릭

결 고운 설탕이 싸락눈처럼 알알이 흩날리며 달걀과 함께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설탕과 달걀이 충분히 섞이고 난 후에는 회오리처럼 허공에 기둥이 섰다. 연한 상앗빛 기둥에 하얀 밀가루가 폴폴 날리며 반갑게 뛰어들었다.

『오늘 고객은 초콜릿을 정말로 좋아하거든. 그래서 아주 진하고 촉촉한 초콜릿 브라우니를 만들어 줄 거야.』

아버지라고 불려 기분이 좋아진 진혁은 신이 나서 평소 잘 하지도 않던 설명을 늘어놓았다.

끝 맛으로 새콤달콤한 과일 향이 나는 것이 특징인 에티오피아 산 다크 초콜릿.

덩어리 형태로 되어있는 묵직한 형태가 사막의 모래처럼 순식간에 바스러지더니 바로 솟아올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소용돌이에 합류한다. 연한 병아리 깃털 색깔이었던 반죽은 초콜릿 가루가 들어오면서 점차 진한 커피색으로 물들어갔다.

아까 만들었던 것은 곁들임으로 올릴 케이크 반죽.

이번에 만드는 것이 진짜 브라우니 반죽이다.

쫄깃해 보이는 반죽 덩어리가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완성된 브라우니 반죽을 허공에 띄워놓고 진혁이 말을 이었다.

『브라우니 케이크만 주면 안 돼. 달고 진한 초콜릿은 맛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혀가 금방 피곤해져. 그래서 곁들여 먹을 바닐라 케이크도 지금 구워야 해. 검술을 할 때도 강강강 일변도로 가면 오히려 피하기 쉬워지잖아? 강과 유를 섞어야 하지 않아?』

강(强)과 유(流).

무가에서는 기본이 되는 이야기다.

『강과 유…….』

장남의 동공이 커졌다.

‘단순한 요리 놀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곳에도 진리가 있구나!’

그가 짧은 다리로 가부좌를 하려 했다. 하지만 다리는 접을 수 없었고 O 모양으로 양다리를 붙여 앉는 것이 한계였다. 아이의 머리 위에 조그마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잠깐만. 야. 왜. 아니 이게 왜?”

당황한 진혁이 한국어로 물었다.

“이게 왜 깨달을 일인데……? 기본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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