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2화
외전 6화
“외국어만이 아니라 경제 교육도 같이 할 수 있겠어요.”
미미는 아주 기뻐 보였다. 진혁은 순간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많이 어린데 꼭 그런 교육을 해야 합니까?”
그에게 있어서 황 그룹의 후계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고아 수백, 수천 명을 그룹의 이름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니 그중에서 능력이 좋은 아이를 선발해 후계로 삼으면 될 일이다.
“어리다니요? 방금 성인과 같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일월신교에서도 교주의 혈족이 교주의 자리를 승계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개는 교주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자가 교주의 자리에 올랐다. 적자생존과 강자존. 지극히 당연한 율법이다.
왕정은 이미 한물간 유행이고 각 국가에서 대통령을 투표로 선발하는 시대다.
왜 혈연에 집착하는가.
‘우리 일월신교가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합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 와서 반발하기에는 진혁의 입장이 애매했다. 황 그룹의 재력과 권력을 손녀사위라는 이름으로 전부 물려받은 것이 진혁 자신이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게 정말로 외국어와 경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까?”
진혁이 절실하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첫째에게 필요한 것은 상식이었다. 외국어와 경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미미가 손가락을 꼽았다.
“한국어와 중국어는 당연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해야겠죠? 아랍의 VIP와 대화를 나누려면 아랍어도 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일본에서도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미미가 늘어놓는 외국어의 개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진혁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황하지 않았습니까?”
“뭐가요?”
“우리 아이가 성인이라는 것에요.”
“언젠가는 성인이 될 텐데요.”
“그게 아니잖습니까.”
미미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의 노트를 봤어요.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났을 때,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걸요.”
“……그렇습니다.”
현대에서 생활한 적이 있던 임진혁도 처음에는 좌충우돌했다. 실수를 계속해서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이 도와줘야 했다.
당장 동세대였는데 해외에서 자란 마리오와 루이스만 보아도 문화의 차이가 얼마나 개인의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미미가 말했다.
“저는 어렸을 때 영국의 자립형 사립 기숙학교에 다녔어요. 저 빼고는 전부 백인 애들이라 칭챙총이라고 놀림을 받았지요. 몇 년 다니다가 할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중국의 소학교에 전학을 왔는데 피부색만 같지 말이 안 통하더라고요.”
진혁은 미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한국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에 다니고 군대도 다녀오고 하지요. 평균적인 삶의 모양이 있어요. 미국에서는 훨씬 빠른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지요. 중국에서는 민족마다 다르고요. 저도 한족 중에서는 혼기가 늦은 편이었어요.”
미미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창문에서 햇빛이 비쳐 들어와 홍차를 맑게 비추었다.
일월신교.
태양과 달의 섭리를 모시는 종교.
진혁은 창문으로 들어온 한줄기 햇빛에 깨달음을 얻었다.
‘미미 씨는 지금 단순히 후계자를 기르기 위해서 언어 공부를 제안한 것이 아니구나.’
언어는 곧 문화다.
에스키모들의 언어에는 눈에 대한 단어가 많다. 흩날리는 눈발과 싸락눈과 굵은 눈에 대한 단어가 전부 따로 있다. 반면에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지방의 언어에는 눈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면 세계의 다른 점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방구석에서 이미 멸문한 가문을 살려야 한다는 맹목적인 아집에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진혁은 미미의 현명함에 놀랐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책이는 단 하나의 문화밖에 경험하지 못했죠. 어린 시절에 다른 문화를 여럿 접한다면 시야가 넓어질 거예요. 이미 성인의 삶을 경험했다면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사회 전반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도 도움이 될 테고요.”
영명한 아이에게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 교육을 시행하고 싶은 것도 미미의 본심이었다. 어떤 매체에 얼마만큼 노출되는지 부모가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이 시점에 최대한 많은 교육을 시행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황 그룹의 미래 역시 황미미에게는 중요했다.
그리고 진혁은 미미의 달변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저는 책이 앞에서 케이크 굽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인데…….”
무학을 어떻게 제과제빵에 적용할 수 있는지 진혁이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낸 지식.
유일봉이나 임진희, 마리오 강 등의 페이스트리 쉐프에게는 알려 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가 없었다. 자식이 아니라 생판 남이라도 무학의 기초를 아는 자가 있었다면 가르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치즈 케이크를 통해 얻은 깨달음부터 무공을 통해 물질의 성질을 변형시켜 만들어내는 물엿까지 전부 꾸준한 수련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평화에 젖어있는 이 세계에서는 내가 끌어줘서 무공을 수련해 보았자 닿을 수 있는 경지에 한계가 있어.’
진혁이 정성을 다해 가르친 아내와 부모 그리고 남매. 그들은 태극권의 입문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자신이 강제로 환골탈태를 시켰는데도 그렇다.
그들에게는 각자 생업이 있었고 삶의 목표가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 것이 최우선이 아닌 건 당연하며 꼭 매일 하라고 했는데도 수련을 빼먹는 날도 있었다.
진혁에게 1:1의 가르침을 받고자 금은보화와 영약을 싸 들고 와서 바치고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교인들처럼 굴 필요는 없다.
그래도 수련을 진혁이 가르쳐 주는 건강 체조 정도로 취급하는 건 좀 뼈아팠다.
어찌 보면 남궁소천, 책이 녀석이야말로 광안마가 없는 지금 유일하게 서로에 대한 이해자일 수밖에 없겠다.
“할아버지도 자신을 이해할 사람은 세계에 아무도 없다고 여기셨을 거예요. 하지만 진혁 씨를 만나고 행복해하셨지요. 책이에게도 당신이 있고 내가 있으니 부족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미미가 웃었다. 그녀는 진혁에게도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용정차에요.”
이 용정차도 자신이 이전에 마셔봤던 용정차와 맛이 다르다.
고대의 맛을 이어온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이어받지 못했다.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니 구별해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찻잎을 따는 사람도, 말리는 방식도 다르니 맛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찻잎을 생산해내는 산지의 환경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이 용정차도 맛이 다릅니다. 많은 것이 변했죠.”
진혁이 생각에 잠겼다. 미미가 입을 열었다.
“케이크를 굽는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도 좋아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니까요.”
* * *
『그래서 지금부터 그 케이크라는 걸 굽는다고.』
요람에 기대앉은 장남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반죽부터 구울 거야. 오늘은 호두를 넣은 브라우니를 구울 건데.』
호두를 넣은 브라우니.
무하마드 왕자가 초콜릿 케이크를 원한다고 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메뉴였다. 최고급 호두가 껍질째 80개 놓여있고 그 곁에는 아몬드와 피스타치오, 땅콩과 브라질너트 등 다양한 종류의 견과류가 있었다.
진혁은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주방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껐다. 영상촬영이 중단되자마자 호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섭물.
-파아아앗
호두의 껍질이 파사삭 부서진다.
지켜보고 있던 장남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마두의 실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나구나.’
남궁소천도 남궁가의 가주이자 검제라 불렸던 남자다
그 역시 허공섭물을 사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고작해야 술자리에서 허공섭물을 사용해 술병의 술을 따르고 얼음 덩어리를 술잔에 넣을 수 있는 정도다. 이런 식으로 80개나 되는 호두를 껍질만 파쇄하지는 못했다.
‘전성기 때의 나라면 호두 열 개 정도는 부숴 버릴 순 있겠어.’
하지만 내용물에 손상에 가지 않게 하는 것은 무리다. 마교주의 솜씨가 지나치게 뛰어났다.
장남이 바라보는 동안, 껍질까지 벗겨진 호두는 투명한 유리그릇에 안착했고 잔해들은 깔끔하게 모여 쓰레기통으로 흘러갔다.
‘무시무시한 실력이다. 내게 실력을 보여 주어 굴복시키려는 건가.’
이 몸이 자신의 혈육이니 고문은 하지 못하리라.
마교의 육체적인 고문은 눈앞에서 친부를 고발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그렇다면 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인 고문밖에 없다.
‘나는 무림맹의 맹주이자 남궁의 기상. 마교의 주구에게 굴하지 않는다. 아니, 굴할 수 없다!’
남궁소천은 조그마한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에서는 마술이라고도 할 만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둘째는 허공에서 달걀이 깨지고 흰자와 노른자가 분리되며 밀가루와 합쳐지고 바닐라빈이 분쇄되어 섞이는 것을 보며 신나했다.
『꺄르륵.』
언뜻 보면 어린아이를 위한 마술 공연 같기도 했다. 허공에 날아다니는 저 재료들 중 아무것도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연결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과들이 덩실덩실 허공을 부유하다가 보이지 않는 진기에 그대로 깎이고 얇게 썰렸다. 종잇장처럼 얇게 썰린 것이 대략 이백여 장에 달한다.
그 사과들이 화르륵 달구어져서 순식간에 수분을 잃고 바싹 말랐다.
차남이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는데 장남은 말을 잃었다.
은사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닌데 허공에서 사과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허공섭물과 이 정체불명의 절단술을 동시에 쓸 수 있다는 것만도 대단한데 거기에 삼매진화까지 사용한다.
삼십 년, 사십 년을 더 수련한다고 해도 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사과들이 무림맹의 청년들이었다면.’
단단한 사과를 무리 없이 가를 정도라면 인간의 피부는 물처럼 느껴지리라. 인간에게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선봉에 서 있는 맹도들의 안구를 파괴하여 시력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어. 거기에 삼매진화까지.’
호두의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드러내는 기술에서는 세심한 조정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과를 다듬는 모습에서는 한없는 악의를 느꼈다.
‘절단기술만으로도 충분히 악독한데 거기에 불까지 지져 회복을 막아. 생사신의가 치료해도 살릴 수가 없겠어.’
임진혁의 경지는 남궁소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고 심계는 더욱 악독했다. 말을 잃은 장남에게 진혁이 말린 사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사과는 얇게 썰어서 삼매진화로 달구는 거야. 이렇게 하면 건조하면서 무쇠 냄새가 배질 않아서 좋지. 이런 걸 크리스피 애플이나 드라이 애플 피스라고 하는데 그냥 말린 사과 조각이라는 뜻이야.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디저트 강국은 아니다 보니 이런 용어는 영어를 쓰는 경우가 많지.』
무공을 써서 케이크를 만들기는 진혁에게 있어서 숨겨야만 하는 기술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지금 아들들에게 처음 보여주는 것이다.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도 책이는 무공을 좀 아니까 보면 좋아하겠지?’
진혁은 신이 나서 장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큰아들이 나라 잃은 눈빛을 하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든지 하겠다.』
『응?』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