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610화 (610/656)

제 610화

외전 4화

“주문서.”

무하마드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진혁과 한 구두 약속이 계약으로서의 효력을 발휘하리라고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는 황급히 영어 문서를 읽었다.

“아니, 아니. 나는 대면 주문을 하겠네!”

진혁이 물끄러미 무하마드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

어려운 명제다.

세상에서 제일, 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맛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하마드에게 제일 맛있는 케이크와 진혁에게 제일 맛있는 케이크는 다르다.

“무하마드 왕자 전하가 어린 시절에 드셨던 요리들…… 제가 아랍 요리를 좀 먹어봐야겠습니다.”

“음?”

“어린 시절의 입맛이 나중에 영향을 끼칩니다.”

“난 어린 시절엔 별로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도 먹었던 음식들이 있을 겁니다.”

“알았어, 내가 생각해 보지.”

갑자기 ‘천마’ 드라마의 OST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현악기의 슬픈 소리가 울리자 무하마드가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임진혁은 태연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잠시 전화를 받겠습니다.”

“자네 전화가 기본 벨소리가 아니라 음악으로 바뀐 건 처음 보는데? 정말로 많이 변했군.”

“기본이죠.”

진혁은 복도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클라이언트와 상담 중입니다만.”

“육아 파트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육교사 한 분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이들은 멀쩡합니까?”

진혁은 저택을 나와 바로 옆집으로 걸어갔다.

담을 따라 걷는 와중 3층 육아실의 창문이 보였다.

투명한 유리 창문이 박살 나 있었고, 정원 바닥에는 유리 파편이 떨어져 있었다.

저 멀리서는 119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진혁을 배웅을 하기 위해 따라오던 무하마드 왕자가 멈칫했다.

“저거 큰일 난 거 아닌가?”

왕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페드로가 쩔쩔매며 말했다.

“진혁 쉐프님.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진혁은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그가 현관문으로 들어서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무하마드 왕자님, 페르도 쉐프. 돌아가셔도 됩니다.”

페드로가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제 이름은 페드로입니다만…….”

분명히 전에는 제대로 불러 주셨는데?

페드로가 송아지 같은 눈망울로 울망울망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존경하는 임진혁 쉐프가 자기 이름도 모르다니 슬픈 일이다.

그는 무하마드 왕자의 궁전에 있는 쉐프들 중에서는 자신이 나름 진혁의 수제자급이라고 자칭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슬펐다.

“진혁 쉐프가 페르도라고 하면 페르도인 거지. 자, 우린 돌아가자고.”

무하마드 왕자는 부하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진혁 쉐프가 더 중요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지 않자 진혁이 덧붙였다.

“주문서는 오래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저녁 8시까지 주시면 바로 샘플을 제작해서 내일 오전 9시에 찾아뵙겠습니다.”

“한국 시간인가?”

“예.”

무하마드 왕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좋아, 좋아. 바로 해서 보내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

오직 무하마드 자신만을 위한 케이크!

‘얼마나 맛있을까.’

진혁과 이야기하면서 생겼던 고민들은 전부 날아갔다.

지금 미식 평론 대회를 엎건, 이번에는 그대로 개최하건 상관없다.

‘내일 먹을 수 있다니.’

이런 종류의 케이크를 주문하면 대략 2주 정도는 걸린다.

그런데 바로 만들어 준다고 하니 더 기뻤다.

자신이 어떤 메뉴를 고르더라도 밤을 새워서 만들어준다는 것이 아닌가?

‘어떤 케이크를 고르는 게 제일 맛있을까.’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그는 이전에 진혁이 예술품으로 출품했던 초콜릿 케이크를 상상했다.

단순히 먹을 것이 아니라 아트(Art) 자체를 초콜릿 케이크로 재현했던 물건!

‘우리 아랍 왕실의 보물을 보여 줄까? 그러면 맛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케이크가 재현되려나. 아니야. 그걸 어떻게 먹어.’

옥을 깎아 만든 술잔.

녹색 유리로 만든 물담배 케이스.

유리로 만들어 황금을 입힌 그릇들.

일반인들에게는 전시하지도 않고, 보여주지도 않는 왕궁의 보물들!

그는 국보로 지정되어 보관 중인 수많은 보물들을 떠올렸다.

‘예술가들은 또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니, 이번에 한 번 보여줘야겠어.’

무하마드 왕자는 페드로를 동반하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재에 들어가 백지 위에 펜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초콜릿 베이스에 바닐라 향…….”

무하마드가 제일 좋아하는 맛.

달콤쌉쌀하면서도 진한, 카카오의 향을 살린 순수한 초콜릿.

그는 악마의 유혹처럼 진한 초콜릿 케이크를 원했다.

대략적인 메모를 마친 후 무하마드 왕자는 비서를 불러 지시했다.

“내 왕궁에 있는 보물 카탈로그. 컬러로 있나?”

“예? 예.”

“그걸 임진혁 쉐프에게 보내주게.”

“예? 그 목록은 국보로 지정되어 지정된 인물들만 보시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임진혁 쉐프도 봐야지. 그걸 봐야 케이크를 만드는데 참고할 거 아닌가.”

‘세계 어느 박물관에서라도 탐낼 목록들을…… 그냥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막내 비서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무하마드 왕자가 자신의 서재에서 자신이 어떤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장황하게 필기하는 동안, 임진혁은 육아실의 재난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벽면의 통유리창이 깨져 바닥과 정원까지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눈에 띌 만큼 크게 다친 자는 둘이라고 했다.

진혁이 도착했을 때 남아있는 혈향과 바닥에 쏟아진 피의 양으로 볼 때 그 둘의 상태는 심각할 것으로 예상됐다.

어딘가 중대한 혈관이라도 다친 것이 분명했다.

“부상자 두 명은 바로 성진 병원으로 후송했지요?”

왕이 비서가 대답했다.

“예. 미리 지시해두었습니다. 119에 탑승한 두 분은 지금 10분 후 성진 병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군요.”

성진 병원은 미미의 그룹이 후원하고 있는 기업 병원이었다.

“특실로 입원시키고 검사와 병원비 모두 전부 내가 부담한다고 전해 주게. 여기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가서 인사하겠다고.”

“예.”

미미의 스타일대로였다. 왕이 비서가 상기 사항을 메모했다.

‘임진혁 사장님도 황 사장님과 같은 스타일로.’

왕이는 왕 비서의 동생이었다. 황미미가 임진혁에게 붙여 줄 만한 비서로 추천을 받았는데, 왕 비서가 자신의 동생을 추천한 것이다.

왕이는 일 년간 육아를 전담하는 임진혁의 곁에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 왔다.

‘그래도 이번에 유리창이 부서진 건 놀랐어.’

아기님들은 힘이 아주 셌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고, 기물들을 파손하는 정도였다.

진혁은 상황을 살펴보았다.

“명이가 푸드 블록을 던졌군.”

“예, CCTV를 확인해 보시면 여기 모빌을 잡아 뜯어서 던졌습니다.”

“그걸 안 봐도 알 수 있지. 저기 잔디밭에 푸드 블록이 떨어져 있잖아.”

사과로 만든 이유식 따위는 유리창을 깰 수 없다.

방탄유리가 아니라 일반 유리라도 깰 수 없다.

특히 이 유리창은 바깥에서 물건이 날아오더라도 막을 수 있게 된 안전유리였다.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귀한 방탄유리를 사용해 통창을 제작했다.

방탄유리는 대개 강화 유리, 합성수지필름, 그리고 다시 강화 유리 등을 겹쳐 만들어서 만든다. 그래서 아주 튼튼해야 한다.

그때였다. 장남에게서 전음이 들려왔다.

‘아이들을 다 물려.’

그가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 황망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보육교사들이었다.

“자녀분들은 괜찮습니다.”

이낙호가 중얼거렸다. 진혁에게 보고를 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새로이 고용된 보육교사 중 나이가 제일 많아 책임자로 임명된 자였다.

한국계 미국인 2세대로 미국에서 보육학을 전공하고 보디빌더 프로 자격증을 땄으며, 2년 전부터 한국의 영어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부모님에게 배웠다던 한국어 역시 유창했다.

그러면서도 근육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체격도 좋았다. 188cm의 키에 108kg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잘 발달된 승모근과 대흉근 그리고 상완과 하완의 근육이 불끈거렸다.

한국계 아놀드 슈왈즈네거처럼 보이는 풍모였다.

그렇지만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도 병원에 보내야겠는데.’

진혁은 이낙호를 보았다. 불끈불끈 근육이 솟아있는 어깨와 팔에 언뜻 핏방울이 비쳐 보였다.

“아드님께서 모빌에 달려 있는 동전과 지폐를 집어 들어 드시다가 맘에 안 드는지 몇 개씩 던지기 시작했는데 유리가 갑자기 깨졌습니다. 유리 업체에서 허술하게 시공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낙호의 옆에서 엘리엇 조가 억울한 듯이 거들었다.

그녀는 한국 명문여대의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아동 체육 교사로 일하던 인재였다.

이낙호만큼은 아니었지만,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이 좋았다.

이 여자 역시 허벅지와 어깨, 그리고 등에 유리 파편이 일부 꽂혀있었다.

당장은 충격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왕 비서, 리무진 차량을 수배해 줘.”

“알겠습니다.”

왕이 비서는 토를 달지 않고 수긍했다. 하지만 보육 교사들이 놀랐다.

“예? 리무진이요?”

“저희는 안 다쳤습니다. 그보다 아기님들이 놀라셨어요.”

“지금 두 분 다 몸에 유리 파편이 박혔습니다.”

진혁이 양복 주머니에 꽂고 있던 식용 초콜릿 펜을 꺼내 들었다.

“이 펜은 나중에 물로 지우면 지워질 겁니다.”

그리고 이낙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등, 팔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예? 이건……?!”

연봉을 1억씩 주는 하늘 같은 고용주님이 갑자기 자기 몸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이낙호가 쩔쩔매는데 옆에서 상황을 파악한 엘리엇이 말했다.

“낙호 씨,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지금 유리 조각이 박힌 부분을 표시해 주고 계신 거예요.”

“나한테 유리 조각이 박혔다고?! 분명히 다 피했는데.”

“조그만 파편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날렸나 봐요.”

엘리엇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방 자체에서 아기님들부터 격리해야겠어요. 저 이불과 요람도.”

진혁은 엘리엇의 어깨와 팔, 등, 허벅지에도 동그라미를 그려주었다.

“그런데 이 펜은 뭐에요? 달콤한 향기가 나요.”

“오렌지 맛 초콜릿입니다.”

“엇.”

엘리엇은 팔을 들어 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그거 드시면 안 됩니다. 바로 옆에 유리 조각이 박혀 있어서, 혀 다쳐요.”

왕이 비서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집 앞에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으니 바로 타시면 됩니다. 성진 병원으로 가셔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네, 네.”

“고맙습니다.”

이낙호는 바로 문을 나섰다. 자신이 몸을 다쳤다는 것에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근육을 단련했는데 유리조각도 못 막다니.”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못 막는 게 당연하죠!”

엘리엇이 옆에서 이낙호를 구박하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아기들이 멀쩡해 보여도 충격을 받았을 수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잘 돌봐야 하거든요. 저 병원 치료받는 대로 바로 돌아올게요.”

“괜찮습니다, 아기들은 제가 볼 테니 오늘은 퇴근하시고 내일 오시면 됩니다.”

진혁이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그는 아기 둘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기들을 수면실로 데려가자 왕이 비서가 따라왔다.

“비서님, 이제부터는 저 혼자 있어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수면실의 전등을 켰다.

아기용 요람이 두 개, 새로 놓여있었다. 그는 아기들의 옷을 벗기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유리 조각이 남아있을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그 자칭 교사들 말인데 너무 약하고 줏대가 없어. 반면에 명이는…….』

장남은 기억을 잃은 둘째를 완전히 동생으로 인정했다. 무공밖에 모르던 남궁소천이다. 그런 그가 혈육과 함께 24시간 내내 있으니 꽤나 귀여운 모양이었다.

『얘는 천재야. 내가 기를 담는 방법을 가르쳐 줬더니 벌써 응용을 하더군. 어때, 은자 값은 훌륭히 했지?』

첫째가 신이 나서 으스댔다. 차남은 동전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바나나와 사과 이유식에 기를 담았다. 과연 첫째 말대로 가히 천재라고 할 만했다.

어머니인 황미미 앞에서 일반인인 척한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고용인들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것이 장남의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 새끼 기억을 괜히 날렸어…….’

진혁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무공광 중의 무공광,

무림 맹주 남궁소천.

그에게 아기를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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