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9화
외전 3화
오랜만에 만난 무하마드는 임진혁을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진혁 쉐프! 얼마 만입니까.”
그는 비단 터번을 멋지게 두르고 망토까지 차려입었다.
친족의 결혼식에나 참석할 법한, 권위 있고 품위 있는 복장이었다.
물론 진혁은 무하마드가 진혁만을 위해 멋진 제복을 입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서 새하얀 쉐프복을 입고 서 있는 쉐프는 알아보았다.
“페드로 쉐프도 오랜만입니다.”
“저를 기억해 주시는군요! 이번 미식 심사에 참여해 주시는 겁니까?”
“음, 아니요. 미식이 아니라 미각 심사 아닙니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희와 함께 지난 미식 평론 대회에 출전했던 음식 목록들을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미식 평론 대회에서 우선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미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절대 미각’ 이었다.
요리 대회와는 결이 다르다.
대회 참가자들은 예선에서 특정한 허브나 음식 재료 따위의 향과 맛을 보고 무엇인지 알아맞혀야 했다.
60% 이상 승률을 보인 이들은 본선까지 진출해 특정한 요리를 먹고 그 요리에 대해 평가를 했다.
어떤 것이 더 맛있는지, 왜 맛있는지, 어떤 재료를 썼는지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한다.
누가 더 예민하고 민감한 미각을 가졌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시험 메뉴로 나오는 메뉴는 맛과 맛 사이에 진짜 재료를 숨겨, 흐리멍덩한 맛을 선보이는 꼴이 되었다.
진혁은 예선과 본선에 등장한 메뉴들인 살구를 숨김 맛으로 곁들인 레몬 파이라든가 아몬드와 호두, 피스타치오를 갈아 넣은 밀크티 등등을 보면서 혀를 찼다.
레몬 파이에는 굳이 숨김 맛으로 살구를 곁들일 필요가 없으며, 밀크티에는 한 종류의 견과류만 넣어도 된다.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
솔직히 말해서 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절대 미각을 굳이 길러야 하나? 상대 미각이면 충분한데.’
이전에는 진혁도 절대 미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아이에게 다양한 종류의 푸드 블록 이유식을 먹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절대 미각이 없어도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오히려 방해가 되지.’
절대적인 초콜릿의 맛이 A라고 가정하자.
임진혁은 이 초콜릿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었다.
첫맛으로 부드럽고 고소한 버터크림 맛을, 그리고 중간 맛으로 초콜릿을, 마지막 맛은 레몬껍질을 갈아 넣어 씁쓸한 맛을 느끼게 했다. 이 재료들은 초콜릿의 맛을 더 강하게 하는 장치다.
하지만 절대 미각을 갖고 있다면?
무엇을 먹어도 그 맛을 선명하게 느낀다.
진혁이 의도한 대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교육을 했지.’
이전에 무하마드 왕자와 그의 요리사들에게 진행했던, 미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교육들.
진혁의 표정을 보고 무하마드가 물었다.
임진혁은 지그시 무하마드를 응시했다.
“……최소한 이대로는 아닙니다.”
진혁은 육신을 한계까지 단련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예민하고 섬세한 미각을 지녔다.
미각만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 촉각과 시각 역시 뛰어나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맛있는 빵을 구워낼 수 있었다. (물론 칼로 사람들을 썰고 다닐 수도 있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촉각을 가졌는지 심사하는 대회라거나, 누가 가장 뛰어난 청각을 가졌는지 심사하는 대회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페드로 쉐프가 대답했다.
“음, 그건 아무래도 청각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이 더 유리하겠군요.”
“예.”
무하마드 왕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진혁 쉐프님, 그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신 참가자 명단 말입니다.”
진혁은 무하마드가 미리 보내준 참가자 명단 출력본을 손으로 하나씩 짚어 보였다.
“대회 우승 후보 중에서 실제 요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네요. 1, 2회 대회에서는 요리사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미각 훈련 방식이 오히려 요리사들에게는 방해가 되는 겁니다.”
페드로가 항의했다.
“예? 저희 요리사들은 이 방식으로 훈련해서 도움이 많이 됐는데요. 진혁 쉐프님이 직접 교육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임진혁이 물었다.
“요즘에는 어떻게 관리하고 계십니까?”
페드로는 줄어든 뱃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아침 근무는 다 함께 아침 기도를 마치고 한 시간 동안 달리기로 시작합니다. 공복 유산소를 마친 후에는 5분간 허브 향, 고기의 냄새 등을 맡으며 구별하고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3시 기도를 마치고, 브레이크 타임 동안에는 트레이너님과 함께 근력 훈련을 하고요. 근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기 전에 허브와 향 등으로 한 차례 더 혼합 테스트를 합니다.”
무슬림의 기도 시간은 하루 다섯 번이다.
새벽 5시, 오후 1시, 3시, 6시, 7시에 기도를 한다. 기도 시간은 대략 5~10분. 이 기도 시간은 격렬한 훈련을 받는 이들이 적당하게 쉴 수 있는 핑계가 되어주었다.
진혁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제가 알려준 방법 그대로 하고 있군요. 벌써 일 년이 지났는데, 어느 정도 방법을 개선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미각 시험과 교육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까?”
“상대 미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따로따로 냄새를 맡는 훈련은 기초 훈련입니다. 매일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5분 이내로 시간을 제한해야죠.”
“그럼 더 이상 훈련할 필요는 없습니까?!”
“아니요. 복합적인 음식 안에서 맛을 구별해낼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죠. 레몬 향을 맡았다면 그날은 레몬 파운드 케이크를 먹어 보는 겁니다.”
페드로가 입을 O자 모양으로 벌렸다. 무하마드 왕자가 환희에 가득 차 말했다.
“아아……! 그렇게 하면 되는군요!”
진혁에게 있어 절대 미각은 어디까지나 맛있는 빵을 구워내기 위한 수단이지,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하마드 왕자는 미식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미식에 있어서 절대 미각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절대 음감 같은 거군요.”
왕족인 무하마드는 어렸을 적부터 궁정에서 악기 연주를 배웠다.
특히 그는 아랍의 전통 현악기인 ‘까눈’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이 사다리꼴 모양의 악기에 짐승의 창자를 다듬어 만든 스물네 개의 줄을 걸어, 뿔로 만든 채로 친다. 피아노의 원형인 하프시코드와 유사한,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악기다.
무하마드는 왕족답게 어려서부터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자랐고, 절대 음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 음감을 지니지 않은 다른 형제들과 비교해 음악을 배울 때 난항을 겪었다.
절대 음감이란 음의 절대적 높이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담아 연주를 할 때 이 ‘절대음감’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음조를 살짝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는 데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절대음감이 있는 이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정답이 눈에 보이는데 억지로 어긋나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상대음감만 있는 이들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왜 꼭 절대 미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게 왜 필요합니까?”
진혁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무하마드 왕자는 할 말이 많았다.
“그야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음식을 먹었는데 그게 왜 훌륭한지 알지 못하면…….”
진혁이 무하마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은 그냥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겁니다.”
“!”
“이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 진정 맛있는 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 그게…….”
실제로 대회에 나가는 미식 요리를 만들었던 페드로가 머뭇거렸다.
파슬리와 바질의 향은 명백하게 달라 일반인도 구분하기 쉽다.
하지만 오렌지 제스트와 레몬 제스트의 향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대회의 난이도 조절을 위해 두 가지를 섞어 요리를 만드는 등, 그는 미식 평론 대회에 나갈만한 요리를 만들기 위해 고뇌를 해 왔다.
지금 진혁이 하는 말을 들으며 페드로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 추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눈가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진혁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페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하마드를 보면서 말했을 뿐이다.
“지금은 그냥 초등학교 장기자랑 수준입니다. 요리를 하려면 절대미각보다 상대 미각을 발전시켜야 하고, 상대 미각을 발전시키려고 할 때는 최대한 맛있는 요리를 먹어야 합니다. 지금 이 메뉴로는 안 됩니다.”
진혁이 솔직하게 말했다. 페드로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임진혁 쉐프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뭘요?”
“새로운 메뉴 개발을 도와주십시오. 솔직히 어떤 음식을 문제로 내놓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내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맛있다고 먹느라 맛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문제를 맞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화 자체를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맛보다 일단 재료를…….”
진혁이 페드로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건 그 사람들이 수준이 낮은 겁니다. 예선 통과 커트라인을 너무 낮춘 거죠.”
묵묵히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무하마드가 말했다.
“지금 이 대회는 틀려먹었다는 거군요? 대회 컨셉부터 잘못됐고, 예선 문제와 본선 문제도 잘못됐다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하마드 왕자가 말했다.
“1천만 달러는 어떻습니까.”
천만 달러.
한화로는 대략 120억.
지금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진혁에게도 거대한 돈이다.
진혁이 반문했다.
“예?”
“임진혁 쉐프가 이 대회의 컨셉부터 메뉴까지 전부 짜고 실행할 수 있도록 1천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많은 돈이다. 하지만 진혁은 이 대회 자체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건 됐고, 전에 의뢰하셨던 케이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페드로는 길을 잃어버린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임진혁을 응시했다.
하지만 진혁은 페드로를 무시하고 무하마드에게 말을 걸었다.
“저한테 최고의 케이크를 만들어달라고 하셨었습니다. 진희가 이제 그걸 만들어 줘야 한다고 연락을 했는데요.”
진혁이 A4 용지를 한 장 내밀었다.
“이것부터 읽어보시죠.”
무하마드 왕자는 영어 문서를 집어 들어 훑어보았다.
“……이게 뭔가?”
“주문서입니다.”
임진혁이 혀를 찼다.
“주문서를 보내주지 않으셔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주문을 하려면 정식으로 주문서를 넣어주셔야 합니다.”
주문서를 들여다본 무하마드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이런. 우리 사이에 주문서가 필요하다니? 구두 주문으로 안 되나?”
무하마드가 터번 뒤쪽을 긁적이며 서류를 읽었다.
“내가 생각하는 제일 맛있는 케이크. 최고의 케이크는 무엇인가. 그건……, 어, 음. 초콜릿도 좋고 치즈도 좋고 버터크림도 좋고 우유 베이스도 좋고 후르츠 베이스도 좋은데.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은데. 지금 당장 여기서 적어야 하나.”
진혁은 팔짱을 끼고 말없이 무하마드를 지켜보았다.
“알았어, 하나만 고르면 되잖나.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