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8화
외전 2화
“말을 이상하게 하는데.”
“응?”
“최고의 케이크와 미식 평론 대회는 별개의 문제잖아. 둘 중 뭘 부탁하고 싶대?”
“둘 다. 미식 평론 대회에 나가서 심사위원 하면서 틈틈이 케이크 만들어 달래.”
“…….”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그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다만 그 약속을 언제 지킬지는 특별히 정하지 않았다.
‘일 년이라. 오래 기다리게 하긴 했군.’
여태까지는 진혁이 전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미미가 유모를 여러 명 고용해 보았으나 그들은 힘이 센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상을 입었다.
‘아이의 몸에 담긴 선천진기, 태아 시절에 모아 키운 단전, 거기에 직접 축기한 기 때문이겠지.’
모유 수유를 할 때도 젖을 빠는 힘이 지나치게 셌기 때문에 모유를 따로 유축해서 먹였다.
탁기가 전혀 없는 아이의 몸으로 기를 쌓다 보니 한 살인 지금은 이미 성인 남자의 힘에 달할 정도로 엄청났다.
장남은 괜찮았으나 차남이 문제였다. 뒤뚱거리며 걷다가 실수로 발 구르기라도 하면 바닥에 있는 장판까지 밀려서 찢어질 지경이니 일반인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둘째의 기억을 날려 버리고 나니 둘째 녀석이 힘 조절을 아예 하지 못했다.
자기가 자기 손가락을 깨물다가 물어뜯을 뻔하기도 하니, 힘 조절을 도와줘야 했다. 이건 정말로 진혁밖에 도울 수 없는 문제였다.
‘잠깐,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잖아.’
진혁은 임진희에게 인사를 하고 육아실로 향했다. 그리고 큰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요람에 누워 있던 장남, 임책이 똑바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는 생각 없나?』
『아르바이트? 그게 뭐지?』
『은자를 모으고 싶다고 했잖아? 동생을 잘 돌보면 계좌에 돈을 적립해 주지.』
* * *
임진혁은 육아에 아주 최적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체력이 좋았다. 24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아도 되니 아이가 잠들었다가 깼을 때 상시 대기하다가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었다.
또한, 아기가 기저귀를 더럽혔을 때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기저귀를 열어보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후 장남은 병적으로 기저귀를 더럽히기를 싫어했다. 제정신으로는 못 할 짓이라고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아이가 손짓을 하면 자그마한 유아용 변기에 앉혀 줘야 했다.
“큰애가 참 똑똑해요. 저 나이에 벌써 수치심도 알고.”
장남을 구석의 유아용 변기에 앉혀 두고, 자그마한 커튼을 쳐준 미미가 방긋 웃었다.
“……음, 그렇죠.”
첫째는 둘째를 돌보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동의했다.
육체적인 힘 자체는 둘째가 더 셌으나, 힘을 쓰는 요령은 기억이 있는 큰놈이 더 좋았다.
애초부터 무가의 천재였으며, 천마와 라이벌로 오르내리던 무림맹의 맹주다. 대주에 불과했던 혈와수와는 실력 차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애들 교육을 위해서 장난감을 좀 샀어요.”
“어떤 장난감입니까?”
미미가 미리 제작된 장난감을 보여주었다. 육아실 옆의 방을 완전히 창고로 개조한 모양이었다.
달러와 원화, 위안화 모양의 모빌. 블록 놀이와 동화책 등 방 하나가 아예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아용 주판까지 포함해서 대부분이 ‘돈’을 테마로 한 장난감이었다.
진혁이 장난감들을 둘러보았다. 미미가 하려는 경제학 교육이 어떤 것인지 대강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양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임진혁이 모빌에 손을 갖다 댔다. 100원짜리와 500원짜리부터 시작해서 5만 원짜리 지폐까지, 색색의 돈이었다. 실제 돈과 같은 사이즈, 크기로 질감까지 재현되어 있다.
“이건 웨이퍼 페이퍼에 식용 잉크를 출력한 거군요? 동전은…… 베이컨 아스파라거스 푸드 블록입니까?”
오감이 예민한 임진혁도 실제로 만져보기 전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였다.
“동전은 푸드 블록에 식용 커버를 씌웠어요. 종이째 동전을 뜯어 먹어도 안전하게 만들어졌죠. 여기 이 모빌을 달아 둔 실도 마찬가지고요.”
진혁이 만들어낸 물엿으로 실에 붙이고, 채소 섬유를 아주 가늘게 실처럼 뽑아서 연결했다.
“오이와 파프리카, 사과인가요.”
“뭐가요?”
“여기 이 모빌을 연결한 줄 말입니다.”
“네, 맞아요. 아이들이 먹어도 되는 음식 목록을 전달했거든요.”
진혁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금 나이와 경지라면 벽곡단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편이 오욕칠정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미미가 반문했다.
“쉐프로 키우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셔요?”
“쉐프요?”
“아이들에게 밀가루 반죽을 만들면서 놀게 하셨잖아요? 그래서 한 명은 쉐프로 키워서 아버님의 가업을 물려주려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가업이라.”
임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소망 베이커리는 가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빵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커졌다.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는 빵집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키워낸 프랜차이즈 밀키트 사업.
임진희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진혁의 사업을 도우며 푸드 컨설턴트 일을 맡았다.
자기는 한 군데에서 일하는 것이 싫다며 아버지의 빵집 일을 물려받는 것에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업은 진혁이 물려받게 되리라.
하지만 그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해서 진혁은 회의적이었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많은 것을 배우긴 했지. 하지만 첫 번째 삶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
무림에서 정신없이 구르며 고생하던 그 시절이 있기 전에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발심을 느꼈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는 핑계로 어설프게 제과제빵학교에 적을 두고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방탕하게 놀았다.
진혁은 주변에 시선을 두었다.
그는 500원짜리 동전 모양의 푸드 블록을 만지작거렸다. 오백원짜리는 총 열세 개가 매달려 있었다. 열세 개 전부가 다른 향기를 풍겼다. 그는 한 개를 뜯어내 껍질을 벗겼다.
마늘 향을 풍기는 갈아놓은 돼지고기였다.
한입 물어보자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유통기한을 고려해 돼지고기는 염장한 모양이었다.
‘이건 유통 기한을 생각하면 적어도 보름마다 갈아야겠는데.’
아이가 모든 모빌을 뜯어먹을 것은 아니니, 실용적인 물건은 아니다.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모빌은…… 시몬 쉐프님이 만드신 게 분명하군요.”
“어, 아니에요. 루이스 강 쉐프님이 만드셨어요.”
“루이스가요?”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집요하게 동전의 모양을 재현하려고 애쓴 양각 부조, 맛의 완성도를 보고서 시몬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백원짜리 동전 가운데에는 커다랗게 500이라는 숫자가 양각되어 있다. 위쪽에는 2002년이라는 연도가, 아래쪽에는 한국은행이라는 글자가 동전 그대로다.
오돌토돌하게 자그마한 반구가 동전 전체를 둘러싸고, 바깥쪽 테두리도 양각되어 있다. 뒷면의 두루미 역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진짜 동전과 유사하여 아이 장난감으로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다.
진혁은 감탄했다.
‘루이스가 이 정도의 완성도를 낼 수 있다니.’
“예. 진혁 쉐프님에게 선물한다고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들었다던데요.”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다시 한번 마늘 향 돼지고기 푸드 블록을 맛보았다. 잘게 갈아 넣은 호밀빵 가루도 느껴졌다.
은동이네가 재배한 호밀일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마늘 목걸이를 걸고 호밀밭을 뛰노는 돼지……?’
그려지는 그림이 코믹하다. 겉모양만이 아니라 맛 역시도 뛰어나다. 그는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에도 계속 앞서 나가고 있구나.’
“오백원짜리는 루이스 쉐프가 만든 거고, 지폐들은 마리오 쉐프가 만든 거라고 했어요.”
웨이퍼 페이퍼는 본디 맛이 나지 않는 물건이다.
종이를 실제로 먹는 것처럼 바삭하여 식감을 우선으로 하게 된다.
강 마리오는 웨이퍼 페이퍼 위에 달콤하고 짭짤한 맛이 나는 식용 잉크로 지폐를 그려냈다.
아삭-
임진혁은 5만 원짜리 지폐에 혀를 뻗어 살짝 맛보았다.
딸기와 바나나, 그리고 카카오 맛이 났다. 옅은 노란색 잉크에서는 바나나, 그리고 검은색에서는 카카오 함량이 높아 달콤쌉쌀한 다크초콜릿.
은빛은 무엇으로 냈는지 알 수 없지만 달콤하고 쌉쌀한 맛을 뒤받쳐주는, 살짝 간지러운 맛이었다.
“이건 식용 잉크 프린터에서 인쇄한 게 아니라 붓으로 일일이 그린 거군요?”
진혁은 5만 원짜리 지폐처럼 만들어진 웨이퍼 페이퍼를 접어서 그대로 씹어보았다. 은빛은 식용 은가루를 아주 옅게 뿌려서 낸 모양이었다.
미미가 머뭇거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듣지 못했어요.”
“마리오도 정교함이 부족했는데. 많이 나아졌군요. 지폐 일련번호는 딸기 시럽으로 그렸고.”
루이스도 지금은 시몬 쉐프와 비슷한 정도지만, 앞으로는 실비아 쉐프만큼이나 실력을 키울지도 모른다. 마리오 역시 실력이 많이 늘었다.
진혁은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부 활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미미가 반색했다.
“너무 좋은 생각이에요! 이제 경영과 투자, 그리고 외국어 영재 교육도 시작해야 하니까요. 진혁 씨는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 되어요.”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지금 그러기엔 너무 이른 게 아닙니까?”
“큰애가 말을 다 알아듣더라고요.”
‘야, 임마. 일반인인 척 한다며.’
진혁은 미미가 안고 있는 장남을 흘깃 바라보았다. 장남의 동공이 흔들렸다.
‘연기력을 좀 더 갈고 닦아라, 아들.’
“준비된 교사들이 있어요. 지금 바로 데려와서 보죠.”
보아하니 아이를 낳기 전부터 아예 선발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한 시간 후, 미미는 자랑스럽게 사람들을 선보였다.
남자 여섯 명과 여자 여섯 명. 전부 얇은 티셔츠로는 감출 수 없는 울룩불룩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보디빌더 출신이라고 할 만했다.
“전부 믿을만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을 보고서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들로요? 다칩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 돌봤던 사람들은 아이들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요, 보디빌더 출신의 보육교사들을 모집했어요.”
열두 명의 남녀와 진혁이 남았다.
진혁은 이들을 훑어보았다. 네 명은 기운이 탁기로 흐려져 있었다. 그가 미미에게 말했다.
“여기 여덟 명이면 되겠습니다.”
“그래요?”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받지 못한 네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남은 여덟 명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진혁과 미미를 응시했다.
“음…… 한번 해 봅시다. 저도 함께 있다면 괜찮을 겁니다.”
진혁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진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2~3일 후에 자신과 무하마드의 미팅을 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아이들도 자신의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야 해.’
소개를 마치고서 미미가 밝게 웃었다.
“그럼 저는 다녀올게요.”
그녀는 중국으로 출장을 갈 예정이었다. 미미가 방을 떠나고 나서 진혁이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어머니를 대할 때만큼 조심해라.』
이틀 동안 훈련을 거친 끝에, 첫째를 완벽하게 훈련시킬 수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은 훈련이었다.
“듣기는 했지만, 자녀분이 정말로 힘이…… 세요.”
둘째 때문에 쇄골뼈가 골절된 보육 교사가 병가를 냈다.
손목이 부러진 자도 있었고, 작은 발에 걷어차여 갈비뼈가 부러진 자도 있었다.
다행히도 네 명이 다치고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남았다.
힘이 센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기가 꼼지락거릴 때 빠르게 피할 줄 아는 눈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진혁은 그 넷을 정식 돌보미로 임명했다.
“다른 분들은 병가를 마치시는 대로 돌아올 겁니다. 둘째가 손을 내뻗거나 뭔가를 던지려 하면 피하시고요.”
진혁이 당부했다. 보육교사들이 대답했다.
“네.”
마침내 아이들을 온전히 맡기고, 진혁은 무하마드를 만나기 위해서 저택으로부터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