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7화
외전 1화
어머니 앞에서는 일반인 행세를 하자는 것에 두 아기 모두 동의한다는 점이 기뻤다.
최소한 낳은 정을 인식하고는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존중해서 말을 나눌 가치가 있다.
미미가 자리를 뜨자 임진혁이 아기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과정이 문제다.』
『왜, 뭐가.』
『주군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게 문제야.』
진혁은 아들들을 한 명씩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는 너희가 살던 세상이 아니야.』
양팔로 엉덩이를 잡자 흔들리지 않았다.
『크읏……!』
큰아들이 치욕스러워 하며 칭얼거렸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영광입니다, 주군!』
『이쪽을 봐. 남궁가의 마지막 식솔들까지 전부 흙이 되어 사라진 지 오래라고.』
그는 육아실의 창가로 걸어갔다. 한남동 저택의 육아실은 3층이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무척 아름다웠다.
화창한 봄, 아름답게 꾸며진 녹색 정원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알록달록하게 피어났다. 좁은 붉은색 벽돌담 너머로 납작한 한옥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파란 지붕을 뽐냈다.
‘……어라.’
진혁은 입을 조금 벌렸다. 상하이의 집이라면 간단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현대 문물의 집성체인 콘크리트 빌딩과 유리 창문을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이곳은 전통 한옥 건물이 많은 동네였다.
남궁소천이 자그마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악한 환술이 아닌가?』
『이 유리창을 만져보라고.』
『이게 유리창이라고?』
『굉장한 상등품의 유리군요. 이토록 빛을 통과하다니. 여태까지 창이 없다고만 생각했습니다만…….』
『그래. 문화와 풍습도 다르지.』
『…….』
이미 천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
검술과 도끼 따위는 아무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그리고 전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더 적응하기 쉬울 것이다.
『교주님, 저의 기억을 지워 주십시오.』
광폭대주 혈와수가 먼저 제안했다.
『진심이냐? 기억을 한 번 지운다면 되돌릴 수 없다.』
『어차피 제가 후대에 물려주고 싶었던 건 제 무공뿐인데 그건 교주님이 알고 계시고.』
둘째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전과 얼굴은 다를진대 그 표정이 너무나도 옛날의 부하와 닮아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교주님,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왜?』
『영광스럽게도 교주님의 차남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 악독한 정파의 수괴 놈을 형으로 모시는 것만은 제정신으로 못하겠습니다.』
남궁소천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진혁이 손을 내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그리고 이곳은 지나치게 평화롭습니다.』
혈와수는 교주가 창문을 보여주기 전부터 이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기들에게 밥을 먹이는데 호위가 없다. 기미를 하는 사람도 없다.
이곳은 평화 그 자체로, 그의 무학적인 재능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사스럽게 짧은 옷을 입고 돌아다녔으며 그 옷감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색깔을 썼다. 귀족이나 무가의 가문이라면 사용하지 못할, 하물며 황제에게만 허용된 색깔인 자주색과 금색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입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교주님까지 계시니 이곳은 일월신교의 천국이 분명했다. 천 년이 지나면 일월께서 이 땅을 완전히 지배하리라 했는데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리라.
그리고 전투기술이 필요 없다면…… 교주님의 말대로 하는 것이 옳다. 감히 교주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이 천국에 왜 무림맹주가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저놈이 싫었다.
『모친께서는 형제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시고 저는 저놈하고 사이좋게 지낼 자신이 없습니다. 생사결을 하면 모를까요.』
『그건 안 된다.』
『예, 그러니 차라리 제 기억을 지워주십시오.』
그는 둘째의 백회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혈와수는 평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남궁소천이 비명처럼 외쳤다.
『제 부하의 정신까지 말살하는 것이 참으로 악독하구나!』
* * *
섭혼술을 통해 기억만을 날려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음.』
둘째는 기억을 잃고 아기로 돌아갔다. 이제까지 쌓아놓은 신공이 있으니 튼튼하고 강할 것이다. 앞으로 자라나면서 미미의 교육을 받으면 된다.
진혁은 혈와수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었다.
하지만 완연한 아기로 돌아가 옹알이를 하는 둘째를 보니 마음 한 켠이 씁쓸했다.
‘황태명 녀석은 행복했을까?’
다시 태어나 뛰어난 두뇌로 권력을 누렸으나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 말년에 손녀사위 제대로 보겠다고 온갖 계획을 실천했고…… 그 계획은 성공했다.
‘미미 씨와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분명히 없었다. 일찍 죽을 누군가와 새롭게 인연을 맺고, 가족을 늘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기존에 있는 가족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를 하고, 그가 권한 음식을 거절하지 않고 먹고, 그의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함께 하는 것이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미의 부하들이 어쭙잖은 수작을 부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예전에 그의 침상에 올라오려고 서로 독을 보내고 칼부림을 하던 일월신교의 여자 고수들과 달랐다.
어떻게 하면 미미를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인가, 미미의 얼굴을 좀 더 생기있게 하려면 어떤 색깔의 분을 발라야 하는가, 테라스에서 만날 때 어떤 각도로 서 있어야 조명이 더 예쁘게 비출 것인가.
기껏해야 그 수준의 음모였다.
거기에 덧붙여 진혁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따위도 함께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오는 연애였다.
‘그 녀석의 손녀만 아니었으면 훨씬 더 빨리 결정했겠지만.’
끈질긴 인연으로 묶였다가 마침내 혈연으로 묶여버린 놈.
진혁의 생애 동안 그놈이 또다시 태어나면 바로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
혈와수가 아니라 광안마였다면 이렇게 쉽게 기억을 날려 버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안마는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면서도 현실에 무사히 적응했다.
하지만 혈와수는 정말로 단순한 놈이었다. 이놈은 혈도객과 아주 닮아 있었다.
진혁은 그것이 천성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기질이기를 바랬다.
『나 말고 네 엄마를 닮아라.』
애틋한 듯 둘째를 쓰다듬는 모양을 보고서 장남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모친에게 효는 다하겠으나 네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으면 어쩔 건데. 친자 검사라도 해 줄까.』
『친자 검사……?』
『유전자를 검사해서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증명하는 거지.』
『……그 유전자라는 건 뭔데.』
장남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냥 이 새끼 기억도 날려 버릴까.
진혁은 장남을 쳐다보았다.
『나는 일월신교에 입교할 생각이 없다. 죽일 건가?』
진혁이 딸랑이를 흔들어 주었다.
『내 아들을 왜 죽여.』
딸랑딸랑.
그렇게 좋아하던 방울 소리를 들려주는데 쳐다보지도 않는다.
‘연기였나.’
진혁은 조금 슬퍼졌다. 그는 하늘색 딸랑이를 내려놓고 장남을 안아 들었다. 장남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세상은 일월신교의 천하인가?』
일월신교!
마교 마교 하던 놈이 일월신교라고 존중해 주었다!
조금 귀여워 보인다. 어쩌면 이 싹수 노란 장남에게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진혁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니.』
육아실에 누워 있는 아기는 세력 구도를 파악할 수 없다. 장남이 힘겹게 물었다.
『그럼 정파가……?』
『아니.』
진혁이 고개를 젓자 장남이 다급하게 말했다.
『세상에 또 다른 세력이 있단 말인가? 황실인가? 설마 정파와 일월신교가 힘을 합쳐…….』
『돈이다.』
『뭐?』
『상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 모든 힘은 돈에서 나온다.』
진혁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세계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일월신교의 교주이자 천마인 그대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란 말이오?』
장남은 점점 더 점잖아졌다.
『그렇다. 나도 빵을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벌고 있지.』
장남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빵을 만들고 싶으면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빵이라니, 그게 뭐지. 월병 같은 건가.』
진혁은 스마트폰의 빵 사진을 보여주었다. 푸드 블록으로 지어진 성과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케이크들이 줄줄이 보였다. 장남은 진지하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빵인가? ……빵을 만들면 강해질 수 있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 주고서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만류귀종이라.』
중얼거리고 있는 장남에게 그가 밀가루 반죽을 손에 쥐여주었다. 아주 조그마한 덩어리다. 장남이 반죽을 조몰락거렸다.
『말랑말랑해.』
『아참, 그거 먹으면 안 된다. 아직 안 익힌 거라서.』
『!』
장남은 팔을 구부려 막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다시 오물쪼물 주먹을 쥐었다 펴기 시작했다.
『그래, 잘한다. 그렇게 연습하는 거야. 반죽을 해서 손힘을 길러.』
『이런 것보다 외공을 익히는 게 더 좋지 않나?』
『……네 나이를 생각해라.』
* * *
사흘 후, 가족들이 방문했다. 황미미의 생일을 맞이하여 시부모님과 시누이가 방문한 것이다.
“며늘아기, 잘 지내고 있었어? 손자는?”
“지난달에도 보셨잖아요.”
“갓난아기들은 원래 한 달이면 부쩍 커. 그새 많이 컸네.”
아버지도 손자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많이 컸구나.”
“으아아앙.”
차남이 울음을 터트리며 손발을 휘저었다. 기저귀가 젖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둘째 손자를 안아 들며 말했다.
“둘째는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것 같네. 아기답지 않게 의젓하더니 이제는 아기다워서 귀엽다. 기저귀는 내가 갈게.”
어머니가 둘째를 데리고 육아실로 향했다. 그 뒤를 도우미 한 명이 바로 따라갔다.
“사모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할게요.”
거실에는 미미와 진혁 그리고 아버지와 진희가 남았다. 미미가 장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책이가 정말 의젓해요.”
큰아들이 어른스럽게 안겨 있는 데에 비해서 둘째 아들은 욕망에 충실하여 자주 울었다. 진희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런데 애들 이름이 책이랑 명이가 뭐야. 너무 웃기잖아. 나중에 놀림 받으면 어떡해. 이름 바꿀 생각은 없어?”
“미미 씨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원했던 이름이라.”
“임책도 웃긴데 임명은 진짜 최악이야. 진짜 놀림 많이 받을 거다.”
“감히 놀리는 자가 있다면 알아서 처리할 거야.”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는 동안 아버지는 미미의 건강을 챙겼다.
“요즘은 많이 바쁘지는 않고?”
“직원들이 유능해서 괜찮아요.”
진희가 팔짱을 끼고서 따지듯이 물었다.
“진혁이 너 무하마드 왕자는 언제 보러 갈 거야? 자꾸 나한테 연락 온단 말이야. 푸드 블록 바이어라서 거절할 수도 없고 곤란해.”
“나한테는 연락 안 왔는데?”
“아무리 연락해도 안 받는다던데.”
“내가 물어볼게.”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용건인데?”
“예전에 최고의 케이크를 만들어준다고 했다가 흐지부지됐다던데, 이번에 미식 평론 대회를 하면서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