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5화
VIP 대기실에는 최신형 텔레비전과 고급 가죽 소파가 갖추어져 있었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는 화사하게 피어난 해바라기와 연보랏빛 수국이 보였다. 가장 바깥쪽 기둥에는 선명한 붉은색 장미와 흰장미, 노란 장미 덩굴이 장식되어 있었다.
배추흰나비가 부지런히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으나 임운정도, 장은효도 정원을 내다보지 않았다.
임운정이 힐끔힐끔 간호사실과 연결된 문 쪽을 바라보자 장은효가 말했다.
“요즘 병원은 좋기도 하네요. 대기실이 아주 번쩍번쩍하게 꾸며져 있고.”
“허어.”
“그래도 이 병원이 산부인과로는 국내에서 최고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잘 될 거예요.”
장은효가 남편을 달랬다.
대기실에는 그들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진혁 역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산만하게 걸어서 돌아다녔다.
“진혁아, 앉아 있기라도 해라.”
아버지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혁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방음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아아아악!”
그는 출산하는 데에 함께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미미가 거절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같이 들어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두꺼운 차음재나 콘크리트 벽은 진혁에게 있어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분만실에서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는지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미미의 몸 상태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아, 아아아아!”
비명은 파도가 밀려왔다가 다시 흘러가듯 높아졌다가도 다시 낮아졌다.
“산모님,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그 사이사이에 간호사가 격려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아아아!”
비명이 채찍처럼 계속해서 귀를 때렸다. 진혁은 점차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대기실에는 편안한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으나 그는 거기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진혁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본 어머니가 말을 건넸다.
“진혁아, 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네.”
진혁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가 태어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컸어. 진희도 여기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 자리에 진희는 없었다.
“여보, 걔는 지금 일 잘 하고 있잖아요.”
그녀는 일 년간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이제는 완전히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는 몇 달에 한 번씩만 들어왔다. 푸드 블록 팩토리의 미국 지사는 허니 랜드에 이어 클리닉 카페에도 손을 뻗쳤다. 환자들이 먹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낸 소박한 푸드 월은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지난 크리스마스 행사 때 소아암 환자 병동에서 벌어진 축제는 정말로 성공적이었다. 여러 신문에서 취재하러 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도 첫 조카인데.”
진혁은 부모님의 대화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차라리 이 감각을 전부 차단하는 편이 좋을까.’
그는 미미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출산 과정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곧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함이 덩굴처럼 그를 휘감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전투가 시작하기 직전에 고조되는 기분 좋은 흥분과는 궤가 달랐다.
‘이건 완전히 처음이야.’
이전 생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해보지 못할 경험을 수없이 겪어왔다. 험하디험한 산속에서 곤충과 애벌레를 먹으며 연명하기도 하였고, 암살자 훈련을 받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정파의 일원으로 위장하여 무림맹에 잠입하기도 하였고, 그 와중에 소년을 구해 부하 겸 제자로 삼기도 했다.
수만의 군세와 함께 정파와 싸웠고, 일월신교가 세상에 널리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 힘을 다했다.
교주가 된 이후에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사치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내를 가져본 적도 없었고, 아내의 출산을 겪어본 적도 없었다.
다른 이들이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혼인하여 아이를 낳는 것을 내내 봐온 적은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시대에 뿌리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족은 오직 부모님과 진희뿐이라 믿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면 자신의 열망이 무뎌질까 두려웠다.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고 현재의 지위에 안주해 버릴까 두려웠다.
우습게도 그 공포는 당시 진혁에게 있어 크나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무림에 현경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서넛이나 될까 한 시점에서 홀로 그 경지를 넘어선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천하제일마라고 불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각종 법술과 사술을 익히며 시야가 넓어졌고, 그렇기에 다음 경지로 넘어설 수 있었다.
“!”
비명이 멈추고, 의사와 간호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외부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들입니다. 둘째도 아들이에요.”
“3.2kg, 아프가 스코어는 9점입니다.”
“2.8kg, 아프가 스코어는 8점입니다.”
간호사가 아기의 탯줄을 하나씩 잘랐다. 그리고 등을 살짝 쳐서 폐에 고인 점액을 내뱉게 했다.
“으와아아앙!”
“와아앙!”
따뜻한 엄마 뱃속에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주한 아기들이 우렁차게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간호사는 아기를 하나씩 번갈아 미미에게 안겨 주었다. 그녀가 물었다.
“제 남편은요?”
“지금 부르러 갔습니다.”
직원 한 명이 아기의 탄생을 알리러 찾아왔다. 진혁은 직원이 노크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혔다.
“어떻습니까?”
모든 상황을 전부 알고 있어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직원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산모와 아드님 두 분 모두 건강하십니다.”
미미는 아직 분만실에 있었다. 아기를 낳은 후의 후산, 즉 태반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신생아 둘은 VIP 모자동실로 먼저 올라갔다.
진혁의 뒤로 임운정과 장은효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들 쌍둥이라구요?”
“세상에!”
진혁은 서둘러서 모자동실로 향했다.
“보호자님, 손 씻고 들어오세요!”
진혁이 제일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미미가 들어오지 않은 병실 안에는 간호사 한 명이 아기 두 명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이 아기가 첫째예요. 이름은 정하셨나요?
아기 두 명은 원숭이처럼 쪼글쪼글했다. 머리에는 머리카락이라기보다 솜털처럼 보이는 털이 조금 나 있었다. 간호사가 첫째 아기의 발목에 얇은 비닐 팔찌를 채웠다.
“황미미 아기 1, 0세, 남아….”
진혁이 저도 모르게 팔찌에 적혀 있는 글씨를 소리 내 읽었다. 간호사가 빙긋 웃었다.
“축하드려요.”
그녀는 능숙하게 아기를 포대기에 감싸 안고서 진혁에게 내밀었다. 임진혁은 그 아기를 받아 들어 안았다.
아기는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아까 3kg 전후라고 했던가?
너무나도 가벼워 안고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심지어 고양이 진호보다도 더 가벼웠다.
“우리 손자구나!”
손을 씻고 들어온 아버지, 이제 할아버지가 된 임운정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나도 좀 안아보자. 아이고, 귀여운 것! 내가 니 할아부지다.”
“요 조그마한 입술은 며느리하고 똑같은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서 들떠서 대화를 나누었다. 조그마한 손가락에는 열 개 모두 쬐끄마한 손톱이 돋아있었다. 너무나도 작고 연약하여 기분이 이상했다.
“….”
이제 할머니가 된 장은효가 기뻐하며 말했다.
“여기 이 눈썹 봐라. 피는 못 속인다더니, 너 어렸을 때랑 똑 닮았네.”
임운정과 장은효는 근심 걱정이라고는 없이 아주 행복해 보였다. 장은효는 스마트폰을 들어 아기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임진혁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이제 아버지가 되었군요.”
그렇다.
그는 이 두 아기의 아버지가 되었다. 기뻤다. 당연히 기쁘다. 하지만 그보다 두려움이 먼저 어깨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아기는 금방 자라서 어른이 되겠지?’
진혁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는 원래 아이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 미적지근한 입장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이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여 마침내 늙어 죽어갈 때까지 진혁은 내내 건강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와 어머니, 진희 그리고 미미가 그보다 먼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만 ‘알고 있을’ 뿐이며 그 사실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비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고 그리고 잃게 된다면 어떨까.
과연 진혁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진혁은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서 미미에게 터놓고 이야기했다.
미미는 진혁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원한다면 아이를 갖지 않아도 좋다고 대답하며 덧붙였다.
“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지는 않았어요. 저도 아버지를 존경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저도 여기에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도 원한다면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수없이 의논한 끝에 두 사람은 자녀를 한 명 갖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자연은 그에게 예상외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아들 두 명 모두 무사히 태어났고, 산모 역시 건강하다.
기쁨과 축복만이 있어야 할 터다.
그러나 그는 무저갱과도 같은 두려움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심마(心魔)다.’
그의 아들들이 만날 세상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부유한 그룹의 후계자인 두 아기는 점차 온갖 문제와 마주칠 것이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배신당하고 상처 입고 다칠 것이다. 사람들의 날것과도 같은 욕망을 마주하여 도망치지 않고 싸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형제끼리 골육상잔을 벌이려 할지도 모른다. 욕심(慾心)이란 혈연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법이니 말이다.
이 힘들고 고난으로 가득 찬 세상에 아기들을 내놓은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처음부터 아이를 갖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진혁은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아기들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아기가 상처 입을 거란 사실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세상을 무너뜨릴까 봐 두려웠다.
‘나는 너무 강하다.’
그는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진혁은 지금 두 아기에게 벌모세수를 해줄 수 있었다.
벌모세수를 받는다면 두 아기는 강인하고 튼튼하게 자랄 것이다. 흔한 병치레를 하지 않고 씩씩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튼튼하고 강인한 몸이 필요할까?’
무가의 자녀들에게 있어 벌모세수란 축복이다.
하지만 과연 현대에도 그럴까?
진혁은 천천히 아기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전에 아픈 고양이를 살리기 위해 벌모세수를 하여 강제로 환골탈태를 시킨 적이 있었다.
그 고양이, 진호는 지금까지도 다른 고양이들보다 유난히 체구가 크고 건강했다.
“내 아들들아, 오래 살고 싶은가?”
진혁이 아기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